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상극(相剋) (4)
“그래. 내년이면 열여덟이지. 벌써…… 열여덟이 되는군.”
이준의 대답에 태모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결코 기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이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후우.
긴 숨이 태모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고 있겠지.”
이준의 입술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 태모는 말했다.
“귀영 의식까지 겨우 1년이야.”
귀영 의식.
그 단어를 듣자마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 끔찍한 일이 또 일어난다니…….’
이준은 얼굴을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가끔, 어째서 그런 일이 발생했던 걸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평범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준은 남들처럼 평범하려 애썼고, 그 덕에 자신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들키진 않았다.
매일같이 할아버지인 태모에게 불려가 종갓집을 이을 종손으로서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그의 아버지인 현종은 이준에게 대를 잇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해 왔었다.
[준이 넌,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해. 후일, 후회하지 않도록.]
이준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공부보다는 예체능 쪽에 관심이 많았다.
하여 할아버지의 수업을 피해 아버지 현종을 만나 함께 담을 넘기도 했으며 저 멀리 도망쳐 강원도 속초까지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피하지 못한 가문의 짐을 짊어지게 하지 않겠다며, 저 대신 모든 것을 어깨에 메고 있던 현종은 죽어 버렸다.
어디 현종뿐인가.
사랑하는 어머니도, 그리고 장난스럽던 삼촌도 죽었다.
견자의 생애에서 가장 영광스럽다는 귀영 의식 날, 이준은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
그것도 더는 상상하기 힘든, 가장 끔찍한 형태로.
“1년…….” 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이준을 지켜보던 태모가 다시금 입술을 움직였다.
“준이 네 녀석도 알고 있다시피, 견자로서 각성할 귀영 의식에는 강한 영기가 필요하다. 방계 쪽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직계인 휘준이의 귀영 의식에는 더욱더 많은 영기가 요구될 테지.”
“영감님.”
이준은 흐음, 하고 숨을 내쉬고 있는 태모를 노려봤다.
“대체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이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렇게 뱅뱅 돌리지 마시고 알아듣기 쉽게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차라리 그편이 거부감이 덜합니다.”
이준의 태도가 삐딱해졌다.
‘귀영 의식’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구겨진 얼굴을 펴지 못했던 그는 불평과 불만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이준을 보며 흥 코웃음 치던 태모가 말했다.
“싸가지 없기는. 대체 누구를 닮은 거냐, 네놈은.”
이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겠습니까. 존경하는 우리 영감님 아니겠어요?”
“뭐 인마?”
“대책, 말씀하세요.”
“……!”
“휘준이 귀영 의식 때까지 제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본가로 호출하신 거 아닙니까.”
“…….”
“그래서. 영감님이 생각해 낸 대책이 뭐냐고요.”
뱃속에 천 년 산 능구렁이를 키우고 있는 것이 분명한 태모는 제 의도를 알아차린 이준을 보고 살짝 눈을 일렁였다.
그에 흥 코웃음 치며 반응할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이준은 결국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피식 실소를 터트리는 태모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방법은 확실히 존재하지.”
이준을 응시하던 태모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준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휘준이도 지키고, 의식을 대비할 일족의 힘을 늘리는 획기적인 방법 하나가 존재해.”
같은 말을 반복하는 태모를 주시하던 이준이 미간을 좁혔다.
“……진짜로 획기적인 거 맞기는 한 겁니까?”
태모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이 할아비를 못 믿는 거냐?”
“아뇨, 뭐, 그건, 아니지만…….”
이준이 중얼거리자 “썩을 놈.” 하고 욕설을 뱉어 내던 태모가 말을 이어 갔다.
“준이 네놈, 정말로 휘준이도, 가문도 지키고 싶은 거냐?”
이준은 고개를 들었다.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우리 막내는 지키고 싶은 건 사실이다만 가문까지는…… 뭐, 막내가 원한다면 겸사겸사 지켜도 되겠죠.”
“이 녀석아. 천 년 넘게 지속된 가문을 동생이 싫다고 하면 버릴 게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나저나 대책은요.”
이준은 발끈하는 태모를 진정시키려는 듯 그에게 손을 휘휘 저어 보인 후 태모의 대답을 기다렸다.
태모는 그러한 이준의 시선을 받고선 길게 심호흡을 한 이후 다시 이준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간단하다. 네가 누군가에게 영기를 대신 얻어서 모두에게 나누어 주면 된다.”
누군가?
이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누구’가 대체 누군데요.”
“…….”
“영감님?”
“준아.”
태모의 눈빛이 변했다.
이준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태모의 시선을 마주하며 그의 소리를 기다렸다.
결심한 듯 힘껏 얼굴을 주억인 태모가 내내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너, 5대 종가 중 한 곳과 혼인해 줘야겠다.”
‘뭐라고?’
이준은 귀를 의심했다.
당연히 의문을 품을 만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혼인’이라는 말을 뱉어 내다니.
