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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 메리드 트러블 (55)화 (5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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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다시 일어났을 때는 테오도어가 없었다.

“물.”

옆에서 졸고 있던 호위가 눈을 떴다.

“아, 일어나셨어요?”

“어. 너도 잘 자는구나.”

위스는 이제 이놈에게 화도 나지 않았다.

‘평화의 시대 좋지.’

서머는 패전했고 팔라틴은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이지만…….

300년 뒤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낙천적이기 짝이 없었다.

위스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대륙보다는 그게 나았다. 이렇게 평화롭던 게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호위는 물을 따르더니, 옆에서 기웃거리며 위스가 물 마시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뭐냐. 할 말 있으면 해.”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

“다행이네요. 각인이라는 게 그렇게 아픈 건 아닌가 봅니다. 대공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요.”

“각인?”

“예, 왜 있잖습니까? 형질인들끼리 서로 죽고 못 살아서 하는 거요. 아니, 제 말은, 사랑의 결실이라고 할까요.”

위스는 물 잔을 내려놨다.

“그게 뭔데.”

“저도 형질인이 아니라 잘 모르는데요. 듣기로는 서로 너무 사랑하면 각인된다지 않습니까? 한쪽이 죽으면 나머지 한쪽도 살지를 못한댔나. 아무튼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아니 로맨틱하기 짝이 없는 행위라고 할까요.”

‘그게 뭔데…….’

위스는 정신이 아찔해져서 물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런 거 한 적 없다.”

“하셨다는데요? 대공 전하께서 후회막심한 표정으로 여기 서 계시고 신관이 진단하는 것까지 다 들었습니다.”

“물.”

호위가 재빨리 물을 따랐다. 한 잔을 더 마셨으나 여전히 속이 탔다.

위스는 침착해 보려 했으나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고함을 쳤다.

“그게 뭐냐, 저주냐? 그놈은 생각이 없어? 뭘 믿고 남과 목숨을 엮느냐?”

“저한테 그러셔도…….”

그러더니 호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위스를 빤히 봤다.

“근데 말씀이 이상하신데요. 폐하가 아니라 그분을 걱정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뭐 그분이야 어딜 가든 목숨 관리 못 할 분은 아니기는 한데. 그렇다고 폐하께서 다른 사람을 믿는 분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

“이미 한번 배신당하고도 그분을 또 믿으세요?”

위스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놈이 언제 나를 배신했느냐?”

“폐하를 죽이셨잖아요.”

위스를 부르는 호칭이 ‘위스미아 전하’가 아니다. ‘폐하’다.

“그분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폐하께서 풍토병 따위에 쓰러지셨겠어요? 그분이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삼백 년 동안 생각해 봤는데, 역시 제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 폐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요.”

“너 누구야?”

“페더라니까요. 아니, 말씀드려도 기억 못 하실 거면서 왜 물어보십니까?”

그가 다시 눈치 없는 호위 기사 말투로 말했다.

그 즉시 위스의 눈동자가 밝아졌다.

문이 닫힌 방 안이다. 바람이 불 리 없는데도 위스의 주위로 공기가 모여들었다.

“이름.”

호위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 그러지 마세요. 폐하께서 그러시면 무섭다고요. 당신께서 붙여 주신 이름을 벌써 잊으셨어요?”

“…….”

“폐하의 사무엘이에요.”

위스의 마법사가 말했다.

그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젊은 호위 기사의 얼굴이 눈에 익은 마법사의 것으로 바뀌더니, 이내 싱긋 웃었다.

“폐하, 저랑 어디 좀 같이 가 주세요. 그러지 않으시면 불행한 일이 일어날 거예요.”

⚜ ⚜ ⚜

마법사 사무엘은 예언자로 산다는 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사무엘은 태어나서 운이 좋았던 적이 없다.

마법사로 태어난 것부터 그랬다.

‘악마의 힘’을 가진 붉은 눈의 아이를 마을에서는 불길한 것 취급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보이는데.’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게 보인다. 앞집 사람이, 주인집 딸이, 죽어 버리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 얘기를 어떻게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사무엘을 두려워했다.

앞집 사람이, 주인집 딸이 죽어 버린 뒤에는 사무엘을 묶어 놓고 혀를 잘랐다.

-악마의 자식!

사무엘은 인간이 아니었다.

악마의 씨가 어머니의 배를 빌려 태어난 것이라고 했다.

사무엘은 숲에 버려졌다.

두려운 사람들을 피해 숲 깊은 곳으로 기어 들어가, 사무엘은 필사적으로 혀를 재생시켰다.

그 밤새 흘린 피가 옷을 흠뻑 적셔서, 흰옷은 다시는 원래의 색을 회복하지 못할 듯했다.

숲에서 사무엘은 다른 마법사를 만났다.

그 마법사는 사무엘이 어떻게 혀를 재생시켰는지 알아내고 싶어 했다.

사무엘은 마법사에게 그 방법을 알려 주었지만, 마법사는 해내지 못했다.

사무엘은 자신을 때리는 무능하고 불쌍한 마법사의 정신을 주물러서 천치로 만들어 놓았다.

-불쌍한 사람. 이젠 아무도 해치지 못할 거예요.

