45화
백호(白狐) (10)
“흐흐흐.”
즐거워하는 것이 분명한 웃음소리가 옆 좌석에서 들려왔다.
승효는 얼굴을 구겼다.
“얼마나 마신 겁니까.”
“헤헤.”
“선배님.”
《별로 안 마셨다. 소주잔으로 한 잔 정도야.》
보다 못한 양랑이 대꾸하자 승효는 인상을 썼다.
“그런데도 이렇게 된 겁니까?”
《그래.》
“선배님이 물이나 디카페인 외의 음료는 마시지 못하는 게 바로 이것 때문이고요?”
《그런 것도 분명 원인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어딘가 이상해. 주인은 고작 한 잔에 이 정도로 취하지 않거든. 게다가 이유 없이 술을 마시진 않는, 헉, 구가 녀석아, 조심해라!》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어 선 사이, 뒷좌석에 맞추어 몸을 줄인 양랑의 외침이 들렸다.
놀란 승효가 옆을 돌아보자 어느새 안전벨트를 푼 이준이 씩 웃으며 승효에게 팔을 뻗고 있었다.
“구승효, 왜 이제 왔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준이 승효를 와락 끌어안았다.
“한참을 기다렸다고. 문자 보낸 지가 언젠데 왜 이제 와? 응? 내 문자 씹으려고 했던 거야? 그런 거야?”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승효의 등에 업혀 쿨쿨대기만 하던 이준은 어느새 눈을 번쩍 뜬 상태다.
큰 눈을 부라리며 말을 쏟아 내고 있는 그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두 뺨에 발그레한 홍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취한 것은 분명한데.
“선……배님, 가만히 계십시오.”
승효는 낮은 소리를 냈다.
운전석에 앉은 자신에게 자꾸만 들러붙으려는 듯 팔을 뻗는 이준을 밀어내며.
“싫어! 난 이렇게 붙을 거야!”
하지만 이준은 막무가내였다.
“선배님!”
《구가 녀석아! 신호 바뀌었어!》
젠장할.
현재 구승효가 타고 있는 그의 차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뒷좌석에선 덩치를 줄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후방 시야를 가리고 있는 양랑이 자꾸만 뒤따라오는 차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조수석에서는 무언가에 취한 이준이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박(縛)>!”
결국 하는 수 없이 재빨리 괴황지를 꺼내 든 승효가 포박술로 이준을 묶자, 이준이 얼굴을 구겼다.
“이게 뭐야. 풀어 줘~ 풀어 달라고오~!”
온몸을 바둥거리며 입을 쭉 내미는 이준의 행동에 승효는 끝내 갓길에 차를 댈 수밖에 없었다.
“흐어엉.”
“……!”
“날 이렇게 묶네. 새파랗게 어린 후배가, 날 이렇게 묶어!”
이준은 이젠 아예 예쁜 눈망울에서 이슬 같은 눈물방울을 툭툭 떨어트리며 훌쩍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통곡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이준을 황당하게 응시하던 승효가 굳은 얼굴로 다시 괴황지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침(寢)>.”
날아오는 부적을 차마 피하지 못하고 맞은 이준이 스륵 앞으로 고꾸라지려 하자, 승효는 얼른 팔을 뻗었다.
“으음…….”
이준의 이마가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가만히 이준을 바라보던 승효는 의자 헤드로 그의 머리를 대어 주었다.
승효는 순식간에 고요해진 이준을 한동안 응시하다 뒷좌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산군.”
다음 말을 잇지는 않았으나 승효의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양랑이 입을 열었다.
《네 짐작과 본군의 짐작이 같다. 주인은 단순히 취한 게 아니야.》
양랑의 붉은 눈이 일렁였다.
《비생의 요기에 취했다.》
* * *
‘……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준은 웬 허허벌판 위에 서 있었다.
주변은 어두웠고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불어오는 바람도 없었으며 오로지 이준만이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여기는…….’
낯설기 그지없는 이 벌판에 자신이 왜 서 있는 걸까.
스스슥.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웬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준이 정면으로 시선을 들자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년이 보였다.
이제 막 일곱 살에서 열 살 정도 되었을까.
소년은 뽀얀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을 지니고 있었다. 비교적 예쁘장한 외모를 지닌 소년은 어딘가 수척해 보였는데, 그 모습이 놀라울 만큼 낯익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준은 사람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기에 어린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처음 보는 소년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왜 이리 낯이 익은 거지?
의아해하던 이준은 무언가를 든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저기…… 꼬마야. 너 거기서 뭐 하니?”
최대한 부드럽고 다정하게, 이준은 말을 건넸다.
이준의 접근과 상냥한 음성에 멈칫하던 소년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저건…….’
이준은 소년의 손에 웬 붉은 실뭉치가 들려 있음을 발견했다.
‘저런 걸 왜 들고 있는 거야?’
의아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소년이 갑자기 홱 몸을 돌렸다.
“헉, 꼬마야! 거기로 가면 안 돼!”
잠깐.
‘안 된다고?’
여기가 어디인 줄도 모르는데 어째서 자신은 그런 말을 한 거지?
순간적으로 의문이 차올랐지만 이준은 앞서 달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조급함을 느꼈다.
‘일단 잡고 보자.’
뛰어가는 소년을 붙잡기 위한 그의 발걸음 속도가 빨라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덥석!
