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백호(白狐) (1)
― 무모했습니다!
차이준의 두 살 어린 여동생인 차강주는 본디 잘 웃지 않는다.
16년 전 벌어진 사건 이후 그녀는 웃음을 잃었고, 삶의 목적을 인생의 즐거움이 아닌 ‘어떤 것’을 좇는 데 바쳤다.
일찍이 견자계에 뛰어들면서 그녀는 언제나 차분함을 유지했는데, 그 때문에 격렬히 화를 내는 경우 역시 드물었다.
하지만 가끔, 정말 가끔 그녀가 분노할 때가 있었는데 그건 보통 나쁜 일이 벌어졌을 때였다.
이준은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저를 응시하고 있는 태블릿 속의 강주를 향해 흐린 미소를 흘렸다.
― 뭘 잘하셨다고 웃으십니까?
강주가 헤실거리는 이준을 향해 핀잔을 주자 이준은 움찔했다.
그녀의 눈이 예리해졌다.
― 나이를 드시면 그 점이 고쳐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군요.
“하, 하하.”
―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오라버니는 더욱 무모하십니다. 만일 오라버니께 큰일이라도 났다면 대체 어떡하시려 했습니까?
영상 통화 화면 속 강주의 눈빛이 액정을 뚫고 나올 정도로 매서워서 이준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래도 내가 오빤데…….’
마치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혼을 나는 기분이라 생각하며 입을 우물쭈물거리기만 하던 이준을 강주는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하다, 후 한숨을 내쉬었다.
“미, 미안해.”
이럴 때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기는 것이 우선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강주에게 맞받아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손을 싹싹 빌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이준을 주시하던 강주는 곧 대답했다.
― 다시는 그런 짓 따위는 하지 마세요. 길을 어긋난 비생은 퇴치해야 하지만, 오라버니의 목숨보다 중하지는 않습니다.
“으, 으응. 아, 안 그래! 맹세해! 절대로 무모한 짓은 안 할게!”
― …….
“진짜라니까? 너 이 오빠 못 믿니?”
이준이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외치자 강주는 뭐라 말을 하려다 흥 콧방귀만 뀌었다.
“참, 강주야. 그런데 세현이 일은…….”
사흘 전, 마포구 상운동의 케이블 방송사 M국에서는 대한민국 드라마 어워드인 TOKD 시상식이 펼쳐졌다.
M사와 R언론사가 주최하고 많은 VIP와 관객들을 초청하여 케이블 채널을 통해 생중계했던 바로 그 시상식이다.
그곳에서 초대 가수로 2부 무대에 오르려 했었던 싱어송라이터 이세현이 갑작스러운 일로 무대를 취소했다.
그 사건을 두고 연일 많은 말이 오갔다. 그런데 정확히 어제, 세현의 소속사에서 무리한 스케줄 일정으로 인해 급히 무대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공식 발표를 했다.
물론, 실제로 세현이 겪은 일은 공식 발표와는 달랐지만.
염려를 가득 담은 이준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자, 강주가 답했다.
― 오라버니께서 원하시는 대로 M사 옥상의 일들은 모두 사고로 처리했습니다.
“그래?”
― 예. 언론에서 이세현 씨의 일을 파고들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협회에서 이세현 씨의 몸 상태도 은밀히 체크할 예정이니 변화가 있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준은 자신을 안심시키는 강주를 보고 흐리게 웃었다.
“고맙다.”
― 저희가 해야 할 일인걸요.
“…….”
― 그것보다 오라버니. 구가의 가주님은 좀…… 어떠신가요?
조심스럽게 입을 떼는 강주를 보며 이준은 순간 잊고 지낸 누군가를 떠올렸다.
[선배님이라면 하실 수 있어요.]
TOKD 시상식이 열리던 바로 그날 밤.
이세현의 몸을 장악하고 있던 삼충을 받아들인 이준은, 홀연히 나타난 구승효의 도움으로 정화 의식을 시도했다.
영기 속에 정화의 힘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감히 상상해 보지도 않았기에 도전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계속된 승효의 설득으로 영기 정화를 시도한 이준은 혼탁해진 자신의 영기와 승효로부터 받아들인 영기를 한데 섞는 데 성공했다.
[헉. 승효 씨! 봤어? 나 성공했…… 승효 씨?]
제 의식을 장악하려던 삼충을 몰아내고 환희에 차 그의 이름을 부르던 이준은, 승효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음을 발견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승효의 두 팔뚝을 붙잡고 있던 이준의 손바닥에서 붉은 핏물이 뚝, 뚝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팔을 붙잡고 계십시오.]
영기 정화 의식은 본디 많은 영력을 소비하고, 정화 의식을 시도하는 본인은 은연중에 강한 힘과 통증을 느낀다.
당시 이준은 느끼지 못했지만 정화 의식을 시행하던 도중 그는 강렬한 통증을 느꼈고, 그 통증을 참기 위해 승효의 두 팔을 으스러지듯 붙잡아 버렸다.
