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위스는 한 걸음 물러났다.
‘X발, 저게 왜 뚫려.’
피넥 남작의 몸으로 확인했으니 경계 마법이 잘못 설치된 건 아니다.
그런데도 테오도어에겐 작동하지 않았다. 위스와 테오도어의 실력에 그 정도의 격차가 있다는 말인가?
“제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질문은 제가 먼저 드렸습니다. 제가 나가기만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테오도어가 다가왔다. 위스는 벽까지 내몰렸다.
‘아니, 근데.’
찬 벽에 등을 대고 있으려니 갑자기 열이 받았다. 그가 왜 이놈에게 추궁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피넥 남작이 의처증 걸린 놈 바라보듯 테오도어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화를 돋웠다.
“제가 어딜 가든 대공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닐 텐데요. 여기 제 궁입니다.”
“전하께선 신관이 보증한 병자시고요.”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피를 흘리고 계십니까?”
테오도어가 위스의 턱을 쥐었다.
“일이 하고 싶으시대서 침실까지 일거리를 가져가 읽어 드렸습니다. 인형을 보호하고 싶어 하시기에 이 부근을 출입 금지 구역으로 삼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제가 전하와 한 약속을 어긴 것이 있습니까? 단 하나 부탁을 들어주시기가 그리도 힘드셨습니까?”
“놓으십시오.”
위스는 테오도어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위스의 팔만 부들부들 떨렸다.
“제가 애원하지 않았습니까? 먼저 전하를 챙기시라고. 제 말이 전하께는 그리도 가볍습니까?”
“이거 놓으랬지.”
위스의 손톱이 테오도어의 손을 파고들었다. 피가 비치는데도 테오도어는 손을 떼어 내지 않았다.
완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마법을 쓰지 않으면…….
그러나 테오도어에게 상해를 입힐 정도의 마법을 공방이 버텨 낼 리가 없었다.
위스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타인이 자신의 의사를 강제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기분에.
그는 테오도어에게 힘으로도, 혹은 권력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길 수 없었다.
노예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솜털이 곤두서고 피가 거꾸로 돌았다.
“제게 청혼한 분은 전하이십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셨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내가 너에게 내 목줄을 쥐여 주었느냐? 나를 통제할 권리를 주었어?”
테오도어가 손을 떼어 냈다. 그러더니 위스의 손을 움켜쥐었다.
위스는 자신의 손톱 밑으로 피가 흐르는 것도 몰랐다.
“……제게 전하를 걱정하고 보호할 권리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마음대로 걱정해! 누가 하지 말라더냐? 침대에서 바보 같은 놀음에 어울려 주는 걸로 부족했어?”
“아니오, 전하. 제 말을 이해 못 하시는군요.”
위스를 이를 갈았다.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테오도어에게 잡힌 손을 빼낼 수 없고, 입안은 쇠 맛이 감돌았다. 현기증이 났다.
“전하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해도, 제게는 그 모든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슨…….”
“저를 사랑하니 결혼해 달라고 하셨지요. 제게 더는 거짓말을 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저희는 부부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시작한 관계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테오도어는 위스의 손끝에 입을 맞췄다. 위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반쯤 깨어진 손톱이 아팠다. 그곳에서 도는 피가 심장 어디쯤을 찌르는 것 같았다.
“저를 계속 이용하려면, 절 사랑하는 척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스는 아연해져서 테오도어를 올려다봤다. 대체 자신에게 뭘 바라고 있는 건가?
테오도어의 입술이 위스의 턱을 핥고 올라왔다. 위스의 입술을 열어 안을 휘감았다.
피 맛 나는 키스였다.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테오도어가 눈을 감지 않고 위스를 노려봐서, 위스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위스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몰아붙여졌다. 발밑에 닿는 것이 사라진다 했더니 그의 몸이 번쩍 들렸다.
“아……!”
“팔을 두르십시오.”
말하느라 잠깐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붙었다.
테오도어는 작업대 위에 있던 물건을 다 바닥으로 쓸어버리고 그 위에 위스를 올려놓았다.
누가 치우라고 저 난리인가?
그러나 불만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테오도어는 키스를 잘했다. 인생 경력 대부분을 기사들 틈에서 지낸 놈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입을 맞댄 채 테오도어가 옷을 벗었다. 재주도 좋았다.
위스는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앞의 광경이 바뀌는 게 멍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테오도어의 뒤로 피넥 남작이 기어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놈에게 이 꼴을 다 보였단 말인가?
위스는 테오도어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했다. 손가락이 바르작거리며 테오도어의 가슴을 간질였다.
‘저 새끼 잡아.’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테오도어는 꿈쩍하지 않았다.