‘이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말을 뱉어 내고 난 이후로도 주워 담을 생각을 하지 않는 태모를 보자니 헛웃음이 났다.
이준은 최대한 태연하게 말하려 했다.
“영감님.”
“듣고 있다. 말해.”
이준은 흥 코웃음 치는 태모를 향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혼인이라뇨. 호령(號靈)을 잘못 말씀한 거 아닙니까?”
“…….”
“영감―.”
“맞다. 혼인. 결혼해라, 준아.”
쾅.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가격당한 기분이다. 이준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이 노인네가 진짜.’
이준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영감님, 제정신이십니까?”
“지극히 제정신이다.”
“제정신이라면 그런 말씀은 절대 하지 마셔야죠!”
“…….”
“영감님이 이 집에 틀어박혀서 제가 누구인지 잊고 계시나 본데, 저 차이…… 아니, 차휘입니다. 차휘라고요!”
차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톱스타.
아무리 세간의 소문에 귀를 닫고 지낸다 하더라도 차휘라는 이름을 듣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 들려오는 요즘 시대에, 나보고 결혼을 하라고?
이준은 헛웃음을 흘리며 인상을 썼다.
그러자 냉랭하게 콧방귀를 뀌던 태모가 대꾸했다.
“네놈이 차위든, 차휘든, 차쉬든 상관없다.”
상관없기는!
“영감님이 뭘 잘 모르시나 본데, 저요, 대한민국에서 꽤 유명해요. 꽤? 아니, 꽤도 아니야. 엄청 유명하다고요.”
“그러냐.”
“그런 제가 대뜸 유부남이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영감님도 저도, 편하게는 못 산다고요!”
“네 결혼 하나에 내가 편하게 살지 못할 건 또 뭐냐. 난 잘살 거다.”
“영감님!”
“게다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준이 너는 고현 차씨 일가의 종손이다.”
“…….”
“우리 중 영기도 가장 강한 네가 딴따라 일을 계속하는 건 그만큼 우리 집안의 손해란 말이다.”
“하아.”
“그러니 가문이 희생하는 만큼, 네놈도 희생할 건 해야지. 안 그래?”
“저기요, 영감님. 대체 가문이 무슨 희생을 했다고…….”
“설마 네 녀석은 휘준이를 지키지 않을 생각인 거냐?”
빌어먹을 노인네 같으니.
‘하다 하다 막내 핑계를 대다니.’
태모를 바라보던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할아버지. 나, 더는 이렇게 못 살아요.]
16년 전, 고현 차씨 일가의 막내 휘준의 탄생과 함께 어른들의 죽음을 제 눈으로 목격한 이준은 곧바로 집을 나왔다.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전부 자신의 책임인 것 같아, 방황하며 거리를 헤맸다.
[거기, 얘야. 잠깐 내 얘기 좀 들어 볼래?]
그러다 우연히 정후로부터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고, 그때부터 모든 것을 잊자는 생각에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대놓고 얼굴을 알리면 집안은 물론 비생 역시 자신을 건드리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바로 이유였다.
하지만 이준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이상하게 비생을 목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가끔은 촬영장에서, 스튜디오에서, 그리고 방송국 지하 주차장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제 앞에 나타나는 비생을 보며 이준은 깨달았다.
‘벗어날 수 없군.’
고현 차씨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이상 이준은 비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흔히들 비생이라는 것들을 볼 수 있고, 그들을 다룰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을 영력(靈力)이라고 한다.
이러한 영력을 다루기 위해서는 영기(靈氣)라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이준은 고현 차씨 가문의 사람 중에서도 영기가 무척 강한 편에 속했다.
그런 그가 가문의 비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예계 활동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가출했던 본가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비생들이 연예계 활동 도중에도 그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협을 보자.]
[타협이요?]
[그래, 이 썩을 놈아. 네놈이 얼굴을 알린 이상 너를 곧바로 가주에 앉히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니 네놈이 딴따라 일을 그만둘 때까지 외주를 주마.]
[저보고 외부에서 요괴를 퇴치하라고요?]
[그럼. 계속 도망칠래?]
결국 본가로 돌아온 이준은 현 가주인 태모와 합의를 봤다.
이준이 한번 시작한 연예계 활동을 그만둘 때까지, 혹은 고현 차씨 일가의 가주가 정해질 때까지 태모가 가주로 자리하며 그를 안팎으로 보호해 준다는 게 바로 그 내용이었다.
‘그렇게 결론 냈으면서 갑자기 결혼하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이준은 몇 년 동안 이어진 협정을 깨트린 태모를 응시하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아니지. 정신 차려. 휘말리지 말자.’
고집이라면 황소도 부럽지 않은 두 조손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이준은 순간 스치는 생각에 제정신을 차렸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갑자기 웃는 자신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 태모에게 말했다.
“방금, 5대 종가라고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