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백호(白狐) (9)
‘구승효?’
이준은 제 귀를 의심했다.
설마 잘못 들었나 싶어 백 기자에게 미간을 좁혔으나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은 상태다.
주저하던 이준이 물었다.
“구승효 씨의 정보를 왜 제게 찾으십니까?”
“너무 빼신다. 다 알고 왔는데.”
알아?
‘뭘?’
이준이 경계하듯 그를 바라보자 백 기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세간에 다 알려졌잖아요. 차휘 씨가 구승효 씨와 각별한 사이라는 거. 두 사람, 어릴 적부터 인연이 있었다면서요?”
그러고 보니 구승효가 클레몽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하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차휘’의 존재였다.
[실은 승효 씨와 저는 집안끼리 아는 사입니다.]
어쩔 수 없이 강제 ‘동거’ 생활을 해야 했던 이준은 이 일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소속사 직원들은 물론 언론에게 승효와의 인연에 대해 거짓을 퍼트렸는데, 그것이 백수호 기자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이준이 멈칫하자 수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말이죠. 이 세계에 뛰어든 지 고작 몇 년밖에 되진 않았지만, 그간 타고난 추적 능력 덕분에 웬만한 톱급 연예인들의 뒤를 캐는 덴 성공했었거든요?”
“…….”
“그런데 몇 번을 시도해도 도저히 과거를 팔 수 없었던 사람이 한 명이 있어요.”
이준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게 바로 구승효라 이거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모델계를 뒤흔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연기자로 성공하기까지 한 신인 배우라니. 그런 배우의 사생활을 팔 수 없다니! 이거 완전 신기하지 않냐고요!”
두 눈을 반짝이는 백 기자의 말이 광적인 집착으로 들리는 건 착각일까.
이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질색하는 것이 분명한 이준을 보던 백수호가 말했다.
“평소 어울리는 사람도 없고, 사생활도 알려지지 않아 신비롭기 그지없는데, 그런 사람이 저랑 톱 자리를 다투고 있는 차휘 씨랑 친하다니. 재미있잖아. 안 그래요?”
“……그래서 내 결백을 증명하려면 구승효의 정보를 넘기라 이겁니까?”
이준이 불쾌하다는 듯 묻자 백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휘 씨도 알 거 다 알면서 괜히 빼지 마요. 두 사람 친하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이 업계에는 강한 사람만 살아남아요. 결국엔 같은 자리 두고 다퉈야 하는데, 차휘 씨는 구승효 씨가 자라는 걸 그냥 두고만 볼 거예요?”
이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백수호가 검지와 중지를 위로 들어 올리더니 가위 모양으로 싹둑, 자르는 척 행동했다.
“차휘 씨가 협조했다는 건 비밀로 할게요.”
“…….”
“이거 볼래요?”
입을 열지 않는 이준을 보며 풋 웃던 백수호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준의 눈에 당시 강남 스튜디오 건물에서 찍힌 저와 조명우의 또 다른 사진 몇 장이 보였다.
놀라 그를 바라보는 이준에게 백수호는 말을 덧붙였다.
“협조만 해 준다면, 이 사진의 원본을 넘겨 드릴 수 있다고요.”
그 말을 한 백수호가 테이블 위로 은색의 USB 하나를 내밀자 이준은 피식 웃어 버렸다.
“구승효한테 꽤 진심이시군요.”
“훌륭한 먹잇감이니까요.”
백수호의 대답에 그의 얼굴과 USB를 번갈아 바라보던 이준이 후 숨을 뱉어 내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요. 기자님 말씀대로 하죠.”
* * *
“그런 의미로 우리, 한잔할까요? 자자, 짠!”
타협할 줄 모르며 자신이 세운 선을 넘긴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톱스타, 차휘.
수호는 차휘를 유인하면서 어쩌면 자신의 제안이 단칼에 거절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차휘는 제 이익을 위해 수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거래는 성사됐다.
‘한마디로, 별거 아니네.’
입꼬리가 이죽거려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뭐 해요, 차휘 씨? 한잔하자니까?”
이 기쁨을 상대에게 표출하기 위해 미리 따라 둔 술을 건네자 차휘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차휘 씨?”
“죄송하지만 전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아니, 못 마십니다.”
차휘가 정중히 거절하자 수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 정말로?”
“네.”
“에이, 한 잔밖에 안 되는데?”
“…….”
“그러지 말고, 사진값이라 생각해요. 더불어 우리의 협력이 잘되길 기원하는 의미라고도 말이죠.”
“…….”
“자자, 받아요, 받아. 한 잔이면 된다니까?”
수호는 머뭇거리는 차휘의 손에 결국 술잔을 건네줬고, 망설이던 차휘가 짧게 숨을 흘리며 그것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호로록.
차휘의 붉고 탐스러운 입술 사이로 들어가는 맑은 술을 지켜보며 백수호는 속으로 쿡쿡거렸다.
‘이거 재미있겠어. 구승효도 잡고, 차휘도 잡으면 내 입장으로선 일석이조지.’
일단 차휘에게 덫을 놓는 데는 성공했으니 남은 것은 차휘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구승효를 잡는 거다.
차휘에게 준 USB의 효력은 이미 떨어졌으니 보험을 미리 들어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으음…….”
그로부터 30분 뒤.
백수호는 테이블 위에 머리를 대고 있는 차휘를 응시했다.
‘감히 누굴 속이려 들어?’
