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38화 (39/72)

38화

백호(白狐) (3)

결코 돌려 말하지 않는 승효를 보던 세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구승효 씨였죠?”

세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승효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구승효 씨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 촉망받는 분이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까 휘 형이랑 같이 들어오는 걸 보고 조금 놀랐어요.”

세현의 말에 승효를 비롯해 이준 또한 움찔했다. 세현은 이준을 흘끔댔다.

“휘 형은 본디 누굴 곁에 두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곳에 올 때도 다른 사람과 동행하지는 않거든요.”

“…….”

“신기하네. 두 사람,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예요?”

세현이 짓궂게 묻자 승효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뒤로 손을 휘휘 저으며 승효를 제지한 이준이 다시 세현을 바라봤다.

이준은 설명했다.

“소문 들었다면 알고 있겠지. 승효 씨, 얼마 전 우리 소속사 신입으로 들어왔어.”

“아…….”

“네가 쓰러진 날, 나와 함께 널 발견했던 것도 승효 씨야. 아무래도 네 병문안이니 승효 씨도 궁금해할 것 같아서 함께 데리고 온 거고. 게다가 너도 나 말고 널 도와준 사람한테 고마워했잖아. 안 그래?”

“…….”

“그러니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어.”

세현은 이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삐딱한 태도로 승효를 바라보던 제 눈을 가라앉혔다.

“죄송합니다. 나쁜 뜻은 없었어요.”

그 말에 구승효가 괜찮다는 듯 미소 지었다.

이준은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가 살짝 누그러지자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승효 씨랑 같은 말을 하고 싶었어.”

“같은 말?”

“응. 세현아. 솔직히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 너 근래 혹시 이상한 사람을 만난 적은 없어?”

“…….”

“아니면 이상한 일이라든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겪었다든가 하는. 막, 네 몸이 이상한 걸 느끼던 그 시점 말이야. 그때 혹시 무슨 일이…….”

“푸흡.”

두 눈을 부라리며 묻는 이준을 보고 세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형.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어?”

“TV에서 볼 때는 접근 불가 분위기를 풍기더니, 예전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아직도 밤만 되면 온몸이 으슬거리고 그래? 여전히 비가 오면 창밖에 뭐가 서 있는 것 같고?”

세현이 쿡쿡대며 묻자 이준은 하하, 어색하게 뺨을 긁었다.

‘따갑네.’

승효가 저를 빤히 응시하는 게 느껴져 이준은 모르는 척했다.

한참이나 웃던 세현은 곧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4집 준비에 들어갔던 건 작년 겨울쯤이었어.”

그의 입이 열리자 이준과 승효의 눈이 세현에게 꽂혔다.

“1집이나 2집 성적도 그럭저럭이고, 싱글을 내도, 3집을 내도 영 반응이 없어서 이번엔 정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싱어송라이터로 활약 중인 세현의 말에 속이 쓰렸다.

어떻게든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그의 의지가 느껴져 더욱이.

“이번 앨범은 전부 내가 만든 곡으로 내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일이 잘 안 풀리더라고. 그래서 한동안 사찰에 들어가서 지내자고 생각했었는데.”

“사찰?”

“응. 강화도에 있는 사찰인데 그곳에서 누굴…… 윽!”

세현이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세현아?”

이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세현의 모습에 적지 않게 놀랐다.

승효도 마찬가지.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이던 세현이 다시 고개를 들어 이준과 승효를 바라보려 했다.

“그 사찰에서 누굴, 아악!”

“이세현!”

“형! 으으윽!”

이준은 기억을 더듬으려던 세현이 돌연 소리를 내지르자 크게 당황했다.

놀라 승효를 흘긋대자 승효는 차가운 눈으로 세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호사라도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 말하려던 순간, 승효가 품에서 괴황지를 꺼내 들었다.

“지금 뭐 하는…….”

“<침(寢)>.”

승효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붉은 연기에 휘감긴 세현의 핏발 선 눈이 아래로 스르륵 감겼다.

승효는 잠이 든 세현을 내려다보더니 이준에게 말했다.

“이세현 씨로부터는 더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습니다.”

* * *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군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발코니의 창문을 열어젖혀 고개를 내밀고 있던 이준이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승효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사건이 터졌다는 게 수상합니다.”

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준은 금세 알아차렸다.

‘손각시와 삼충의 일을 말하는 거군.’

많은 일이 발생하는 연예계에서는 추락과 급등이 반복한다.

수없이 화려한 별들이 존재감을 뿜어내기도 하며,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곳.

약육강식의 세계이기도 한 이 업계는 저마다의 욕망이 존재하기에 당연히 비생들의 출현이 잦다.

‘하지만 상급 비생한테 노출된 적은 전무했어.’

