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스 메리드 트러블 (47)화 (47/70)

16673018524065.jpg

#47

누군가를 움직이려면 그가 원하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가 원하는 걸 자신이 줄 수 있다고 유혹해야 하는 것이다.

치라 공작이 테오도어를 설득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에게 테오도어가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스는 훌륭했다.

곁에 붙어 팔을 잡아당기는 것만으로 테오도어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테오도어는 아니지 않는가.

위스가 테오도어에게 원하는 건 힘이었다. 그가 서머를 장악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힘이라면, 테오도어는 스스로의 권위만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리엔델은 다른 문제다.

테오도어는 리엔델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익숙했으나, 그 모습을 위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모습은 위스가 바라는 ‘힘 있는 배우자’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이용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건가.’

테오도어는 스스로의 생각에 실소가 나왔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다.

테오도어는 위스의 실망을 사고 싶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건.

그러나 위스가 팔라틴행을 원했다. 테오도어를 쥐어 팰 수 있었는데도 주먹을 내리고, 사랑스럽게 눈을 깜빡이면서.

테오도어는 그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방금 전까지 위스의 기분을 실컷 상하게 한 주제에, 테오도어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연회 날이 다가왔다.

⚜ ⚜ ⚜

아카젤 대공 부부를 위한 연회는 늦은 밤 시작됐다. 초청된 귀족들의 마차가 왕성 밖에 줄을 섰다. 수많은 사람이 초대된 거대한 연회다.

위스는 왕자궁 밖의 궁인들이 테오도어를 어떻게 대하는지 본 일이 있으므로, 팔라틴의 예법에 나름대로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팔라틴의 신기한 예법은 연회 날 절정에 달했다.

입장하려는 테오도어와 위스를 궁인들이 막아선 것이다.

“먼저 오신 분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계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난하냐.’

위스는 궁인을 쳐다봤다.

대공 부부를 환영하는 연회인데 대공이 입장을 기다려야 한다고?

“아, 대공 전하. 위스미아 왕자 전하. 이제 입장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

궁인이 뻔뻔하게 말했다. 위스는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었다.

말없이 대공의 팔짱을 끼자, 문 앞에 서 있던 궁인이 두 사람의 입장을 알렸다.

“아카젤 대공 부부 입장하십니다!”

그들이 들어가자 연회장이 싸해졌다.

위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왜 벌써 앉아 있냐.’

팔라틴 왕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자리는 비어 있다.

그는 테오도어가 들어오는 모습을 턱을 괴고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서머를 정벌하라고 명령한 왕.

그가 위스의 적이었다.

기대하던 것에 비해 인상은 평범했고, 조금 병약해 보였다. 신경질적인 미간 때문인지도 몰랐다.

왕이 대공을 외면하니 귀족들이 접근할 리가 없다. 위스와 테오도어는 자연스럽게 벽에 붙게 되었다.

귀족들이 그들을 힐끗거렸다.

호위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희 환영 못 받는 느낌인데요.”

“어.”

“팔라틴 무섭네요. 이럴 거면 왜 초대했대요?”

“죄송합니다.”

테오도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억, 아니요, 대공 전하께 사과를 들으려고 드린 말씀은 아닌데…….”

호위가 쩔쩔맸다.

테오도어는 왕이 앉은 곳을 보며 말했다.

“아마 오래 무시하시진 못할 겁니다. 인내심이 강한 분은 아니어서요.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위스는 픽 웃었다.

“왜요. 흥미로운데요.”

“……?”

“평소에도 이렇습니까?”

“‘평소에도’라는 말씀은…….”

“팔라틴은 기사 취급이 나쁜가 해서요. 대륙 정벌을 하고 돌아온 기사라면 서머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업고 뛰려 들었을 텐데요. 제레미아 왕…… 아바마마께서 가장 먼저 업어 주셨을걸요.”

“그것도 부담스럽군요.”

테오도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다리면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겁니다. ……리엔델 폐하께서 하시는 건 아니겠지만.”

“……?”

위스가 의아해하는데 주변 기류가 바뀌었다. 귀족들이 조금씩 움직이며 고개를 숙이고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왕이 지나갈 길을 만들고 있었다. 팔라틴 왕이 일어났다.

뎅뎅뎅뎅!

그가 은식기로 유리잔을 두드려 주목을 모았다.

“충성스러운 내 동생이 돌아왔군.”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대륙 제일의 기사, 충실하고 명예로운 아카젤 대공을 위해 건배.”

“건배!”

왕이 잔을 들어 올리자 모든 귀족이 따라 들었다.

테오도어도 들어 올렸으나 위스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있었다.

‘입만 살았군.’

