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테오도어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저자를 베란 소린가.’
생각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물론 그러란 소리는 아니었다. 팔라틴 왕의 심부름꾼을 지금 벨 수야 없다.
그런데 테오도어가 앞으로 나섰다. 검이 검집에서 매끄럽게 빠져나오더니, 시저 남작이 뭐라 하기도 전에 검끝이 그의 목을 찔렀다.
“……!”
“모욕에 대한 사과는?”
핏방울이 피부 위에 맺히더니 실선을 그리고 미끄러져 옷깃을 적셨다.
시저 남작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눈은 날카로운 검신에 닿은 채 크게 뜨여 있었다.
“사죄할 생각이 없나, 남작?”
테오도어가 물었다. 목소리가 차분해서, 누굴 해치거나 협박하는 게 아니라 그저 사실 확인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듣는 순간 위험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죄하지 않으면 목이 베인다.
“죄, 죄, 죄…….”
시저 남작이 입을 열었다. 입술이 바람 맞은 것처럼 떨리고, 목젖은 반사적으로 침을 삼키려 움직였다.
테오도어의 팔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시저 남작이 목젖을 꿀렁이는 바람에, 고정되어 있던 검 끝이 살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실선 같던 핏줄기는 이제 남작의 웃옷을 흠뻑 적실 정도였다.
“허어어어…….”
남작은 선 채로 기절한 듯했다. 말도 못 하고 굳어 있었다.
굳은 사람이 그 혼자만은 아니어서, 부관 예센도 테오도어를 말리지 못했다.
위스는 테오도어의 팔을 잡았다.
“대공.”
“전하를 모욕한 자를 멀쩡히 두다니, 제가 목숨보다 중요히 여기는 명예가 용납지 못할 일입니다.”
‘뭐라냐.’
대충 봐도 테오도어는 목숨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형이 아니었다.
위스는 그가 장단을 맞추고 있다고 확신하고 말리는 척을 계속했다.
“하지만 상대는 검도 못 쓰는 허약한 노인입니다. 저런 사람을 해치는 것도 대공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겠습니까?”
남작이 ‘허어억’ 하는 소리를 다시 냈다.
“……전하. 시저 남작은 저와 비슷한 시기에 작위를 받았습니다.”
“……아, 기사였습니까?”
“나이도 저와 비슷할 겁니다.”
“설마요.”
연기가 아니라 정말 놀라서 위스는 시저 남작을 쳐다봤다.
핏기가 빠져나갔던 남작의 얼굴이 다시 번들거렸다. 벗겨진 이마까지 붉어졌다.
테오도어가 검을 거뒀다. 철컥 하고 검이 수납되는 소리를 듣고서야 시저 남작은 주저앉았다.
“지, 지, 지금 이 행동을 폐하께서 아시면…….”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하네.”
테오도어가 장갑을 던졌다.
“무슨……?”
“전하께서는 천성이 다정하고 무르셔서 자신을 모욕한 자조차 걱정하시는군. 본래라면 그대를 처벌해야 할 일이나, 전하의 자비를 보아 넘어가겠네. 그대에게 목숨을 붙인 채 돌아가 폐하께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아니, 그게 무슨…….”
“이곳은 좁으니 나가지.”
“가,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시저 남작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친놈인가.’
대공에게 저따위 말을 지껄이고도 무사할 자신이 있나?
테오도어가 말한 ‘목숨을 붙인 채 돌아갈 기회’라는 건 결투에서 이길 경우를 뜻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결투에 응하면 시저 남작은 죽는다.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의문의 종착지는 시저 남작이 아니었다.
테오도어였다.
위스는 기만 죽여 놓을 생각이었으나 테오도어가 일을 키웠다.
축하 사절의 목을 날린 일로 팔라틴 왕이 분노한다면, 전쟁이다.
‘형제를 치는 일은 피하고 싶은 거 아니었나.’
테오도어의 짙푸른 눈동자가 싸늘했다.
위스는 문득 깨달았다. 테오도어는 정말로 분노하고 있다.
“그대가 걱정할 일은 아니군.”
“대, 대공 전하.”
“검을 소지하지 않았다면 내 것을 빌려주지.”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시저 남작도 같은 사실을 알아챘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과연 왕의 사절이 될 눈치였다.
테오도어는 만족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사죄하는 건가?”
“아! ……위스미아 전하!”
위스는 고개를 조아리는 남작 대신 테오도어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제 어리석음을 부디 자비로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대공 전하를 동경하는 마음이 커, 전하께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를 그리 잘 알고 있으니 그대는 현명한 사람이군. 어리석다니, 과례는 치우게.”
“……죄, 죄송합니다.”
“알면 됐네.”
‘만족한 건가?’
위스는 테오도어를 계속 살폈으나 도통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 직접 얼굴을 보고 꼭 말해야 했던 용건이 뭐지?”
쓸데없이 신경을 썼더니 위스는 슬슬 어지러웠다.
“아! 그게……. 리엔델 폐하께서 결혼을 축하하신다며, 두 분을 만나 뵙기를 고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포기를 모르시는군.”
테오도어가 말했다.
“보다시피 전하께서는 여린 분이시네. 폐하께도 장거리 여행을 견딜 수 없는 분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는데 그러시는군. 그대가 돌아가서 본 그대로 말씀드리게. 팔라틴으로는 갈 수 없다고. 폐하께서 축하하고자 하시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고.”
