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팔라틴으로 떠나는 날 아침은 하늘이 맑았다. 서머야 사시사철 해가 좋지만, 적당히 구름이 흐르고 있어 말에게나 사람에게나 기분 좋은 날씨였다.
위스는 마차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호위가 짐 가방 여러 개를 짐마차에 올리고 있었다.
“마차 좀 살살 몰아 달라고. 안에 중요한 게 들어 있으니까.”
“예에, 걱정 마십시오.”
마부가 넉살 좋게 대답했다. 위스의 짐 가방이려니 여기는 기색이었다.
위스의 짐은 저것보다 적었다.
“너는 집을 옮기려는 모양이구나.”
“전하 여행 안 가 보셨습니까?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시간 없어서 덜 챙긴 거라고요.”
호위가 투덜거렸다.
“전하께선 그 짐으로 괜찮으십니까? 나중에 저한테 도움 요청하셔도 곤란합니다.”
“일 없다.”
호위가 다른 마차로 사라지자 다음에는 시저 남작이 다가왔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날씨가 참 좋군요! 여행을 떠나기 좋은 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전하께서 시일에 맞춰 건강을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햇살은 따듯하고 바람도 선선하니 온 세상이 팔라틴과 서머의 화합을 축하하는 듯합니다.”
“예.”
시저 남작은 본인이 위스를 구슬려 팔라틴행을 선택하게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공께서 위스미아 전하를 걱정하는 마음에 반대하시지만, 실은 팔라틴 사교계에 전하를 보이고 싶어 하실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입니다. 팔라틴 사교계에선 지금 대공의 짝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다들 몸살을 앓을 지경이랍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대공 같은 분께 추종자가 없었겠습니까? 물론 위스미아 전하께서도 추종자를 몰고 다니셨을 분이지만요. 서머 사교계에 ‘위스미아 전하는 이제 짝이 있다’고 알린 만큼 팔라틴 사교계에도 도장을 찍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제가 있는데 대공께 연심을 품은 사람을 남겨 두다니, 안 될 말이네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빨리 나아서 팔라틴으로 가야겠어요.
-정말 훌륭하십니다!
위스를 대하는 태도가 노골적이었다.
‘그렇게 믿어라.’
위스미아가 되어 좋은 점이 있다면 경계를 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개미 하나 죽이지 못할 외모인 데다 사랑에 미친 왕자라는 소문 탓도 있어서, 시저 남작을 비롯한 팔라틴의 사절단은 위스를 마음 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물론 서머의 왕자라는 점도 한몫할 터였다.
‘망할 제레미아 왕…….’
모든 짐을 싣자 마차가 출발했다.
위스가 시선을 둔 창으로 희미한 상이 비쳤다. 마차 맞은편에 앉은 테오도어였다.
“두꺼운 옷은 챙기셨습니까?”
“이 날씨에요?”
“팔라틴은 쌀쌀합니다. 일교차가 심할 때라 조심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위스는 몸을 움직이다가 테오도어의 발을 찼다. 바닥이 좁은 탓이었다.
두 사람이 탄 마차는 왕자 부부의 것인 만큼 크기도 크고 화려했다. 그러나 말이 끄는 물건이 커 봤자여서, 테오도어는 다리를 접어 앉기가 불편한 듯했다.
‘좌석을 한 면에만 붙여 놓으면 더 넓어지지 않나.’
위스는 마차의 구조에 의구심을 가졌다가, 서머 왕실에 테오도어만큼의 장신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테오도어의 가계야, 그 시조부터가 장신의 기사지만.
‘제레미가 작은 키였나.’
서 있는 모습을 본 지 오래라 기억나지 않았다.
제레미는 반란 분자의 테러로 인해 다리를 잃었다. 그가 극장에 들어가 있는 동안 누군가 밖에서 문을 잠그고 불을 지른 것이다.
그 일로 제레미는 걷지 못하게 되었고 부관 테오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북국 정벌 직후 일어난 일이었다. 북국의 공왕은 그 습격으로 위스와 측근들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위스에게 우정을 맹세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저지른 일이었다.
그는 바라던 바를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가 성공했다면, 위스는 유일한 혈육과 부관을 영원히 잃었을 터였다.
위스는 공왕과 그 핏줄을 전부 죽였다.
배반자에게 그가 저지른 짓을 그대로 돌려줬다.
위스는 그 이후 동맹을 믿지 않았다. 위스에게 승복해 우정을 약속한 왕국들은, 위스가 약해 보이면 언제고 이를 드러낼 자들이었다.
위스는 그들에게 자비를 보여 주지 않았다. 배반하면 보복당할 것임을 경고했다.
그들을 용서하기에 위스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마찬가지다.’
위스는 테오도어를 빤히 봤다.
기사의 전형 같은 잘생긴 남자는 능숙하게 서류를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재상과 시종장을 겸해 보는 것이 어때? 네가 나보다 더 왕성의 주인 같은데.
-폐하께서 안 읽으시니까 제가 읽고 있는 게 아닙니까. 방해하지 마십시오. 조금 있으면 요약해 달라고 하실 거 아닙니까.
-잘 아네.
마차에 둘이 앉아 있으려니 별생각이 다 든다.