사무엘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된 마법사를 안아 주며 말했다.

사무엘은 폭력이 싫었다.

그러나 사무엘이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은 폭력적이고 두려운 이들뿐인 모양이었다.

그를 쫓아낸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도 그랬다.

‘외로워.’

분별력이 사라진 마법사는 어느 날 혼자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죽었다.

혼자 남겨진 사무엘은 다른 마법사들을 찾아 떠났다. 그를 받아 줄 사람은 같은 마법사밖에 없었다.

사무엘은 자신이 정신을 주물러 놓은 마법사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험난한 산맥에 숨어든 마법사들을 하나둘씩 모았다.

상냥하고 외로움을 타는 사무엘은 모든 마법사에게 다정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해치는 짓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악랄한 마법사는 곧 정신이 망가져 버렸기 때문에, 사무엘은 마법사 집단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사무엘은 규칙의 관리인이었다.

그는 집단에서 가장 어렸으나, 마법사 집단은 나이로 돌아가지 않는 공정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이상하다.’

그러나 사무엘은 여전히 외로웠다.

왤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던 중 소문이 들렸다.

마법사 노예가 영지를 차지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영지마다 불을 지르고, 노예를 훔쳐서 자기 휘하에 넣는다더군.

-노예들의 영지를 만든다는 거야.

흥분한 마법사들이 말했다.

-마법사 성주의 밑에 들어가면 우리에게도 마을이 주어질까?

숲은 거친 곳이었다. 마법사들은 누군가 실종되고 짐승에게 물려가는 데 익숙했다.

수가 적은 마법사들은 계속 소수인 채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은 모두 세상을 그리워했으므로, 의견이 모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들은 숲을 내려가 위스를 찾아갔다.

그들의 주인이 될 사람은 금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사무엘의 삶에 행운이랄 게 있다면, 그건 위스를 만난 것이었다.

위스는 모든 마법사의 행운이었다.

‘폭력적인 분이지만.’

사무엘의 안목은 좋지 않아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사무엘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사무엘은 피도 싫고 폭력도 싫었으나, 그의 주인은 전쟁광이었다.

사무엘이 위스를 모시고 처음으로 치른 전투는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성을 사수해 안에 살고 있는 노예들이 다치지 않도록 했다.

첫 전투에서 승리하고, 위스는 본 적 없던 미소를 보여 주며 사무엘에게 다가왔다.

-역시 마법사가 유용해. 집단 전투에는 마법이라고 내가 말했잖아.

-반박한 적 없습니다.

위스를 지키던 소년 기사가 대꾸했다.

-넌 비언어적 표현이라는 것도 몰라? 웃으며 ‘그렇군요’라고 하면 내가 ‘이놈이 마음속으로 납득했군’ 하고 잘도 생각하겠다.

-마음속으로 승복했습니다. 그야 대장 같은 분이 둘만 더 있어도 방어전이 수월하겠죠.

-무슨 소리야. 나 같은 사람은 또 없어. 그런 사람이 또 있을 리 있어?

-예……. 없겠죠.

-그래도 근접하긴 한 것 같은데. 네가 가장 뛰어난 마법사여서 저들이 따르는 거였군.

위스가 사무엘에게 말했다.

-이름이 뭐지?

그리고 싱긋 웃었다.

피와 흙먼지가 묻은 얼굴이 아름다웠다.

그는 막 수백 명을 죽인 사람이었다.

‘아니. 수백 명을 살린 분이다.’

사무엘은 성안의 무력한 노예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멍하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건 그를 버린 부모가 준 이름이었다.

후에, 위스의 세력이 두 개 성을 더 차지해 왕국을 칭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위스는 사무엘에게 작위를 내리고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사무엘은 작위에 따른 성이었으나, 사무엘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왕은 다른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건 방어전이 아니었다.

침공이었다.

사무엘은 많은 전쟁에 참전했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가 사랑하는 왕은 전장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페라 원정길에 왕은 죽었다.

-왕국이 위험하면 돌아올게.

그는 눈을 감기 전 말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마법사는 사무엘밖에 없었다.

다들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뿐,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사무엘이 유일했다.

사무엘은 울며 생각했다.

‘그건 마법이다.’

그의 왕은 뛰어난 마법사였다. 마법 체계가 독특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마법을 구사했으며, 그 독창성과 파괴력에서는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런 마법사가 약속했다.

위스의 언어는 이 세계의 하나의 약속으로 남았다.

서머가 위험에 처하면, 위스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왜들 저렇게 울까. 폐하께서는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다시 돌아오실 텐데. 돌아오시면, 또 전쟁이 일어날 텐데.’

위스는 자신을 죽인 페라 지역의 사람들과, 배신한 부관 테오도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사무엘이 사랑하는 왕은 그런 분이었으니까.

왕이 죽어서 사무엘은 슬펐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오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저희를 지켜 주세요. 그러면, 저희도 전하를 지켜 드릴게요. 저희의 삶이 다할 때까지. 약속드려요.

사무엘은 목숨을 걸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의 약속은 위스의 죽음으로 소멸됐다.

다시 태어난 위스는 사무엘이 충성을 맹세한 그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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