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테오도어는 위스가 가린 곳을 뚫어져라 쳐다봤으나, 다시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팔라틴에 가면…….”
“…….”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그가 말한 대로 사무적인 얘기였다.
“예.”
“사교계에 진입하면 접근하는 귀족이 많을 겁니다. 그들을 경계하십시오.”
테오도어는 무감정한 어조로 뻔한 얘기를 했다.
위스 자신의 신분도 신분이거니와 그는 대공의 배우자이기까지 했다. 팔라틴 왕성에 도착하는 순간 화제의 주인공이 될 터였다.
“그 가운데에는 외모와 됨됨이가 괜찮은 자들도 있을 겁니다.”
“그들을 잘 걸러내서 어울립니까?”
“아니오.”
“……?”
“전부 무시하십시오.”
그러더니 테오도어는 살짝 웃었다.
“전하께서 잘 지으시는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대화에 심드렁하게 반응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좋다’는 게 무슨 뜻인가? 위스는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물었다.
“팔라틴 사교계에서 공적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친구 없으십니까?”
“절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듯합니다.”
“……대공께서는 친구로 생각 안 하시고요?”
“저도 친구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 건지 모르겠다. 위스가 미간을 좁혔다.
“저 수수께끼 싫어하는데요. 이게 무슨 사무적인 대화입니까?”
테오도어는 위스의 손을 잡더니 설명을 이어 갔다. 위스는 손등을 만지작거리는 손놀림이 신경에 거슬렸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필요한 절차입니다. ……전하께서는 믿을 수 없는 분이니까요.”
위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움직임을 멈췄다. 숨도 멈추고 테오도어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조금 웃고 있었다.
“전하께선 얼마 전까지 사랑하는 애인이 있으셨고, 그러다 갑자기 또 저를 사랑하게 되시기도 하는 분인데……. 팔라틴 사교계에서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저는 마음이 아플 겁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위스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였다.
‘저 헛소리 틈만 나면 무기로 써먹는군.’
그러나 위스의 입으로 한 말이다. 이미 내뱉은 이상 상대방이 명분으로 써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예. 저는 싫습니다. 저만 사랑해 주셔야 합니다.”
“……당연히 그럴 겁니다.”
“그러니 제 친구들과 너무 친밀해지지 말아 주십시오. 원하신다면 제가 자리를 만들어 소개하겠습니다. 제 친구가 아닌 귀족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예.”
테오도어가 웃으며 위스의 손에 입을 맞췄다.
“지금까지는 반쯤 농담이었습니다만……. 역시 전하께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분은 리엔델 폐하입니다.”
‘장난하냐.’
위스는 테오도어의 손에 잡힌 주먹째로 그를 칠 뻔했으나 참았다.
“……압니다.”
“어쩌면 리엔델 폐하께서는 전하를 다정하게 대하실지도 모릅니다.”
위스는 의아해졌다.
“이제 와서 잘해 준다고요.”
“예. 그분은 서머를 좋아하시니까요. 위스 대왕과 같은 정복자가 되는 게 어린 시절 꿈이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는 아이가 많지는 않겠지만, 폐하께서는 그걸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는 분이니까요. 제게 명령하실 때에도 위스 대왕의 정통성을 잇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요.”
위스는 ‘위스 대왕’이라는 단어가 들릴 때마다 솜털이 곤두섰다.
“전하께서 제 곁에 있는 걸 마음에 안 들어 하실 겁니다.”
서머의 후계자가 테오도어 곁에 붙어 있는 꼴을 보기 싫어할 거라는 얘기다.
“근데 왜 제게 잘해 줍니까?”
“전하께서 저보다 오히려 폐하와 더 가까워 보이길 원하실 테니까요. 그분은 남에게 보이는 것에 민감하십니다.”
“동생의 배우자가 자기랑 친해 보이면 추문 아닙니까?”
“팔라틴에서 그 정도는 추문 축에도 못 낍니다.”
‘그게 추문이 아니면 뭐냐.’
300년 후 세상은 어떻게 되어 버렸단 말인가? 위스는 신세대의 감각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테오도어가 턱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혹은, 오히려 반대로 행동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또 왜요. 전하랑 결혼한 제가 꼴 보기 싫으셔서요?”
“예. 예상하신 이유대로입니다.”
테오도어가 웃으며 대꾸했다.
‘뭐 하는 새끼냐, 그건.’
다시 말하면 팔라틴 왕은 같은 인물에게 정반대로 반응할지도 모르는 인간이라는 뜻이었는데, 테오도어는 스스로가 특별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 듯했다.
위스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상한 분인 것 같은데요.”
“그렇다기보다, 인간적인 분입니다.”
위스가 모르는 사이 ‘인간적인’의 정의가 바뀐 모양이었다.
테오도어의 눈물 나는 가족애는 아무래도 좋았다.
