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그건 그거고 리엔델 왕을 상대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대공께서 그런 일로 이혼하려 하실 분 같지는 않은데요.”
‘후사는 다른 오메가한테 보면 되지 않나.’
위스는 300년 전 왕들의 후궁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 녀석을 전혀 모르는군. 그놈은…… 제정신이 아니야.”
“글쎄요.”
위스는 열받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테오도어가 뭘 어쨌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왕이 잘 아는 척했다.
“이제 결혼한 지 두 달이나 됐나? 알 리가 없지. 그놈이 듣던 이상으로 이상적인 배우자라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해? 곧 아니게 될걸.”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아……. 그렇군. 연회장에서 금방 나왔지. 그 마귀 같은 늙은 귀족들이 지겨워지기엔 짧은 시간이었겠어.”
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자들이 널 환영하던가? 그랬겠지. 서머의 왕자니까. 팔라틴의 기사와 서머의 왕자만큼 상징적인 짝이 더 있겠나? 네 아이가 생기면 팔라틴과 서머의 통합 왕국을 다스리게 할 생각에 들떠 있겠군.”
‘반감이 심하군.’
현 팔라틴 왕은 선대를 극복하지 못했다. 선대의 귀족들이 아직 귀족원을 차지하고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것도 모자라, 현 팔라틴 왕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제레미가 이 꼴 난 거 아닌가.’
위스는 팔라틴이 돌아가는 모습을 알 듯했다. 제레미와 공신들의 관계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웠던 것이다.
위스는 순진한 척 말했다.
“좋은 분들인 것 같던데요……. 저희가 잘 어울리는 짝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기 좋은 한 쌍이라고요. 덕담도 많이 들었고요.”
“실컷 들어 두도록 해. 곧 비난의 말을 듣게 될 테니. 네가 열성이란 걸 아는 순간 안면을 바꿀 자들이다. 후계를 낳지도 못하는 왕자를 그들이 팔라틴의 왕후로 인정할 것 같나?”
왕은 연기를 뱉으며 비웃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와 결혼한 분은 대공 전하십니다. 팔라틴의 왕은 폐하시지 않습니까.”
“같잖은 소리 하지 마. 그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던가? 귀가 있으면 들었을 거 아니야. 내가 나가자마자 신나서 떠들어 댔겠지……. 팔라틴이 자신들 것처럼…….”
그가 씨근덕거렸다. 담배 연기가 위스에게까지 뿜어져서, 위스는 잔기침을 했다. 이 몸은 담배 연기에 익숙하지 않다.
“몸이 약하다더니.”
왕은 담배를 비벼 끄더니 훅 연기를 뱉었다. 위스는 다시 기침했다.
‘개자식이.’
“거기서부터 시작하겠군. 테오도어 그놈이 말하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먼저 알아챌 거야. 왜 아이가 생기지 않나. 첫해는 신혼이라는 핑계가 있군. 그다음 해는?”
“…….”
“해가 지날수록 원인을 찾겠지. 대륙 제일의 기사이자, 누가 봐도 뛰어난 알파인 테오도어 놈이 의심받겠나? 네 몸이 약하니 아이가 들어설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이혼 얘기가 나오는 것도 금방일 거다. 지금 널 귀애해 못 견디는 그 귀족들부터 널 물어뜯을걸…….”
“전 잘 모르겠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그런 일로 저와 이혼하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왕이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 그가 갑자기 성을 내서 위스는 인상을 썼다.
“그놈은 그렇겠지! 그놈이 당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 잘난 놈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처음에야 안심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뿐이야. 그놈이 주변 놈들의 입을 막더냐? 그 잘난 능력을 숨기고 내보이질 않더냐? 누구나 말하게 되어 있어. 네게 자격이 없다고. 이게 네게 준비된 미래다.”
왕이 숨을 헐떡이다 의자에 앉았다.
그가 미소 지었다.
“물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일어날 미래라는 얘기야.”
그가 입을 열면 훨씬 빨라질 거라는 소리다.
위스는 속이 좋지 않았는데,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들어도 문제가 없지 않은가?
“폐하께서 말씀하셔도, 대공 전하는 역시 신경 쓰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아니. 그놈은 네게 속았다고 생각할걸.”
“…….”
“그놈에게 혼담이 쌓여 있었지. 그중에 골라서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아나?”
“왭니까?”
“진짜 가족이 갖고 싶다더군. 정략결혼은 싫다는 거야. 미친놈.”
왕이 코웃음 쳤다.
“…….”
그 신분에 정신 나간 것 같은 소리기는 했다.
위스도 처음 들었을 때는 이 새끼가 장난하나 싶었다.
“그런데 그놈이 널 골라서 결혼한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나?”
“아니요.”
“그놈이 너한테 배신감을 느낄 거라는 얘기다.”
‘이미 배신감은 느꼈고.’
테오도어는 속은 것도 알고 있었다.
위스가 열성인 게 더해진다고 큰일이 나겠는가?
“면전에 대고 말해 보고 싶군. 나도 반응을 보고 싶어졌어. ……그놈이 화를 낼까? 모르겠군. 이성을 잃는 꼴을 본 적이 없어서…….”