충실하고 명예로운 기사인 동생이 왕의 뜻에 반할 리 없지 않은가?

긴 출정을 마치고 돌아온 동생을 맞이하지도 않은 주제에 이득이 될 말은 잘도 챙겼다.

본인이 선창을 해 놓고, 왕은 잔을 비우지도 않았다. 그가 술잔을 손에 든 채 테오도어가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얼굴이 좋구나.”

왕이 테오도어에게 말했다.

그게 첫인사였다.

“폐하께서도 강건해 보여 다행입니다.”

테오도어는 지성인다운 인사를 돌려줬으나, 왕은 점잖은 인간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부왕께서도 네가 폭력에 능하고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감탄하셨지. 기사가 네 천직이구나. 그 재주로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리품을 손에 넣었으니 무엇이 부럽겠느냐?”

그가 위스를 보며 말했다.

‘미친놈인가?’

이 새끼가 위스를 전리품 취급하고 있다.

“과찬이십니다.”

“아니, 아니지. 그렇게 말하면 네 부인에 대한 찬사가 무색해지지 않으냐? 하여간 재주가 좋아. 너처럼 말재주 없는 놈이 결혼은 어떻게 했는지.”

왕이 뒤늦게 위스에게 알은척했다.

“왕국을 선물한 부인이라면 선 자리에서 시를 지어 바쳐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위스미아 전하?”

“하지만 저는 대공과 결혼해 좋습니다. 대공께서는 말씀해 주신 대로 대륙 제일의 기사이시니까요.”

위스는 수줍게 말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그 위용에 감탄했습니다. 이런 분께 왕관이 없다니 팔라틴은 대단한 곳이구나, 얼마나 뛰어난 분이 많으실까 생각했는데요. 역시 이곳을 둘러보아도 대공만 한 분이 없으니 저는 결혼을 잘한 듯합니다.”

“전하.”

테오도어가 위스를 잡았다.

입 닫으라는 신호에도 위스는 눈치 없는 척 생글생글 웃으며 지껄였다.

“보세요. 이렇게 챙겨 주신다니까요. 대공께서는 저를 칭찬하는 말에 동조를 안 해 주셨지만, 저는 대공을 칭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서머에서는 솔직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치니까요.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너보다 이 새끼가 더 왕 자격 있고, 최고의 기사인 데다가 최고의 신랑감이니, 너 따위는 비교도 안 된다.’는 말을 이 자리에서 못 알아들을 사람이 없었다.

‘위스미아가 사랑에 미친놈이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일 수 있는 건 편하군.’

멍청한 놈에게 화를 내 봐야 자기만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겠는가?

위스미아의 지능이야 온 대륙에 소문나 있다.

팔라틴 왕은 열등감에 찌든 새끼였으나 뇌를 팔아먹은 놈은 아닐 터였다.

‘아니어도 상관없고.’

왕은 뺨이 창백해져서 위스를 노려봤다.

주변이 조용했다.

위스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테오도어가 손에 힘을 주고 위스를 뒤로 끌어당기고 있다.

위스는 버티려고 했으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테오도어가 위스와 왕 사이에 섰다.

“위스미아 전하께서는 순진한 분이라 농담을 모르십니다.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폐하.”

테오도어가 정리를 시도했다.

왕은 여전히 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신 모양이군. 팔라틴의 사교 인사를 알려 드려야겠어.”

그가 들고 있던 잔을 내밀더니, 시중을 들던 궁인에게 명령했다.

“전하의 잔이 비었잖아. 채워 드려라.”

“예.”

궁인이 재빨리 위스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건배합시다.”

왕이 제안했다.

-폐하께서 주는 음식은 드시지 마십시오.

위스는 테오도어의 경고를 떠올렸다. 그러나 왕은 위스의 잔에 멋대로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 쨍, 하고 유리가 울렸다.

“팔라틴과 서머의 우정을 위해.”

왕이 자신의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눈은 위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시자.’

위스는 판단했다.

저 새끼가 싸움을 걸어오지 않는가?

위스는 걸려온 싸움을 피해 본 역사가 없었다.

마력이 체내를 빠르게 돌며 몸에 부하를 가했다. 위스의 눈이 밝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 빛은 샹들리에 조명에 반사되어 눈에 띄지 않았다. 마주 보고 있던 왕만이 위화감을 느꼈을 뿐이다.

왕이 멈칫했다.

그 순간 테오도어가 위스의 잔을 빼앗아 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와인을 다 마시더니, 궁인이 들고 있던 쟁반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너무하시는군요. 출정을 마치고 돌아온 동생에게는 권하지 않으시더니.”

테오도어가 웃으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