지금까지의 차휘는 어떻게 해서든 그가 건네는 술을 거절하려 들었는데, 고작 한 잔에 K.O.가 될 만큼 약하지는 않아 보였다.
혹시나 할 상황을 대비하여 차휘의 물잔에도 미리 손을 썼던 백수호의 기지가 빛을 발한 것이다.
백수호의 권유를 거절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물을 들이마시던 차휘의 모습이 생각나 그는 피식 웃었다.
“차휘 씨, 당신 너무 쉬운 거 아닙니까?”
“예…….”
“쉬워도 너무 쉽네. 깐깐하고 냉정하다는 소문은 순 거짓말이었어. 안 그래요?”
“헤, 헤헤.”
“이게 본모습이라서 자기를 그렇게 감추고 있었던 건가?”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수호가 손을 쓴 술이나 물을 마시면 웬만한 인간들은 본심을 드러내게 된다.
물론 보통, 술이 들어가면 진담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그의 것은 조금 더 특별했다.
“흐흐.”
틀에 박힌 것처럼 고결한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의 얼굴이 완벽하게 늘어져 있었다.
수호는 발그레 물든 뺨을 하고 저를 바라보고 있는 차휘에게 다가갔다.
“차휘 씨, 취했어요?”
“네? 제, 제가요? 흐흐, 아뇨. 안 취했어요……. 저, 이 정도로 안 취해요.”
차휘가 휘휘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취했구만.’
수호는 씩 웃었다.
“술을 확실히 못하긴 하나 봐요?”
“에엑? 무슨! 저 술 완전 잘해요! 더 마실 수 있는걸요? 한 잔 더 주실래요?”
말은 똑 부러지게 잘하지만, 차휘가 비어 버린 술잔을 들고 내미는 방향은 애석하게도 수호가 앉은 정면이 아닌 가로막힌 벽 방향이다.
수호는 큭큭 웃더니 취한 차휘의 모습을 찰칵 찍었다.
“차휘 씨, 사진 한 장 찍어도 되죠?”
“사……진은, 안 되는데…….”
안 되기는.
“하하, 이미 찍었는걸?”
“아…….”
“괜찮아요, 괜찮아. 나만 볼 건데 뭐.”
수호의 손아귀에 들어온 차휘가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곧 배시시 웃었다.
‘정말 쉽군.’
그렇게 고고한 척 굴 때는 언제고 술 한잔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아하니, 무척이나 재미있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상대의 허락까지 구했으니 거리낄 것은 없었다.
수호는 얼른 자신의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타이틀은 뭐라고 해야 하나?’
소위 톱스타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이미 기사를 냈고.
‘좌절한 톱스타의 일상 정도면 될까?’
수호가 고민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손님! 안 됩니다! 여긴 VIP 고객님이 계신…… 손님!”
‘응?’
쾅―.
등 뒤에서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놀라 뒤를 돌아본 수호의 눈에 검은 마스크에 검은 모자, 그리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검은 슈트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뭡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 블랙인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위압감이 있어서 태블릿을 들고 있던 수호가 인상을 썼다.
“죄, 죄송합니다, 손님. 이분이 갑자기 누굴 만나야 하신다고 하셔서…….”
“이분이 누군데요?”
수호가 불쾌하다는 듯 레스토랑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에게 인상을 쓰며 묻자, 올 블랙 남자를 힐끔거리던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했다.
백수호는 얼굴을 구겼다.
“우리 약속 방해 말고 당장 나……!”
“나가시죠?”라는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올 블랙 차림의 남자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자신을 내려다봤기 때문이다.
‘이 사람!’
백수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찍었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올 블랙 차림의 남자가 백수호의 태블릿과 테이블에 놓인 카메라를 응시하며 물었다.
“예, 예?”
당황한 수호가 그런 남자를 올려다보자 남자가 팔을 뻗었다.
“헉, 뭐, 뭐 하는 겁니까!”
“닥쳐요. 한 대 날리고 싶은 거 겨우 참고 있으니까.”
수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는 웬만한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편이고, 회사에서도 주로 홀로 활동하는 편이라 타인의 협박에도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왜 이 자식의 말에는 꼼짝도 할 수 없지?’
백수호의 태블릿과 카메라는 이미 남자의 손에 들어갔다.
남자는 유려한 손길로 카메라 속의 메모리 카드를 꺼내더니 수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싶다면 정당한 방법으로 하십시오, 백 기자님.”
“…….”
“이 사람은 제가 데려갑니다.”
말을 마친 남자가 당황하는 매니저와 수호를 지나쳐 헤헤,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차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죠, 선배님.”
“……SB…….”
“네?”
“USB, 받아야 해! 그거 받으려고 여기까지 왔…… 어? 너…… 너?”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이준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USB를 가리키다, 번쩍 고개를 들어 남자를 응시했다.
“구승효!” 하고, 이준이 활짝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후 길게 한숨을 내쉰 구승효가 백수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 놓여 있는 USB를 덥석 움켜쥐었다.
“뭐 하는 겁니까!”
“주기로 했다면서요. 그러니 받아 갑니다.”
“이봐요!”
“백 기자님.”
수호는 탁, 테이블을 내리누르며 저를 노려보는 구승효의 행동에 순간적으로 행동을 멈추었다.
놀란 수호에게 구승효는 말했다.
“이 USB 안에 뭐가 담겨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제라도 양심 고백을 하시죠. 그걸 못 하겠다면…….”
구승효가 USB를 주머니 속에 넣으며 말했다.
“날 말리지 말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