‘……?’
위스는 다시 테오도어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다른 감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공 전하……. 가시지 않으면, 폐하께서는 정말로…… 정말로 분노하실 겁니다.”
“그런가? 그분은 늘 내게 화나 계신 듯한데.”
“대공 전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평소와 다르십니다. 상황이 정말 좋지 않습니다.”
시저 남작이 침을 삼켰다.
“전하께서도 정말 몸이 좋지 않으시네.”
테오도어가 대답했다.
위스는 그의 팔을 치웠다.
“아니요. 대공께서 잘못 알고 계신 듯한데요.”
“……?”
“여행을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리엔델 폐하가 아픈 환자를 당장 부르실 분도 아니지 않습니까? 몸을 회복시키고 천천히 올라오라는 말씀이셨겠지요. 안 그런가?”
위스가 갑자기 편을 들자 시저 남작은 눈을 크게 떴다.
“예, 예! 물론 그렇습니다. 리엔델 폐하께서 그리 박정한 분이 아니시지요! 먼 곳에서 일어난 동생의 결혼을 참석하지 못해 안타까워하실 따름입니다. 대공 전하께서 위스미아 전하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걱정이 과해지신 모양입니다!”
“대공께서 그런 면이 있으시지.”
“지금 당장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스미아 전하께서 건강을 회복하시는 즉시 팔라틴을 방문하실 거라고요! 폐하께서 전하를 환영하는 연회를 크게 여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팔라틴의 모든 백성이 축복하겠지요.”
시저 남작은 테오도어가 반대할 틈도 없이 일정을 확정 짓더니, 위스에게 호의가 담긴 미소를 보냈다.
“대공께서 얼마나 전하를 사랑하시는지 이곳에서도 느껴집니다, 하하!”
위스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X발.’
시저 남작은 형질인이었다.
복도가 싸늘해졌다.
“전하.”
테오도어가 머리를 헝클었다. 위스는 수치심과 싸우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공께서 이제 제 거처를 결정하시는군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테오도어는 한숨을 쉬었다.
“전 팔라틴에 갈 것이냐는 질문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요.”
테오도어가 왜 위스를 보호하려 하는가? 왜 그를 대신해 화를 내는가? 왜 다른 사람들 눈에서 그를 감추려 들고, 그에게 달라붙지 못해 안달을 내는가?
‘지 오메가라는 거잖아.’
한 번도 당해 보지 못한 취급이라 상상이 미치질 않았다.
위스는 노예이던 시절보다 더 철저하게 소유물 취급받고 있었다!
“그건 거절해야만 하는 제안이었습니다.”
“전 거절한 적이 없고요.”
“위스미아.”
“대공께 제 이름을 허락한 기억도 없군요.”
테오도어가 한숨을 쉬었다.
“그곳에 당신을 데려다 놓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께…… 보이기 싫은 꼴을 보이게 될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꼴인지 전 보고 싶은데요.”
위스는 싸움을 각오했다.
그러나 테오도어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그러시겠지요.” 하고 대답했다.
“……식사는 혼자 하시는 게 좋겠군요.”
그가 사라졌다.
위스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 ⚜ ⚜
해가 중천이었다.
노예 테오는 망루 위에 서 있었다. 먼 지평선을 바라보던 그가 불렀다.
“위스.”
“졸려? 교대할까?”
반쯤 졸고 있던 노예 위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노예가 아니지.’
테오도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도망 노예였다. 스스로는 ‘자유민’라고 부르는 집단이었다.
자유민 테오가 말했다.
“이제 반말하지 말까.”
“뭔 소리야.”
“네가 대장이잖아.”
“뭐라는 건데?”
위스는 얼굴을 소매로 문질렀다. 잠이 좀 깨자 테오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말끔하고 잘생긴 얼굴의 소년이었다.
얼굴에 화상이 없다.
‘얘한테 왜 화상이 있어?’
위스는 자신의 생각에 놀랐다. 그러면서도 테오의 얼굴이 누구를 닮았다고 느꼈다.
테오가 말했다.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어.”
“어.”
“널 보고 모인 거야. 더 늘어날걸.”
“그럼 좋지.”
“네가 그 사람들을 통솔해야 해. 지금까지처럼은 안 돼.”
테오는 여전히 망루 아래를 보고 있었다. 위스는 그의 옆에 섰다.
몰려오는 행렬이 보였다. 병사가 아니다. 제각기 다른 복장을 입은 추레한 사람들이다.
그 수가 많았다.
도망 노예거나 영지를 떠나온 자들일 것이다.
어느 쪽이나 말로는 같았다. 끌려가 매질당하고 죽거나, 혹은 다시 목줄이 매인 채 사는 것이다.
그들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다. 위스와 테오처럼.
주인을 죽이고 노예 농장을 탈출하면서, 위스는 테오에게 약속했다.
-우리 집을 갖자. 내가 만들어 줄게.
“대장.”
테오가 불렀다.
“우리에게 집을 만들어 주셔야죠. 저 사람들도 다 같이 살 집을 만들려면 등골이 빠지시겠어요.”
“하지 마. 무슨 존댓말이야.”
위스가 킥 웃었다. 이마로 테오의 어깨를 툭 치자 테오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러나 존댓말은 고치지 않았다.
그랬다. 그때부터였다. 테오가 위스의 부하가 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