위스는 창문에 이마를 박았다. 냉기가 열을 식혔다.
테오도어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피로하십니까?”
“예. 좀.”
“주무십시오. 여정이 깁니다. 지루하실 텐데요.”
-안 지루하게 놀아 주든가.
“놀아 주시든가요.”
위스는 무심코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신소리나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일하는 사람을 건드려 봤자 좋은 결과가 안 나오기도 했다.
-전하께서 도와주시면 놀아 드릴 시간이 날 것 같은데요…….
-말 걸지 말아 달라고?
-아시면서 그러시는군요.
그러나 테오도어는 서류를 놓고 일어났다. 그가 한 팔을 위스의 옆에 짚고 몸을 숙였다. 위스는 그의 아래 갇힌 꼴이 됐다.
“이러지 않으려고 일에 집중하고 있었던 건데요.”
“…….”
위스는 눈을 감았다. 테오도어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고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미친놈. 눈은 왜 감아.’
위스는 자신의 뺨을 한 대 갈기고 싶은 기분으로 테오도어를 올려다봤다.
테오도어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 주십시오.”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다시 입술이 따듯해졌다. 이번에는 윗입술을 가볍게, 깃털이 얹어진 것처럼 살짝 물었다 떨어졌다.
다시.
또다시.
위스는 새빨갛게 변해서 테오도어의 가슴팍을 쥐었다.
사람 감질나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할 거면 좀…….”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테오도어가 위스의 입안을 부드럽게 유영했다.
녹아내릴 것 같은 입맞춤을 받으며 위스는 등받이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어느새 좌석에 눕다시피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건 옷이 거의 벗겨질 즈음이었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예…….”
테오도어가 목에 입을 맞추며 웅얼거렸다.
‘뭐가 ‘예’냐.’
전혀 안 듣고 있지 않은가?
“밖에서 알아차릴 겁니다.”
테오도어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손만 움직였다.
촥.
커튼이 창을 덮었다.
“이제 안 보이겠군요.”
어두워진 마차 속에서 테오도어의 검은 머리가 움직이는 것만 보였다. 그럴 때마다 쾌감을 느끼는 부위가 점점 내려가면서, 피부는 더 예민해졌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뭐가 문제입니까?”
테오도어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위스는 이 수치스러운 말을 자기 입으로 해야 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안 멈출 것 같다.
“마차가 흔들릴 거 아닙니까……!”
“아.”
테오도어가 멈칫했다.
“안 흔들리게…… 조심히 해 볼까요.”
‘미친놈이.’
위스는 한 손으로 테오도어를 막고 다른 손으로는 마차 좌석을 붙드느라 고생이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좌석에 두 사람이 누우려니 균형 잡기도 힘들었다.
안 그래도 힘든데 상대가 헛소리까지 하고 있다. 위스가 짜증을 냈다.
“어떻게 하면 안 흔들리게 그 짓을 합니까?”
“……그 짓이라고 하니까 야하게 들리는군요.”
테오도어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맞붙은 하체가 이상하게 더 단단해졌다.
“아, 윽…….”
위스는 귀가 깨물리느라 테오도어의 입을 닥치게 할 수도 없었다.
위스를 짓누르고 있는 몸은 무겁고 단단했다. 맞붙은 곳을 비비며 예민한 부분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쾌감에 머리가 멍해져 있는데, 테오도어가 입술을 뗐다.
“……그만할까요.”
“그만……?”
위스는 멍하니 되물었다.
“그렇게 보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는데요…….”
테오도어는 입을 꾹 닫더니,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위스는 어리둥절해서 따라 몸을 세웠다. 해소되지 않은 흥분이 답답했다.
그러나 테오도어는 위스의 옷을 정돈해 주기만 했다. 그가 창문을 열었다.
숨 막히게 농밀한 체향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제야 테오도어가 숨을 쉬었다.
“……된 겁니까?”
위스는 흥분을 식히려고 애쓰며 물었다. 뭐가 ‘된 건’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테오도어는 한번 달라붙으면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는데, 평소와 다른 행동 양식을 보이고 있었다.
“예. 더 하면 중간에 멈추지 못할 것 같아서요.”
“……?”
그게 매번 테오도어가 하던 짓 아닌가?
“달리는 마차에서 하는 건 전하께 무리가 될 테니까…….”
위스는 뒤늦게 말뜻을 알아들었다. 위스미아가 허약해서 마차에서 그 짓을 하면 앓아누울 거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가 발끈했다.
“그런 약골이 어디 있습니까?”
“……안아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테오도어가 곤란한 듯 쳐다봤다.
“……제가 그런 약골이군요.”
위스는 수치심과 싸웠다.
테오도어가 웃는 게 보였다.
“그러지 마십시오. 정말 참기 힘듭니다.”
위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테오도어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힘들다는 듯 말했다.
“뭔가 사무적인 얘기를 할까요. 분위기 환기를 위해서.”
‘……?’
“예.”
테오도어가 다시 웃었다. 그러더니 위스를 탓하는 것처럼 쳐다봤다.
‘왜 혼자 처웃고 남 탓이냐.’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이라 위스는 한 손으로 목덜미를 방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