“팔라틴 왕이 제게 괜히 살갑게 굴거나 잡아먹으려 들지도 모른다고요. 알겠습니다. 더 하실 경고 있습니까?”
“아, 하나 더……. 폐하께서 주는 음식은 드시지 마십시오.”
“못 먹을 거라도 주십니까?”
“예.”
대답이 시원스레 나왔다.
‘독살 시도도 했냐.’
위스는 새삼스레 테오도어를 쳐다봤다.
하기야 그를 죽이기 위해 마법사까지 끌어들였을 정도다. 그 전에 안 해 본 시도가 없었을 것이다.
‘잘도 살아 있군.’
그런데도 테오도어는 왕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는 이제 위스의 손톱을 매만지고 있었다. 매끄럽고 얇은 부분이 남에게 부드럽게 쓰다듬어지는 감각이 간지럽고 이상했다.
테오도어의 손은 크고 단단했고, 검을 쥐는 손아귀는 굳은살로 덮여 있었다.
그에 비해 위스미아의 손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생채기가 나 있을 뿐, 희고 말랑말랑했다.
거친 손이 부드러운 살결을 조심히 쓰다듬고 있었다. 상처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위스는 잠시 테오도어의 손을 응시하다가 물었다.
“원망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리엔델을?”
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어를 부추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위스는 보복하는 인간이었다. 그가 그러지 않았다면 이미 노예 시절에 어딘가 망가졌을 것이다.
곱상한 노예 소년이, 매일 밤 어디로 끌려가지 않고 일 노예로만 살 수 있었던 건 그가 보복했기 때문이다.
위스가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 나이 많은 노예가 위스를 덮쳤다. 위스는 반항하다가 얼굴에 피멍이 들었다.
며칠 뒤 그 노예는 물레방앗간 뒤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그 뒤로 위스를 만지려 드는 노예는 사라졌다.
‘원한이 없을 수가 있나.’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다.
테오도어는 생각하는 듯했다.
“원망도 하지 않을 만큼 대인배는 아닙니다.”
‘아니. 넌 쓸데없이 관대한 게 맞고.’
“하지만 리엔델은 제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고…….”
“…….”
“불쌍하니까요.”
“……?”
위스는 귀를 의심했다.
“팔라틴 왕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테오도어가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비교당해 왔으니까요. 리엔델이 삐뚤어진 것도 이해가 갑니다. 늘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거라는 불안감에 떨며 살아왔으니까요. 조금 심하다 싶다가도, 역시 불쌍하기도 해서 그냥 넘어가게 되더군요.”
위스는 확신했다.
‘이 자식은 미친놈이다.’
머리가 어딘가 이상한 게 틀림없었다.
불쌍하다는 말이 저럴 때 쓰이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위스가 아는 불쌍한 형제는 제레미 정도였다.
제레미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겁은 많은데 생각이 짧다는 거였다.
그가 당연히 방어에 성공했어야 할 요지에서 대패했을 때, 신하들은 그를 처벌하라고 간청했다.
성문을 닫아걸고 버티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굳이 병사들을 끌고 나가 적에게 사로잡힌 건 이적 행위라는 주장이었다.
위스는 듣지 않았다.
대신 제레미를 후방으로 보냈다. 수도에서 나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제레미는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왕성에서만 머물던 제레미가 위스의 부인을 임신시켰을 때, 위스의 신하들은 제레미를 북쪽 탑에 평생 유폐하라고 간청했다.
위스는 삼 일간 제레미를 가뒀다.
그러나 삼 일 내내 제레미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 들었고, 결국 위스가 가서 그를 빼내는 수밖에 없었다.
제레미는 울면서 미안하다고 빌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그냥, 너무 외로워하기에 위로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처구니없는 놈이었으나 그는 위스의 유일한 형제였다.
제레미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닌가…….
‘아니, 사안이 다르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제레미는 위스의 목에 칼을 겨눈 적이 없었다.
위스의 턱밑까지 적군의 접근을 허용하거나, 위스의 명예와 체면을 바닥까지 실추시키곤 했으나 본의는 아니었다. 그 자신의 무능함까지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
변명할수록 점입가경이라 위스는 그만뒀다.
테오도어가 제정신이 아닌 것과 별개로 위스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헛소리 마라.’
누구를 이해하고 동정한단 말인가?
적의 얼굴을 확인하러 팔라틴으로 가는 주제에.
위스는 창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려다가 테오도어의 손에 머리를 찧었다.
“전하?”
“깜빡 졸아서요.”
“그냥 주무십시오.”
테오도어가 커튼을 다시 쳤다. 그리고 서류를 들었다.
‘글씨가 보이나.’
어두워진 마차 안에 누워 위스는 인상을 썼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팔라틴으로 떠나기 전부터 느끼던 찜찜한 감정이 가슴 아래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