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위스미아 전하께 제 소개를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콧수염 난 귀족이 물었다.
위스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어가 위스의 손을 놓아주고 말했다.
“모티어 백작입니다. 부친이 타란 전투의 전공자입니다. 본인은 기사가 아니지만요.”
“그렇게 소개를 해 주시다니……. 전하께서 저를 나약한 분으로 보실 게 아닙니까?”
콧수염이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백작을 강인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나. 곁에 있는 분이 부인입니다, 전하. 백작은 애처가로 유명합니다.”
테오도어가 쓸데없는 정보를 알려 줬다.
“예.”
위스는 대충 대답하고 소개받은 귀족들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수치심과 싸우느라 머리 반쪽이 돌아가지 않았다.
‘X발!’
누가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려니까 테오도어가 물었다.
“자리가 즐겁지 않으십니까?”
‘누구 때문이냐.’
“즐기고 있습니다.”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위스는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테오도어가 위스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말했다.
“무리하신 것 같습니다. 열이 다시 올랐군요.”
“……멀쩡한데요.”
“평소보다 체온이 높으십니다.”
“제 몸을 저보다 더 잘 아십니까?”
“예. 전하께선 자신의 몸을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돌볼 생각을 안 하시니까요.”
위스는 할 말이 많았으나 연회장에서 떠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귀족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갈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테오도어가 웃으며 위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간지러웠다.
‘열이 있나.’
그제야 몸 상태가 자각됐다.
머리도 잘 안 돌아가는 게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벌써 돌아가십니까?”
콧수염이 말했다.
“전하께서 여독이 풀리지 않은 듯하여.”
“아, 그러면 저희도 일어나야겠습니다. 이 사람도 몸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게 혼자 와도 된다니까, 꼭 이렇게 무리를 한다니까요.”
“대공께서 돌아오셔서 처음 열린 연회인데, 어떻게 당신을 혼자 보내요.”
“내가 아이도 아닌걸요. 혼자 연회장에 못 있겠어요? 당신은 쉬어도 괜찮다니까.”
그러면서도 콧수염은 부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서로 손도 잡고 있었다.
‘시대가 변하긴 했군…….’
피부로 느껴졌다.
위스의 시대에는 부부라도 공공장소에서 입맞춤을 주고받는 대담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나 하는 것 같다.
위스가 그 모습을 보다 문득 물었다.
“왜 키스 안 하십니까?”
“예?”
테오도어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위스는 자기 입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뭐라고 지껄인 건가?
“서운하셨습니까?”
“아니요.”
테오도어는 듣지 않았다. 위스를 꽉 끌어안은 그가 말했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우십니까……. 괴롭습니다.”
위스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테오도어는 뭘 참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표현하기에는 이미 연회장에서 낯부끄러운 짓은 다 하고 있었다!
“놓으십시오.”
“전하께 입 맞추기 싫어 그런 게 아닙니다.”
“놓으라고. 제가 원해서가 아니라, 다들 하기에 드린 말씀입니다.”
위스가 작게 씨근덕거렸다. 주먹으로 등을 쳐도 팔은 풀리지 않았다.
“예. 압니다. 저도 다들 하듯이 전하께 애정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독 기운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독 아니라며!”
“전하께 확인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네 몸으로 확인하고 헛소리냐?”
“하하.”
견딜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 테오도어가 허공을 쳐다봤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뭡니까.”
위스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물었다.
“입을 씻고 와야겠습니다.”
“예?”
“돌아갈 때까지 못 참을 것 같군요.”
“……!”
위스는 제정신으로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테오도어가 마신 술에 독은 몰라도 뭔가 이상한 게 들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아니고서야 저런 미친 소리를 할 수 있는가?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한눈팔지 말아 주십시오.”
테오도어의 손이 위스의 뺨을 만지고 떨어졌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위스는 얼굴을 가렸다.
온몸이 고동치고 있다. 역시 몸이 이상하다.
‘쓸모없는 몸뚱이. 아픈 게 자랑이군…….’
위스는 평소처럼 불평하다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팔라틴 사교계에 연고도 없는 위스에게 새삼 귀족들이 다가오는 건 아니었다.
다가온 남자는 왕의 시종이었다. 위스는 연회가 시작 때 팔라틴 왕 곁에서 이 얼굴을 봤다.
시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단둘이 나눌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숨겨 온 약점이 공개되길 바라지 않으면 조용히 따라오라’고 전하셨습니다.”
위스가 당연히 따라올 거라는 듯 그는 몸을 돌렸다.
“……?”
‘그게 뭔데.’
위스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시종을 따라 움직였다.
어디서든 몸 하나 못 빼내겠는가?