그로 인해, 승효는 양팔 모두 상흔을 입었다. 특히 오른팔에는 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다.
‘내 힘이 그리 셌었나?’
이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정화 의식을 치르는 동안 겪은 고통이 상당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 이준은 그 고통보다 삼충을 몸에서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었다. 자신이 그리도 강한 힘으로 승효를 움켜쥐고 있을 줄은 몰랐다.
― 오라버니?
M사 옥상에서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떨던 이준이 곧 정신을 차렸다.
이준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신경 쓰지 마.”
* * *
― 난 마음에 안 든다.
대뜸 걸려 온 전화에 왼손으로 전화를 받고 있던 승효가 미간을 좁혔다.
― 이적은 그렇다 쳐도, 시상식에 온갖 핑계 대며 참석 안 하려던 녀석이 돌연 참석하겠다 그러더니, 또 뭐? 그곳에서 계단을 굴러 다쳤어?
“…….”
― EM 의류 화보 촬영이 한 달 앞인데 갑자기 그런 부상을 당하면 어떡해? 네가 프로 의식이 없는 거냐, 아니면 너랑 동행한…….
“형.”
수월의 입 밖으로 흘러나올 말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예견했던 승효가 제 말을 가로막자, 수월이 툴툴댔다.
― 하여간 고귀하신 그분은 건드리지도 못해. 안 보는 데서 험담 좀 하면 어떻다고.
승효는 대꾸하지 않았다.
― 알았어. 탓 안 하면 되잖아. 쳇. 누가 보면 너랑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인 줄 알겠다.
“…….”
― 솔직히 말해. 너희 진짜 무슨 사이냐? 정말로 집안끼리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야?
수월이 의심스러운 말투로 묻자 승효는 단답식으로 “예.” 하고 답했다.
그런 승효의 반응으로부터 더는 답을 얻어 낼 수 없을 거라 인지한 수월 역시 다음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 어쨌든 정말 내가 안 가 봐도 돼? 내가 불편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보낼게.
“괜찮습니다. 선배님께서 잘 돌봐 주시고 계세요.”
― 선배? 차휘가?
“…….”
― 의외네. 저만 아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뭐…… 하긴. 차휘가 넘어지려는 걸 막으려다 네가 계단을 굴렀다고 했으니, 양심이 있으면 네 수발은 직접 들어야지.
비소를 흘리던 수월이 중얼거렸다.
[제가 하겠습니다. 어차피 승효 씨랑 저, 같은 지붕 아래 사니 승효 씨 돌보는 건 제가 하는 게 나아요.]
이준은 승효가 오른팔에 금이 가 깁스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진하며 나섰다.
그 말을 뱉어 낼 당시 이준이 어찌나 결연한 표정인지, 하마터면 웃음이 흘러나올 뻔했다.
똑똑.
“승효 씨, 안에 있어?”
자신이 수월과 통화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이준을 떠올리던 승효는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입을 열었다.
“형. 그럼 다시 연락할게요.”
― ……뭐? 잠깐만! 나 아직 할 말이 있어! 차기작에 관한…….
승효는 깜짝 놀라 외치는 수월의 전화를 뚝 끊어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가 달칵 문을 열자, 한 번 더 제 이름을 부르며 노크를 할 생각이었는지 팔을 앞으로 뻗고 있는 이준이 보였다.
“아, 하하. 자, 잘 잤어?”
이준이 고개를 들어 승효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승효는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네. 선배님은 잘 주무셨습니까?”
“어? 어어, 난, 뭐, 항상, 잘 자고 잘 일어나지.”
이준은 횡설수설했다.
승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일이시죠?”
코앞의 거리에서 승효를 올려다보던 이준이 그의 질문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준이 씩 웃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승효 씨, 막 일어났지?”
막 일어난 건 아니지만, 일어나자마자 수월과 전화를 했으니 거의 마찬가지다.
“예? 아, 네.”
“그럼 아직 안 씻었을 거 아니야. 그렇지?”
“예, 뭐…….”
“그럼 잠깐 나와. 이 선배가, 친히 승효 씨가 씻는 걸 도와줄게!”
[사람은,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해야 하는 법입니다.]
강주는 이준과의 통화를 끝내기 전 말했다.
어찌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는지 이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강주 역시 그러한 이준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구승효한테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니까.’
《그건 맞는 소리다. 구가의 녀석이 아니었다면, 지금 본군은 삼충한테 몸을 빼앗긴 주인을 먹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양랑. 너는 꼭 그렇게 섬뜩한 말을 해야겠어?’
《본군은 언제나 사실만을 말한다.》
양랑은 말을 뱉어 낸 후 흥 코웃음을 쳤고, 이준은 그런 양랑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을 힐끔대며 입을 삐죽였다.
그러다 세숫대야와 그 안에 걸어 둔 하얀 수건을 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승효가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좋아.’
보답을 할 차례군.
이준은 의지를 다지며 승효에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