이준은 십 년이 넘게 연예계 활동을 해 오면서 많은 비생을 상대했지만, 일전의 손각시와 삼충처럼 대놓고 인간을 노리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이준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비생의 출현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근래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은 확실히 의심스럽다.

“승효 씨 말은, 연예계의 누군가가 일부러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는 거네.”

승효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선배님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보통 상급의 출현은 이리 잦지 않습니다.”

“…….”

“인간을 위협하는 비생들은 주로 중하급이고, 상급은 인간 사회에 섞여 활동하고자 노력하니까요. 그들 역시 인간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존재들이잖습니까.”

이준은 승효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약간의 불안함을 느꼈다.

‘그래. 확실히 이전의 경우에는 양랑만으론 충분했어.’

차이준의 종속 비생인 양랑은 비생 중에서도 ‘특급’에 속하는 존재였고, 다른 비생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과거의 한 사건으로 이준이 그에게 주는 영기가 줄어드는 바람에 현재는 양랑 본연의 힘을 구사하지는 못했으나, 중, 하급 비생 정도는 양랑과 이준의 언령술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로 인해 중하급 비생들이 그의 눈앞에 나타난다 할지라도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시점을 계기로 상급 비생이 이준의 앞에 나타났다.

[이번 일은 제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나 혼자 그 녀석들을 대하는 게 버거운 것도 사실이야.’

TOKD 시상식이 열리던 그날 느꼈던 무력감이 돌연 찾아오자 이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굳이 묻지 않은 승효가 입을 열었다.

“조치가 필요할 듯해요.”

“무슨 조치?”

의아해하는 이준을 보고 승효는 말했다.

“언제까지나 산군에게 의존하는 건 선배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

“선배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언령술 외의 다른 술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술법이라.”

[싫어, 싫어요!]

[싫기는! 견뎌야 한다, 준아!]

[할부지, 나 이거 안 할래! 싫어, 이거!]

[어허! 과거 네 사부나 사형들도 모두 그런 일을 겪어 왔어! 견뎌 내야 해!]

[사형은 무슨 사형! 요즘 시대에 누가 사형이라 불러! 안 해!]

[준아! 차이준!]

아아.

‘끔찍했지.’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16년 전보다 훨씬 더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자 이준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당시의 차이준은 견자 사회에 막 이름을 알리던 유망주였고, 고현 차가의 종손이라 불리며 많은 이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현 가주였던 태모로부터 혹독한 견자 훈련을 받았는데, 주로 보통의 꼬마 아이가 겪기에는 무식하다 싶을 수련법을 강요당하곤 했다.

동이 트기 전부터 어린아이를 깨워 새벽 산 타기를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신 수양을 핑계 대며 차가운 여름 폭포 아래에서 머리를 맞기, 비생이라면 치를 떠는 이준을 폐가 한가운데 두고 비생을 처리하라며 떠나 버리기 등등.

‘그건 학대였다고. 완전 무식 그 자체였단 말이지.’

물론, 그러한 혹독한 훈련 덕분에 이준은 언령술 하나만큼은 정식 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이리 외주를 받는 거고.

‘최악의 사부였어. 그 노인네.’

이준은 악독한 마귀처럼 보이던 태모의 모습을 상기하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그때였다.

승효가 어느새 입을 닫은 이준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이준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승효 씨가 생각하는 그 ‘술법’이 뭔데?”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면 구승효가 자신보다 더 나은 견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더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감은 사양이야.’

이준은 지켜만 보고 있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결심한 듯 자신을 응시하자 빙긋 웃던 승효는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과거처럼 무식한 훈련을 하자는 건 아니니까요. 선배님께는 부적술을 가르쳐 드릴 겁니다.”

“부적술?”

이준이 깜짝 놀라자 승효는 설명했다.

“선배님은 주로 ‘언령’을 사용하시는 편이니 그에 맞는 술법을 배워야 합니다. 본디 언령술이 더 높은 계열의 술법이지만, 부적술은 언령술보다 적용 범위가 넓으니 배워 둔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고요.”

“…….”

“어떠십니까. 배우고픈 마음이 드세요?”

이준이 다정한 선생님처럼 묻는 승효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승효는 깁스를 한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제 팔이 나으면 본격적으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어쩌면 특훈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때 시간이 안 된다고 사양하시면 안 됩니다.”

“어, 어어. 다, 당연히 그래야지.”

“참.”

“응?”

“샤워를 하려 하는데,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어?”

“아무래도 한 팔로는 머리를 감기가 힘들어서, 머리 감는 것만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이준은 “어어!” 하고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승효에게 다가갔다.

“잡아.”

그를 부축하기 위해 왼팔로는 승효의 허리를 감고, 욕실을 향해 걸어가며 말하자 승효가 “네.” 하고 대답했다.

우웅―.

맞닿은 살과 살이 부딪히며 승효의 체온이 제게 전해지자 이준의 오른쪽 귀에 걸려 있던 검은 귀걸이가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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