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마법사들이란 종잡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에 비해 사람들은 그들을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
세상에 득도 해도 되지 않는 신비로운 자들.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을 마치 옛날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처럼 생각했으나, 리엔델 왕은 아니었다.
이들은 실제적인 위협이다.
왕의 권력이 통하지 않는, 그리고 언제든 왕의 목에 칼을 댈 수 있는 무력 집단을 어느 누가 좌시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이들은…… 위스 대왕의 후예였다.
‘마탑주 사무엘.’
그 이름을 잇는 집단이 아닌가? 이들의 협력을 얻을 수 있다면, 위스 대왕의 정통성을 이어받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입 다물게 할 유일한 수단이라고, 리엔델은 믿었다.
그러나 팔라틴 왕가는 부유하지 않았다. 왕이 멋대로 쓸 수 있는 자금에는 한계가 있다.
‘누가 성군이란 말이냐.’
성군이라 추앙받던 부왕은 아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그런데 초조해하던 리엔델에게 마탑주가 먼저 찾아왔다.
리엔델은 팔라틴 성 안으로 뚝 떨어진 무례한 귀빈을 맨손으로 달려 나가 맞았다.
-마탑주 사무엘입니다.
남자는 로브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샌님처럼 생긴 젊은 남자였으나, 눈은 회색에 가깝게 희어서 노인의 그것 같았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남자다. 그것마저 그 남자의 신분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협력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마탑에서 팔라틴에 말입니까?
-아, 그렇지는 않고 폐하 개인에게 요청드리는 것에 가깝습니다. 비밀을 요하는 일이어서요.
-뭡니까?
-이 세계를 멸망시킬 씨앗이 곧 찾아올 겁니다.
마탑주는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리엔델 왕은 헛기침을 했다.
-두려운 일이군요. 그런데 그 예언은 이미 온 대륙에 퍼지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씨앗과 연결된 끈을 제가 이번에 예언했으니까요.
-그게 무엇입니까?
-비밀을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협력을 약속해 주셔야 하고요.
-약조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마탑주는 다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싱긋 웃었다.
-이 나라에 대공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이 멸망의 씨앗으로 저희를 안내해 주실 겁니다…….
리엔델 왕은 희열에 들떴다.
멸망의 씨앗은 테오도어였다! 아니, 그놈이 씨앗과 협력할 놈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면 또 어떤가? 예언이 거짓이래도 리엔델은 상관없었다.
마탑주가 자신의 힘을 과시해 준다지 않는가!
마탑의 제물로 테오도어를 선택했다지 않는가?
테오도어를 죽여 주겠다지 않는가!
‘기회를…… 한번 놓쳤지만.’
마탑주가 보낸 ‘마법 인형’은 과연 굉장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테오도어를 죽이진 못했다.
리엔델 왕은 마탑주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도와주십시오!”
“으음……?”
마탑주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테오도어 그놈이 세계를 멸망시킨다지 않았습니까? 그자들을…… 내가 제거해 주겠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저번 같은 실수는 없을 겁니다!”
“아…… 아아.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어, 그럴 필요는 없겠네요.”
마탑주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싱긋 웃었다.
“예, 뭘 어떻게 해 드릴까요?”
-왕자의 말 한 마디에 그 아카젤 대공이 검을 뽑았습니다! 위스미아 왕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시저 남작의 말이 맞았다.
테어도어는 위스미아에게 홀려 있었다.
위스미아를 통해 함정에 빠뜨릴 필요도 없었다. 그 왕자를 잡기만 하면 테오도어는 어디든 단신으로 따라 들어올 터였다…….
“위스미아 왕자를 유인해 주십시오. 테오도어는 따라 나올 겁니다.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두 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리엔델 왕은 부들부들 떨면서 생각했다.
마탑주는 시원스레 말했다.
“그 정도야. 저희의 요청에 따라 대공 전하를 출전시켜 주셨으니, 저희도 도움을 드려야죠. 저희 마법사들은 약속을 잘 지킨답니다…….”
그가 싱긋 웃었다.
“마침 위스미아 전하께는 드릴 말씀도 있었으니까요. 뭐,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인걸요.”
⚜ ⚜ ⚜
“잠깐, 잠깐만…….”
위스는 테오도어의 가슴팍을 쥐었다. 그러나 테오도어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침실 문을 열었다.
허리가 붙잡히고, 중심을 잃은 다리가 멋대로 뒤로 끌려갔다.
침대로 넘어진 위스는 눈을 감고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아…….”
“옷을 벗겨도 되겠습니까?”
질문과 동시에 옷이 벗겨지고 있었다. 위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답을 듣지 않을 거면서 묻기는 왜 묻느냐?”
“전하께서 허락하실 것 같기에.”
“…….”
위스는 할 말이 없었다.
거친 듯한 손이 부드러운 살결을 쓸었다. 갈비뼈를 따라 천천히 만지고 있는 것뿐인데도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테오도어는 위스의 턱에 입을 맞추고 입술을 조금씩 지분거리고 있었다.
역시 간지러워서 발가락이 안으로 굽었다.
