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상극(相剋) (5)
5대 종가.
한때는 10대가 넘어갔지만, 남북으로 갈라진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5대 퇴마 종가가 존재한다.
먼저, 조선 왕실의 직속 퇴마사로 암암리에 활약하며 수도 한성과 수도권을 지키던 ‘고현 차씨’ 일가가 바로 그 중심이다.
특히 고현 차씨 일가의 현 가주인 차태모는 ‘한국 견자 협회’의 협회장까지 맡을 만큼 세력이 있으며 재력도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 전라남북도와 충청도에서 생겨나는 비생들을 처치해 온 ‘효서 오씨’ 일가가 존재한다.
효서 오씨는 일제강점기 시대 이후 사라져 버린 퇴마 종가 중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5개의 집안 중 하나로, 고현 차씨 일가 다음으로 굳건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세 번째는 ‘미송 김씨’다.
미송 김씨 일가는 일제강점기 이후 급부상한 세력으로 조선이나 고려 시대 때는 이름을 날리지 않고 있다, 근대 대한민국 사회에 넘어오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현 한국 견자 협회의 부회장인 김옥주 여사가 가주로 존재하며, 여자가 가주가 되어 대를 이어 왔다. 미송 김씨 일가는 경상도를 수호하고 있다.
네 번째 종가는 ‘안주 도씨’ 일가다.
대한민국이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강원도와 북쪽 지방 대부분을 수호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크게 세력이 약화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근래 들어서는 가문에서 시작한 관광 산업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예전의 절반 정도는 회복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현월 구씨.’
제주도를 기반으로 퇴마 활동을 이어 온 현월 구씨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고현 차씨 만큼이나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혹자는 한반도에 견자라는 이들이 출현하게 된 것은 전부 현월 구씨의 등장 이후부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월 구씨는 일제강점기 때 항일 운동과 퇴마 활동을 병행하면서 점점 그 수가 줄어들었고, 현재는 소수만이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이준은 자신의 입으로 5대 종가를 언급하는 태모를 바라봤다.
“그래. 5대 종가라 했다.”
“그 5대 종가 중 한 곳에 저와 결혼하겠다는 인물이 있는 겁니까?”
“…….”
“어디예요? 설마 효서 오씨 쪽입니까? 성혜? 아니면 성주?”
태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준은 비아냥거렸다.
“이야, 효서 오씨도 대단하네. 요즘 한창 세력 확장 중이라더니 우리랑 어떻게든 동맹을 맺으려고?”
“…….”
“영감님. 그거 아세요? 성혜는 그렇다 치고, 성주는 겨우 열여덟밖에 안 됐어요. 설마 저보고 그런 어린애랑 결혼하라는 건…….”
“앞서 나가지 마라. 효서 오씨는 아니니까.”
이준은 제 말을 툭 끊어 버리는 태모를 응시했다.
태모는 당황해서 멈춰 버린 이준에게 말을 이었다.
“네놈보고 가문의 대를 이으라는 건 결단코 아니다. 네놈이 우리 가문의 종손이기는 하지만, 내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가주 자리를 넘겨줬다간…… 분명히 우리 가문은 망해.”
태모는 확신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진 이준이 “영감님!”하고 그를 불렀지만 오히려 태모는 뻔뻔하게 이준을 바라봤다.
“왜. 사실만 말하지 않았냐. 네 녀석 성격이면 어차피 집안일은 내팽개치고 카메라 앞에만 설 거 아니야?”
이준은 대답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태모는 그러한 이준을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이지. 휘준이에게 맡기는 것. 하지만 휘준이는 아직 거쳐야 할 역경이 남았어.”
‘역경’이라는 단어에 얼굴이 굳어졌다.
그 반응을 보이는 건 태모도 마찬가지였기에, 말을 잇는 태모의 목소리가 쉬었다.
“나는 휘준이가 열여덟이 되는 해 나타날 귀영 의식을 무사히 넘기게 된다면, 기꺼이 휘준이에게 가주 자리를 넘겨줄 거다.”
“…….”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준이, 네 도움이 필요하지.”
이준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분명 이곳으로 오면서 충분히 예상했던 일인데 왜 처음 듣는 것처럼 놀라는 거냐, 나는.’
가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나와 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사랑하는 막내에게 모든 짐을 짊어지게 하고, 차기 가주 자리도 억지로 쥐여 준 것이나 마찬가지.