“말했잖아. 거긴 위험하니 절대로 가면 안 된……!”
온 힘을 다해 소년을 따라잡고선, 앞으로 뻗어 가는 그의 손목을 잡아챈 이준은 소년에게 외치려 했다.
그러나 허공에서 부딪힌 소년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이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는……!
“헉.”
강한 압력을 느낀 이준이 번쩍 눈을 떴다.
두근두근. 두근―.
꿈속에서 미친 듯이 달렸던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소년의 눈을 보자마자 느낀 감정 때문인지.
정확히 어떤 것이 원인이라 치부할 순 없으나 거칠게 뛰기 시작한 심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투둑.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를 듣던 그는 미간을 좁혔다.
‘여기는…….’
슬며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낯이 익었다.
이곳이 구승효와의 ‘동거 집’ 내부인 제 방 침대 위라는 것은 알아차렸다.
그의 시야로 들어온 천장 색이 몹시도 낯익었으니까.
‘그런데 난 분명…… 백 기자와 함께 있었는데.’
어째서 침대 위에 있는 거지?
간밤에 벌어진 일을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더듬던 이준에게 돌연 두통이 일었다.
[구승효 씨의 정보를 내게 넘겨요.]
[결국엔 같은 자리 두고 다퉈야 하는데, 차휘 씨는 구승효 씨가 자라는 걸 그냥 두고만 볼 거예요?]
[그런 의미로 우리, 한잔할까요?]
한 잔…….
“한 잔?”
“정말 한 잔이 맞습니까?”
“으악!”
제게 소주잔을 내밀던 백 기자의 모습이 아른거려 중얼거리던 이준은 화들짝 놀랐다.
눈을 뜨고 나서도 이 공간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해 보지 않았기에 더욱더.
“스, 승효 씨?”
침대 위에는 저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혹시나 싶어 이름을 부르자 침대 바닥 쪽에서 소리가 났다.
“헉. 승효 씨, 왜 그러고 있어?”
놀란 이준이 침대 끝부분으로 향해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바닥에 일자로 누워 있는 승효가 보였다.
승효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입고 있던 흰색 티셔츠는 말려 올라간 상태로, 탄탄한 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단정하던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상태다.
곳곳에 새겨진 저 붉은 흔적은 대체 무엇인지.
“승효…… 씨?”
자신의 물음에도 대답 없이 저를 바라보는 승효를 이준이 한 번 더 부르자 승효는 긴 숨을 내쉬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기억?
“안…… 나는데?”
이준이 눈을 깜빡거렸다. 승효는 헛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이더니 제 몸을 포박하고 있는 영롱한 빛 사슬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됐습니다. 일단 이것부터 풀어 주시죠.”
“어…… 어어? 내가 한 거야?”
승효가 빙긋 웃었다.
“그럼 제가 직접 했을까요?”
이준은 되묻는 승효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고 생각했다.
“으, 으응…….”
당혹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간밤의 일이 기억나지를 않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준은 언령을 사용하여 승효를 풀어 주었다.
“후우.”
신음을 흘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 승효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계속 저러고 있었던 건가?’
이준은 비틀거리는 승효를 부축하려다 말고선 입을 열었다.
“저기, 승효 씨.”
“네.”
“설마 밤새도록…… 거기 있었어?”
온몸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던 승효의 갈색 눈동자가 이준에게 꽂혔다.
승효는 싱긋 웃었다.
“네.”
추, 춥지 않았을까.
이준은 올라가 있던 티셔츠를 내리던 승효를 바라봤다. 그의 티셔츠는 말이 티셔츠지 거의 찢어진 헝겊 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제게 지어 주던 미소에는 은근한 날이 서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이준이 입을 열었다.
“승효 씨.”
승효의 시선이 이준을 향했다. 이준은 물었다.
“설마…… 화났어?”
승효가 대답했다.
“그럼, 안 나게 생겼습니까?”
날 선 승효의 반응에 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배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왜 그런 자리에 혼자 나가신 거죠?”
“아, 그건…….”
이준은 설명하려 했다.
그날, 강남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고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는 분이 그 위험한 사람이랑 술은 왜 마신 겁니까? 생각이 있으신 거예요?”
하지만 이준이 답변하기도 전에 승효의 말이 더 빠르게 나왔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미안.” 하고 잘못을 인정하려던 이준은, 자신의 해명은 듣지도 않고 계속해서 그를 몰아붙이는 승효의 행동에 슬슬 짜증이 났다.
“잠깐. 그냥 듣고 있으려 했더니, 은근히 말이 심하네.”
“심하다고요?”
승효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군 그렇게 될 줄 알았나?’
그 빌어먹을 자식이 술뿐 아니라 물에도 뭔가 탔을지 어떻게 알았겠냐고.
‘너까지 엮이게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서 내 선에서 처리하려 했던 건데.’
이준은 코웃음 치는 승효를 보고 말했다.
“그래. 확실히 내가 무방비했던 것도 사실이고, 바보같이 군 것도 맞지만, 꾸중의 정도가 심하잖아.”
난 구승효의 조력자지 학생이 아니라고.
승효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준은 말했다.
“대체 승효 씨가 뭔데 내가 하는 일에 일일이 간섭하는 거지?”
승효가 멈칫했다.
“제가…… 뭐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