‘간지럽게…….’
뭐 하는 짓인가?
위스는 눈을 떴다. 테오도어가 옷을 다 갖춰 입고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도 벗어.”
“예?”
위스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움직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여 테오도어의 단추를 풀려다가, 다 뜯어 버리고 말았다.
‘됐다.’
옷이야 새로 사면 되지 않는가?
“저, 전하…….”
“너만 손이 있는 줄 아느냐?”
“전하께서도 손이 있으시지요…….”
테오도어가 웃는 듯했으나 반쯤 돌아간 위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테오도어의 가슴을 밀쳤다. 테오도어가 밀려나 주는 힘을 이용해 몸을 뒤집었다.
위치가 역전됐다.
“전하.”
“입 다물어 봐.”
“…….”
테오도어는 착하게 말을 들었다. 위스는 꾹 다물린 입 위에 자신의 입술을 댔다.
‘왜 안 열리냐.’
그런데 이 새끼가 말을 너무 잘 들어서 입을 열지를 않는다.
위스는 테오도어의 입술을 핥았다. 그런데도 꼼짝하질 않는다. 의아해서 몸을 떼어 냈다 다시 할짝거리자, 테오도어의 가슴팍이 들썩였다. 위스는 이를 악물고 테오도어의 가슴을 쳤다.
“웃지 마라.”
“예.”
“입 열어.”
“예, 전하.”
짜증이 치솟은 것도 잠시였다.
테오도어의 아랫입술을 훑고 있으려니 그의 손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위스는 눈을 감았다. 쓸데없이 감각은 예민하고 한숨은 나오는데, 밑에 깔려 있는 놈은 단단하고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았다.
“……전하, 정말 괜찮으십니까?”
테오도어가 입술을 떼더니 헛소리를 달싹였다.
“뭐가?”
“하하…….”
입술이 다시 맞부딪혔다. 부리를 쪼듯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더니, 테오도어가 말했다.
“다행입니다.”
‘이 와중에 무슨 소리냐…….’
위스는 머리가 멍했다.
그런데도 테오도어가 헛생각을 하는 건 알 수 있었다.
위스는 테오도어의 뺨을 잡아 고정시켰다. 듬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왜 사람 말을 안 믿느냐?”
“예. 전하께서는 믿을 만한 분이시지요…….”
테오도어가 웃었다.
위스는 화만 돋우는 입을 막아 버렸다.
테오도어의 입술은 부드럽고, 남의 입안을 침범하는 건 기분 좋았다.
테오도어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위스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는 위스의 것이었다.
‘나를 걱정하는…….’
내 알파. 내 것.
한숨이 나올 것 같아서 위스는 입술을 떼어 냈다. 테오도어의 얼굴을 고정시킨 손을 빼자, 테오도어가 그 손을 잡았다.
위치가 다시 뒤바뀌었다.
침대에 누운 채 위스는 테오도어를 올려다봤다. 그가 다시 입을 맞췄다.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다른 어떤 행위도 없이, 키스만으로 온몸이 떨렸다. 정신이 나간 듯했다. 손끝까지 찌릿찌릿하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맞댄 입술로 테오도어가 웃는 게 느껴졌다.
“뭐냐…….”
“이상해서요.”
“뭐가?”
“마치…….”
그가 속삭였다.
“마치?”
“전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눈치가 너무 빠르지 않나…….’
위스는 멈칫했다.
이놈은 사람만 좋은 게 아니라 머리도 좋다. 사실 싫어하기가 힘든 놈이지 않나.
위스는 눈을 감았다. 닥치라는 뜻으로 다시 입을 맞추자, 테오도어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달려들었다.
두꺼운 몸이 위스를 짓눌렀다. 단단한 곳이 몇 번이나 비벼져서, 위스는 소스라쳤다.
팔이 붙잡힌 것도 아닌데 꼼짝도 할 수 없다. 몸의 무게만으로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위스가 할 수 있는 일을 쾌감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자, 잠깐…….”
이번에는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다. 여기서 더 기분 좋아지면 사람이 이상해질 것 같다.
테오도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부정하셨어야지요.”
“뭐……?”
“아니라고 타박하셨어야지요. 제가 견디지 못하지 않습니까…….”
“으앗, 아, 잠, 아……!”
위스는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몸을 떨었다.
몸은 한결 나아졌으나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움에 머리는 굳어 버렸다.
그는 아직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다음 날 빨랫감을 가져갈 궁인들은 그를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때 밖에서 시종 위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 신관을 불러왔습니다.”
“……!”
위스는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쉬…….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테오도어가 위스를 꽉 끌어안고 달랬다.
“가시라고 해. 전하께서는…… 건강하시다.”
“예? ……예!”
위릭은 깜짝 놀라 사라졌다.
“전하.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뭐가 부끄러워할 일입니까. 저희는 부부인데요.”
테오도어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거의 위협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위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울먹였다.
“이게 왜 이러느냐? 왜 한 번 했는데도 진정이…….”
“후…….”
그 말을 들은 테오도어도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위스도 그 사실을 곧 깨달았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