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너 좀 닥치지 못하겠느냐?”
위스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현기증이 나더니 이제 몸의 중심도 안 잡히기 시작했다.
“제가 팔라틴 왕에게 빌려준 인형이 테오 경을 습격했을 때…… 폐하께서 가세하셨다면 테오 경은 죽었을 텐데. 그런 다음 테오 경의 부하들을 충동질해 팔라틴의 내전을 일으키면, 원하는 대로 보복을 하실 수 있었을 거잖아요. 제가 아는 폐하라면 그러셨을 거예요. 왜 안 그러셨을까?”
사무엘은 골똘히 의문에 잠긴 채 말했다.
‘뭐라는 거냐…….’
위스는 쓰러지지 않게 정신을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그의 감각에 다가오는 인기척이 걸렸다.
기척은 하나가 아니었다. 백 명이 넘는 자들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다.
“이게 뭐야……. 하늘이…….”
“마법사가 우리를 돕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
“조용히 해! 폐하께서 명령하신 대로만 따라라. 대공은 어디에 있나?”
“저 공터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 아닙니까? 아니…… 덩치가 작은 듯한……?”
다가오는 자들은 위스의 편이 아니었다. 팔라틴 왕의 병사들이다.
위스는 어느새 자신이 공터 바닥에 무릎을 대고 주저앉아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가느다란 숨 사이로 계속해서 핏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주변 흙은 검붉게 젖어 있었고, 옷은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위스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마력의 흐름 같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 계산을 놓고 본능대로 마력을 운용해 나갔다.
사무엘은 무슨 원한이 사무쳤는지 해괴한 마법을 운용하고 있었다.
조금만 힘의 균형이 흐트러지면 위스의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아무래도 벼락에 맞아 죽는 건 너무 극적이고 꼴사나운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의식을 놓을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뇌우를 얽은 촘촘한 마력의 그물이 느껴졌다.
‘아름답군.’
사무엘은 모든 일에 엉성한 데 비해 마법은 예술적으로 운용했다.
그 흐름이 읽혔다.
‘이 새끼는 세월이 흘렀다고 방심을 처마셨나.’
사무엘이 아닌 위스가 대륙 제일의 마법사였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왜겠느냐?”
위스가 물었다.
‘마법에 간섭하는 데 성공했다.’
대답은 엉뚱하게도 포위한 병사들 쪽에서 들렸다.
“으악!”
“뭐야? 무슨 일이야?”
“대공이다! 아카젤 대공이……!”
“위스미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소란을 뚫고 들려왔다.
누군지는 보이지 않았다. 위스의 눈은 붉게 젖어 있었다.
“아……. 오셨네요. 테오 경.”
사무엘의 눈에서도 핏줄기가 툭 떨어졌다.
“당신을 기다린 건 저였는데. 폐하께선 또 저분을 사랑하시잖아요.”
마법이 발동됐다.
그 다음 상황은 조각난 채 위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무엘이 대마법을 발동했다.
위스의 마력이 개입했으나 방향을 크게 트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벼락의 형상을 띤 마력의 집합체가 떨어졌다.
테오도어가 위스 앞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그를 감싸 안았다.
“테오!”
위스는 비명을 질렀다.
⚜ ⚜ ⚜
테오도어는 기절한 위스에게 신관을 붙였다. 신관은 위스를 진찰하고 말했다.
“히트사이클이 다가오는 듯합니다. 페로몬이나 감정이 불안정할 때니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왕성에서는 불가능하겠군.”
“치라 공작께 도움을 요청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조용한 저택을 빌려주실 텐데요.”
시종 위릭이 말했다.
수도에 전염병이 돌 때 부모를 잃은 그는 이후 왕성으로 들어와 테오도어를 모시겠다고 자청했다.
이 충성스럽고 말없는 시종은 팔라틴 왕에게 깊은 증오를 품고 있었다.
테오도어가 미소 지었다.
“내가 없는 동안 공작과 친해졌나?”
“그럴 리가요.”
“공작이 좋아할 만한 소리는 그만두고 네가 저택을 알아봐.”
“두 분을 모실 만큼 안전한 저택을 지금부터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귀족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어렵다면 성벽 밖으로 나가는 게 낫겠지. 그곳이라면 호위 병력을 불러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예. 모든 조건을 알아보겠습니다.”
대답하면서도 위릭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할 말이 있나?”
“제가 여쭈어봐도 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해 봐. 궁금하잖아.”