왕이 중얼거렸다.
“그놈이 가족에게 집착하는 건 아나?”
“가정적인 분 같더군요.”
왕은 듣지 않았다.
“뭐, 몰라도 상관없겠군. 금방 알게 될 테니까……. 제 자식을 갖고 싶어 하는 거야 누구나 그렇지. 하지만 그놈은 심해.”
‘알고 있다.’
테오도어가 왕에게 대항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 아닌가? 귀가 닳도록 들어서 지겨울 지경이었다.
“제가 후계자를 못 낳을 것 같으면 대공이 이혼을 요구할 거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
“그놈이 조건 따라 결혼을 파기할 리 없지. 그럴 놈은 아니야. 신의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걸 중요시하는 놈이니까.”
위스는 점점 이 협박의 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럼 아무 문제 없지 않습니까? 전 대공이 밖에서 낳아 온 아이를 후계자로 삼아도 상관없는데요.”
왕이 비웃었다.
“정말 그놈을 모르는군.”
“…….”
“그놈은 더러운 짓은 하지 않아. 하물며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일 따위 할 리가 없지.”
대체 이놈이 하고 싶은 말이 뭐란 말인가?
“모두가 네 불능을 알아차릴 때까지, 어디서도 후계자를 만들지 않고 버틸 거라는 얘기다. ……그 치욕을 견딜 수 있나, 왕자? 모두가 너를 끌어내리라고 요구하는데, 뻔뻔하게 버티고 서서 견딜 자신이 있나?”
‘이거군.’
위스는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었다.
왕은 위스의 얘기인 것처럼 했으나 사실 이 이야기의 반은 다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건 왕의 얘기이기도 한 것이다.
팔라틴 왕이 동생에게 느끼는 감정은 열등감뿐 아니라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
‘안 궁금하고.’
중요한 건 이 협박이 위스에게 위협이 되는가, 아닌가다.
위스는 두 손을 모으고 풀이 죽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제가 뭘 하길 원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전 아무런 힘이 없는데요.”
“내가 네게 어려운 일을 맡기겠느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야.”
“뭡니까.”
“……역시 말투부터 고쳐야겠구나.”
왕은 혀를 차더니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옆으로 뱉어 낸 그가 말했다.
“내가 말하는 곳으로 테오도어 놈을 데리고 와. 그거면 된다.”
“……그게 다입니까?”
“그래. 별일 아니지.”
위스는 긴장한 척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면…… 대공 전하는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네가 알 필요 없다. 호위 없이, 혼자 보내기만 해.”
“하지만…….”
“그러면 너를 왕후로 삼아 주지.”
“…….”
놀라울 정도로 유혹적이지 않았다.
이 새끼는 협상의 기본이 안 되어 있다.
“고민할 일이 아닐 텐데? 어차피 네겐 선택지가 없어. 모든 명예를 잃고 수치 속에서 이름뿐인 대공비로 남느냐, 아니면 팔라틴의 왕후가 되느냐다.”
위스는 잠시 고민했다.
테오도어와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것과 저 구역질 나는 놈과 결혼하는 것 중에 선택하라고?
‘비교가 안 되잖아, 새끼야.’
양 저울에 같은 무게를 올려놔야 어느 쪽이 무거운지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위스는 마음이 찝찝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건 둘의 문제가 아니다.
위스미아에게 ‘하자’가 있다고 테오도어가 결혼을 파할까? 왕은 아니라고 단언했으나, 위스는 이미 테오도어의 신뢰를 다분히 저버렸다.
그가 또 다른 배신을 넘어갈까?
‘아니.’
테오도어가 아니더라도, 그의 충성스러운 부관과 부하들은 반대할 것이다.
위스는 전생에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는 전쟁을 강행했고, 그러다 가장 믿던 부관에게 배신당했다.
“…….”
테오도어가 위스를 거부한다면 위스는 상처받을 것이다.
‘예감이 나쁘더라니.’
원하지 않던 깨달음이었다.
위스는 바닥으로 처박을 듯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왕을 빤히 쳐다보자 그가 연기를 뱉었다.
“결정했느냐?”
고민이야 나가서 해도 충분하고…….
여기선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아까부터 의아하게 여기던 게 있었다. 연회장에서부터 느낀 위화감이다.
위스에게 가까이 접근한 알파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위스의 몸에 테오도어의 페로몬이 잔향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천적과 눈이 마주치면 사람은 움츠러들지 않는가?
‘무의식 영역의 반응이다.’
그게 의식해서 나온 반응이었다면 위스는 이미 혀 깨물고 죽어 있었을 것이다.
왕에겐 그런 모습이 없었다.
위스는 페로몬을 풀었다. 공기 중에 옅게 깔리던 페로몬이 일순간 농밀해졌다.
이곳에 알파가 있다면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왕은 아니었다.
멀뚱한 얼굴로 연기나 내뱉고 있었다.
위스는 확신했다.
‘이 새끼 베타다.’
위스가 물었다.
“그런데 전하. 제가 열성 오메가라는 사실은 유모 한 명이 알고 있었는데, 폐하가 베타라는 사실은 몇 명이나 압니까?”
왕의 안색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