[형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염려 말고, 언제든 형님께서 오시고 싶을 때 본가에 들러 주십시오. 보고 싶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재앙을 몰고 왔다 하여 타인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으나, 고현 차씨 일족들에게는 부모가 주지 못한 사랑보다 훨씬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이준의 남동생, 휘준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고작 열일곱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벌써부터 성숙해서, 이준이 애어른이라 부를 정도였으니까.
‘젠장할.’
이준이 TV에 나오는 것이 좋다며, 힘든 영력 수업 와중에도 이준에게 전화나 문자를 보내며 그를 응원하기도 한 동생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심장이 쿵쿵 뛴다.
이준은 한숨을 내쉬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입니까.”
“뭐라고? 못 들었다.”
제기랄!
“몇 년이냐고요!”
이준은 심드렁하게 되묻는 태모에게 외쳤다.
“몇 년이라니?”
“알면서 모르는 척 마십쇼. 정략혼이 평생 이어지진 않을 것 아닙니까.”
“…….”
“어차피 내가 대를 잇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라면서, 그렇다면 당연히 단기로 생각하는 거잖습니까! 설마 애까지 낳으라는 건 아니죠?”
그건 진짜 선을 넘는 거지.
이준은 대답 없는 태모를 쏘아붙였다.
“그래서 여쭐게요. 몇 년입니까.”
“…….”
“몇 년 동안 그 혼인 관계를 유지하면 됩니까? 예? 몇 년이면 되냐고요.”
신경질적인 이준의 질문에 잠자코 있던 태모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었다.
‘능구렁이 같으니.’
이준은 속에 든 말을 뱉어 내려다 말았다.
“3년.”
뭐?
“3년이요? 휘준이의 귀영 의식이 끝날 때까지가 아니라요?”
“그래.”
태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영 의식을 무사히 넘긴대도 향후 1년 동안은 휘준이를 지켜봐야 한다. 하니 여유를 두어 3년 정도면 되겠지.”
“…….”
“그 3년 동안 네가 혼인 관계를 유지하며, 그쪽으로부터 영기를 받아들이고 휘준이나 다른 일족에게 나누어 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해결이라.
이준은 쓰게 웃었다.
태모는 말했다.
“장담하마. 3년만 참아라. 그럼 더는 네놈을 건드리지 않으마.”
“…….”
“준아.”
“아, 진짜! 알았다고요!”
이준은 버럭 소리쳤다.
“딱 3년입니다.”
그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이준은 말했다.
“3년 동안 영감님이 하라는 대로 그 여자랑 혼인 상태로 지내겠어요.”
이준의 차가운 말은 이어졌다.
“그동안 영기를 받아서 휘준이한테도 나눠 주고, 강주나 다른 사람들한테도 나눠 주면 된다는 거잖아요.”
“잠깐.”
그때였다.
씩씩거리며 퉁명스레 말하는 이준에게 태모가 빙긋 웃었다.
“그런데 내가 여자라고 했던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준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태모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묘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밑바닥부터 의심이 차올랐으나 쉬이 말을 뱉어 낼 수 없었던 까닭은,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해서다.
[그런데 내가 여자라고 했던가?]
그래.
태모는 분명 그리 말했다.
기억력이 좋은 이준이고, 문장이 똑똑히 기억나는 걸 보면 결코 잘못 들었을 리도 없다.
‘이 노인네가 또 장난을 치는군.’
이준은 미간을 좁혔다. 미소 짓는 태모의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려 했다.
“저기요, 영감님. 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에요.”
“누구는 장난칠 기분이라냐?”
“영감님!”
“강주 거기 있느냐.”
드르륵.
“하명하십시오, 가주님.”
이준은 태모의 외침에 너무도 당연하게 문을 열고 고개를 숙이는 강주를 발견했다.
그날 이후 감정을 잃어버린 강주의 모습에 가슴이 콕콕 찔려 왔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이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태모를 노려봤다. 태모의 닫혀 있던 입술이 움직였다.
“손님을 모셔와라.”
“무슨 손님이요?”
강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지자 이준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러자 태모의 눈이 휘어졌다.
“영감님. 설마…….”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똑똑.
이준은 강주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홱 고개를 돌렸다.
강주가 나가면서 다시 닫히게 된 미닫이문이 움직이려 들었다.
두근.
이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드르륵!
그러한 이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정하게도 문은 열렸다.
“손님, 오셨습니다.”
이준은 손님보다 한 발자국, 앞서 방 안의 그들에게 말하고선 슬쩍 옆으로 비켜나는 강주를 지켜봤다.
그러고는 그녀의 뒤편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얼굴 역시.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이준은 그 이상의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이준을 향해 빙긋 웃던 한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굳어 있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여기서 뵙네요.”
이 녀석이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