“폐하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테오도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그는 한 번도 리엔델에게 그렇게 분노를 표현한 적이 없었다. 리엔델도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공포에 질렸겠지.’
그는 리엔델을 알고 있었다. 리엔델은 겁을 먹으면 흉포해졌다. 그가 사람들에게 예민한 폭군인 이유는, 늘 겁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테오도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리엔델 앞에서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는 게 피를 덜 보는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어떤 판단도 가능하지 않았다.
목이 졸리고 있는 위스를 본 순간 눈이 돌아갔다.
위스의 페로몬에서 분노와 공포가 느껴졌다.
‘감히 누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정신을 차려 보니 리엔델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위스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가 죽을 때까지 목을 조르고 있었을 터였다.
리엔델이 테오도어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했다.
그는 어릴 적 한번 테오도어에게 죽을 뻔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들은 나이 차이가 있었고, 테오도어는 그때 어린아이였음에도.
리엔델은 잠에서 깬 테오도어에게 접근했다가 살해당할 뻔했다…….
테오도어는 어린 시절 그가 꾸던 악몽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국왕 부부의 부탁을 들은 마법사가 찾아와 테오도어의 기억을 지우고 갔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그 꿈을 꾸고 느낀 분노와 상실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판단이 불가능한 감정이었다.
그 분노를 어디든 표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지.’
리엔델이 위스를 해한다는 생각이 든 순간, 테오도어는 그때와 같은 분노를 느꼈다.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온 성에 소문이 난 모양이군.”
위릭은 머뭇거리다 수긍했다.
“예. 사실 저택을 빌려주시겠다는 제안도 치라 공작께서 먼저 주셨습니다. 두 분 사이에 충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다고요. 환영 연회에서부터 폐하께서 무례하셨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하신다고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기뻐하시는 게 아니고?”
위릭은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대공 전하께서 더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며칠째 주무시지도 않고 위스미아 전하 곁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위스와 관련된 문제로 왕과 대공이 충돌했다는 소문이 온 성에 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왕성의 소문이란 정확할 때가 있단 말이야…….’
테오도어는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위스가 깨는 걸 확인할 때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 테오도어는 시시각각 변하는 위스의 상태를 지켜보느라, 정작 자신이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러나 위스미아가 깨어났다. 이제는 지독한 피로가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데 반항할 수 없었다.
“위스미아 전하를 지키려고 더욱 경계하시는 듯하여……. 치라 공작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거처를 옮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자 충언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지. 그러면 리엔델에게 명분을 주는 게 돼.”
“…….”
“리엔델은 더 예민해질 거야. 내가 귀족원을 등에 업고 그를 공격하리라 여기겠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 순 없지…….”
위릭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주인의 생각에 첨언을 얹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답답해한다는 것도 테오도어는 알고 있었다.
그의 주인인 테오도어가 어째서 리엔델 왕의 저 포악한 행태를 두고 보는지 갑갑한 것이다.
“지시하신 대로 수도 밖의 저택을 수배하겠습니다.”
“그래.”
“조금 주무십시오. 따로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러지.”
테오도어는 미소를 짓고 시종을 내보냈다.
그러나 집무실 의자에 기대 앉아 잠시 눈을 감고 피로를 푸는 순간 선잠에 빠져들었다.
‘각인’은 행위의 주체자인 두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였다.
각인된 상대가 죽었을 때 남은 사람이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죽은 상대의 페로몬만이 남은 사람의 페로몬을 진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서로가 서로의 페로몬에만 반응하도록 육신이 바뀌어 버리는 행위였다. 지금껏 상대방이 살아오던 세상을 자신에게 편입시키는 행위다.
그런 게 몸과 정신에 영향을 주지 않을 리 없었다.
테오도어는 피로했다.
그리고 그의 정신에 걸려 있던 마법 또한 육체의 변화에 반응했다…….
꿈속의 테오도어는 누군가의 부관이었다.
그는 그의 왕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왕은 강했으나 어딘가 망가진 사람이었다. 테오도어는 그것이 자신의 탓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집을 만들자.
-이런 노예 농장이 아니라, 우리가 돌아갈 집을.
그 약속은 부담이 되어 왕을 짓눌렀다.
테오도어는 소년 시절 그가 뱉은 말이 왕을 옭아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왕은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약속을 어길 수 없다.
왕국은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다.
그들이 왕국이 노예가 만든 곳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노예의 왕국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법사와 노예들이 자유민으로 살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국경을 맞댄 영지들의 침략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왕은 울며 애도하는 대신 보복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