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18화 (19/72)

18화

삼충(三蟲) (1)

슥슥.

“부족해.”

어둑한 밤.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키보드 앞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슥슥. 쫘아악!

스스슥. 쫘아악!

그는 끊임없이 종이에 무언가를 썼다가 다시 찢어 버리기를 반복했다.

헉, 헉, 헉.

숨이 차오른다.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스슥. 스스슥.

그는 다시금 펜을 들어 종이 위로 무언가를 휘갈겼다.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모두 털어 낼 때까지, 끊임없이.

펜을 든 그의 손가락 끝에서는 붉은 핏방울이 가득 맺혀 뚝, 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네 말대로 했어. 조만간 기사 날 거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온 말에 승효는 말없이 얼굴을 주억였다.

―승효야.

“네.”

―이게 정말 네가 원한 일이냐?

그 말에 승효는 입을 다물었다.

원한 일이냐고?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단 한 순간도.

‘원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

승효는 여전히 의심하는 자신의 매니저 고수월에게 대답했다.

“기사 기대할게요. 고생하셨습니다.”

수월은 통화 종료를 의미하는 승효의 발언에 당황하는 숨소리를 흘리더니 곧 “그래, 내일 다시 연락할게.”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승효 씨 인상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인데…… 이건 내 잘못이네. 사과할게. 미안해.]

수월과의 통화가 종료된 이후 한동안 거실의 소파에 고요히 앉아 있던 승효의 귓가로 이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차휘는, 차이준은 정말로 솔직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며 깨끗하게 수긍한다.

맑고 순진하다.

‘그래서 더욱 어울리지 않지.’

이 세계와는.

승효는 눈을 내리깔았다.

딩동―.

현재 시각 오후 10시 12분.

조만간 발표될 뉴스는 아마도 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 필수적이었지만,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

이 시각에는 허락된 이들만 들어올 수 있는 로비를 통과한 것으로 보아 보통 인물은 아닐 터인데.

인터폰을 향해 다가간 승효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홱 몸을 돌려 얼른 현관으로 달려갔다.

달칵.

“아. 미안,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왔지? 들어가도 돼?”

검은 눈동자의 남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멈칫하기는 했으나 승효는 슬쩍 비켜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고마워.”

그가 말하며 승효의 눈앞을 지나쳤다. 달콤한 향기가 나서 승효는 콧등을 잠깐 찡긋거렸다.

성큼성큼.

그의 눈앞에서 마치 이 집이 제집인 것처럼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차이준이었다.

세간에는 차휘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의 혼약 상대.

단정한 이준의 머리카락이 그의 발걸음에 살짝씩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이준의 짙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오른쪽 귀의 검은색 귀걸이까지.

‘…….’

그냥 검은색이라기보다는, 보고 있으면 오묘한 기분이 드는 그 흑색 귀걸이를 지켜보다 무심코 손을 뻗으려던 승효는 멈칫했다.

돌연 이준이 걸음을 멈추고선 홱 뒤를 돌아봤기 때문이다.

“으흠!”

이준은 조금 전 승효가 앉아 있던 소파의 그 자리에 털썩 앉으며 우뚝 서 있는 승효를 올려다보았다.

“전화로 말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이런 말은 직접 보고 해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어.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었으면 하는데…….”

“방해, 안 하셨습니다.”

이준이 픽 웃었다.

“그럼 다행이네. 거기 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 봐.”

이준의 명령 아닌 명령에 승효는 근처의 자리에 착석했다.

이준은 흐으음, 하고 길게 숨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뭐라고 시작해야 하나. 이런 말일수록 간단한 게 좋겠지?”

쿵쿵, 심장이 뛰었다. 이준의 붉은 입술 사이로 무슨 말이 흘러나올지 괜히 긴장하게 됐다.

승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꽤나 여유로운 표정을 짓던 이준이 생각을 정리한 듯 얼굴을 들어 승효를 응시했다.

“좋아.”

대뜸 던진 그의 말에 승효가 놀라자 이준은 오른쪽 귀에 걸린 귀걸이를 만지작대며 입술을 움직였다.

“협력할게. 그 혼인, 한다고.”

“……!”

“정확히는 ‘혼인 의식’이라지만, 뭐 그게 그거지. 어쨌든 승효 씨랑 나랑 인연을 맺게 되는 건 사실이니까.”

“……마음 정하신 겁니까?”

승효의 질문에 이준은 잠시 멈칫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잖아?”

미소를 짓던 이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난 영기가 필요해. 그것도, 아주 강력한 영기가.”

이준의 검은 눈이 빛나자 승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준은 입을 열었다.

“승효 씨가 알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원래는 영기가 넘쳐흘렀어. 견자 세계에서는 손꼽힌다고 하더군. 그런데 16년 전에……”

“사고를 당하셨죠.”