‘그 새끼 X밥이던데.’
무슨 자신으로 위스를 독대하겠다는 건지 모를 일이다.
공개되면 곤란해질 비밀이라고 해 봤자 위스가 ‘위스미아’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인데…….
그걸 누가 믿냐?
팔라틴 왕도 안 믿을 소리다.
이게 문제의 약점이 아니라면, 팔라틴 왕이 쥔 건 위스의 약점이 아니다. ‘위스미아’의 약점이다.
그런데 위스미아는 약점이 너무 많은 인간이었다.
왕의 시종은 긴 복도를 빠져나가 어딘가로 위스를 안내했다.
왕성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위스는 돌아다니는 인기척을 통해 근방에 기사가 깔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위 기사 없이는 한 걸음도 못 걸을 새끼.’
“이곳입니다. 들어가십시오.”
시종이 멈춰 서서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한 사람의 인기척밖에 없었다.
위스는 잠시 서서 판단했다.
‘저 새끼를 죽이고 문제없이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겠군.’
시종이 재촉했다.
“안 들어가고 뭐 하십니까? 폐하를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널 보니 폐하께서 관대하심을 알겠다. 무슨 시종이 이렇게 시끄러우냐?”
“……!”
위스는 입을 벌린 시종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리엔델 왕은 일어나서 위스를 맞았다.
“오셨군.”
그가 팔을 벌려 위스를 환영했다.
“연회장에선 실례가 많았습니다. 기분 상하시지 않았다면 좋을 텐데요.”
‘약이라도 처먹었나.’
기분 상하게 하기 싫었으면 약점 쥐고 있으니 오라는 소리를 말아야 할 게 아닌가?
“아, 예.”
미소 띤 왕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러더니 그가 다시 웃었다. 기분 나쁘게 관대한 미소였다.
“자신만만하군, 왕자. 그럴 입장이 아닐 텐데.”
말투가 바뀌었다. 친하게 지내기는 글렀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실 말씀 하시죠.”
그러나 왕은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건방진 게 매력인가? 희한하단 말이야. 미인이긴 해도, 그놈이 정신 못 차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위스의 턱을 잡았다.
위스는 인내했다. 이 새끼가 뭐라고 지껄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눈동자가 독특하군. 본 적 없는 색이야. 거의 황금빛인데.”
왕이 중얼거렸다.
‘왜겠냐.’
위스는 왕을 응시했다.
마력을 운영하고 있어서다.
눈앞에 있는 게 폭탄인 줄도 모르고 왕이 품평했다.
“갑자기 입이 닫혔군. 이제야 두려움을 학습했나? 널 보호해 줄 사람이 없으니 건방진 혀도 굳어 버린 모양이군. 무슨 말이든 해 봐.”
“제 약점이 뭡니까?”
“목소리도 괜찮군. 노래는 좀 하나? 연주는? 팔라틴에서 귀족 가문의 안주인이라면 갖춰야 하는 교양이지.”
‘뭐 하냐.’
위스는 슬슬 불쾌해졌다.
“못합니다.”
“그럼 배워. 일 년 갈고닦으면 쓸 만해지겠지. 그 전에 사교계는 못 내보내겠어. 하기야 말버릇부터가 문제군.”
“폐하께서 절 사교계에 안 내보내신다고요.”
“그래.”
“그럴 권리가 없으실 텐데요.”
“아니. 있게 될 거야.”
왕이 위스의 턱을 좌우로 돌려가며 그의 얼굴을 훑어봤다.
“넌 나랑 결혼할 거니까.”
“……?”
‘돌았나.’
위스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왕의 손이 떨어졌다.
“저 이미 결혼했는데요.”
“아닐걸. 그놈도 네가 열성 오메가인 걸 아나?”
“……?”
위스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300년 사이 형질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알파와 오메가 형질도 후대에 또 다른 형질인을 생산할 확률에 따라 분류된다는 사실을 그가 알 리 없었다.
“고향으로 내려간 네 유모가 털어놓았어. 발정기에도 임신이 힘들다는 열성 형질에 몸도 약해서, 태어났을 때부터 걱정을 샀다고. 서머 왕이 왕국 내에서 결혼 상대를 찾으려 애를 쓰더니 그 이유 때문이었던 거야……. 후계도 갖기 힘든 열성 오메가를 다른 왕국에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리엔델 왕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한 약점이라도 잡았다는 투였다.
평생 임신 가능성 같은 건 상상해 본 적 없던 위스는 오히려 돋았던 소름이 가셨다.
그가 멀쩡한 오메가였다면 큰일 날 뻔한 일이 몇 번이나 있지 않았나?
‘임신 가능성이 없다고.’
다행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