저 대신 말을 끝맺은 승효를 놀란 눈으로 응시하던 이준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사고 덕분에 지금 내가 가진 영기는 과거 내가 지녔던 것의 반밖에 안 돼. 이 정도의 영기로는…… 휘준이를 지킬 순 없겠지.”

휘준.

천하의 차이준이 구승효의 앞에서 동생의 이름을 언급한 건 처음이다.

놀라운 변화라고 속으로 생각하던 이승효는 후우 길게 숨을 내쉬는 이준을 응시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준이 승효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일 년은 어때?”

“일 년이요?”

승효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그는 말했다.

“영감님은 삼 년을 제안하셨지만, 내 생각엔 일 년이면 충분할 것 같아.”

“…….”

“삼 년이나 이 관계를 지속한다면 나도, 승효 씨도 이 계약에 묶여서 힘들 것 같고.”

“알겠습니다.”

이준은 승효의 대답에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승효는 말했다.

“저 역시 선배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너무 긴 건 서로에게 좋지 않죠. 일 년이면 될 듯합니다.”

“아 그, 그래? 어, 그,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준이 활짝 웃었다.

“그럼 승효 씨도 오케이 했으니 계약 기간은 협의됐고, 이제 혼인 의식에 관한 건데…….”

“혼인 의식은, 제대로 치러야 합니다.”

이준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기가 무섭게 승효가 대답했다.

“어?”

이준이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승효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선배님과 저의 혼인 의식은 단순한 결혼식이 아닌, 영기와 관련된 행위입니다. 이런 의식에는 거짓이 있어서는 안 돼요.”

“아…… 그, 그래?”

살짝 당황하던 이준은 곧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승효의 태도에 어색하게 웃었다.

“뭐…… 좋아. 어차피 공식 발표도 없을 거니까, 제대로 해. 예복 입고 의례 올리면 되는 거지?”

“예.”

“알겠어. 그럼 마지막으로…… 영기를 주고받는 방식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까?”

이준이 되묻는 승효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승효의 질문에 잠시 움찔하기는 했으나 곧 대답했다.

“아니, 뭐, 문제는 없는데…… 그 방식이, 방식이 좀……. 하하. 아무래도 우린 성인이고 말이야. 매번 입을 맞추는 건…….”

“선배님.”

“어?”

“견자들끼리 영기를 주고받을 때, 입에서 입을 통한 방법이 가장 강력하다는 건 모르지 않으시잖습니까.”

이준의 안면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잠시 당황하던 이준은 얼굴을 아래위로 흔들며 웃었다.

“다, 당연히 알지. 나도 알긴 아는데…….”

“그런데 왜 그 방법을 그리 꺼리시는 거죠?”

“아냐. 내가 언제. 나는 꺼리는 게 아니라―”

“설마, 두려우십니까?”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하려던 이준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그 모습에 옅게 웃던 승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님과 저 사이에 일어나는 그 행위는 기껏해야 ‘의식’일 뿐입니다.”

승효가 이준의 귀에 걸린 검은색 귀걸이를 힐긋거렸다.

“그 ‘의식’을 치러야 선배님 귀에 걸린 그 귀걸이에 영기가 모이겠죠. 안 그렇습니까?”

이준이 “이 귀걸이에 대해 알고 있었어?”하고 저를 바라보는 게 보인다.

승효는 입꼬리를 늘였다.

“‘의식’을 통한 방법이 영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 가장 효율적이라는 걸, 선배님도 저도 너무 잘 알고 있죠.”

“…….”

“아마 다른 견자에게 물어봐도 그런 방법으로 영기를 얻는 걸 원할 겁니다.”

물론 자신의 영기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정신 나간 견자는 없겠지만.

승효는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딱딱하게 멈추어 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데 선배님께선 계속 그 행위 자체에 신경을 쓰고 계시는군요. 왜인지 궁금해진다면 제가 선을 넘는 겁니까?”

이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승효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제 눈에 비친 선배님의 얼굴은 혹 그 ‘의식’이 이어지다, 혹여나 다른 마음을 품게 될까 봐 염려하시는 것 같습니다.”

“……!”

이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무어라 변명을 하려다 마는 듯했다.

승효는 그러한 이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하세요.”

“…….”

“흔한 일이잖습니까. 그런 행위는. 드라마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요.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지 않겠습니까? 선배님은 뛰어난 연기자시잖아요.”

승효의 말을 들은 이준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쩍 벌리더니 곧 무언가 말할 것처럼 한참 뻐끔거렸다.

승효는 이준이 다음 말을 뱉어 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1초, 2초가 지나도록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 하하.”

그렇게 한참이나 서 있던 이준은 긴 침묵 끝에 겨우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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