미친 소리나 할 뿐이었다.
“밀어내지 말고…… 쓰다듬어 주셔야지요.”
“닥……!”
닥치지 못해, 라는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소리가 삼켜졌다.
입술까지 다른 사람의 기관이 되어, 온전히 소유권을 맡긴 느낌이었다.
공방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위스는 나가며 경악한 표정으로 이곳을 돌아보는 남작의 표정을 목격했다고 확신했다.
문이 닫히자 테오도어는 더 참지 않았다.
피부가 오싹오싹했다.
지금까지가 참은 거였다는 사실이 위스는 믿기지 않았다.
다리의 힘이 풀렸다. 움츠러들어 있던 몸이 열리며 페로몬이 멋대로 빠져나갔다.
위스는 이제 타인을 페로몬을 느낄 수도 있었다.
‘향이…….’
짙고 싸한 숲의 향 같은 것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위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모래밭 같은 곳에 빠진 채 속절없이 파도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핥아지다가, 못 참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해방됐다.
온몸이 녹아내려서 저항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꼼짝없이 붙잡혀서 의지를 제한당하고 있다.
“응…… 싫…….”
“싫으십니까?”
테오도어가 입술을 훑으며 물었다. 목소리가 쉰 듯이 낮았다.
“싫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페로몬이 짙었다. 의식이 몽롱할 정도로 풀어져 있다.
모든 방법을 잃고 테오도어에게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아까 언쟁의 연장선상인 것 같아서, 위스는 견딜 수 없었다.
저항하고 싶은데 방도가 없다.
끔찍하게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다는 게 싫었다.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냐……. 싫어어…….”
위스는 눈물을 글썽하며 테오도어의 가슴을 긁었다.
테오도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고 한 번만 말씀해 주세요.”
입술이 떨어졌다. 안을 휘젓던 게 사라지자 위스는 좀 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싫어, 이거 놔, 내려놓고 꺼져…….”
“후.”
테오도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위스는 그에게 꽉 끌어안겨서 숨이 막혔다.
“정말 듣기 좋은 말씀만 하시는군요.”
“자, 잠깐만…….”
테오도어가 귀를 깨물었다.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귀가 간지러워서 위스는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몸은 테오도어에게 붙들려 있었다.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그의 손이 예민한 곳을 건드렸다.
“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아…….”
“저도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아……!”
더듬던 손이 대담하게 움직였다. 위스는 테오도어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단단한 팔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위스의 저항을 무위로 만들었다.
“응……! 아! 잠깐…….”
위스는 참지 못했다. 너무 큰 자극이었다. 이런 짓은 당해 본 역사가 없다.
“내가, 잠깐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하자, 테오도어는 천장을 쳐다봤다.
“키스해 주십시오.”
“내가…….”
“예. 다음에는 ‘잠깐만’ ‘천천히’ 하겠습니다.”
테오도어가 어린애 달래듯 속삭였다. 위스는 그따위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이놈이 누굴 속이려는 건가?
울면서 입술을 가져다 대자, 테오도어는 방심하고 눈을 감았다.
위스는 테오도어의 입술을 콱 깨물었다.
“…….”
“…….”
“아!”
“이런 게 취향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아니야! 아! 아파, ……응!”
위스는 온몸이 깨물렸다. 작업대 위에 올려진 채라 바닥에 발도 닿지 않았다. 그 상태로 버둥거리자 몸만 뒤집혔다.
흘러내린 담요가 위스의 팔을 칭칭 감았다. 스스로 결박한 꼴이 된 위스를 배로 눌러 놓고, 테오도어는 목덜미와 귓불과 발그레한 뺨을 마구 씹어 댔다.
페로몬에 취한 몸은 통증을 쾌감으로 받아들였다.
위스는 울면서도 억울했다. 그는 한 번 깨물었는데 이놈은 왜 그를 씹어 먹고 있는가?
테오도어의 손이 눈앞에 얼쩡거리고 있었다.
위스는 그걸 깨물었다.
테오도어가 멈칫했다.
“……더 해 보십시오.”
“내가 못 할 줄 아느냐?”
위스는 몸이 뒤집힌 채로 테오도어의 다리를 걷어찼다. 테오도어는 요령 좋게 피해서 위스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의 몸이 위스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꼼짝할 수 없게 된 위스는 팔을 뻗었다. 뭐라도 잡을 작정이었으나, 쓸 만한 건 진작 작업대 바닥으로 쓸려 나갔다.
“다 하셨습니까?”
“자, 잠깐만…….”
“예.”
테오도어의 입술이 위스의 목을 찍었다. 그가 이를 세우자, 등에서 간지러운 쾌감이 일었다. 위스는 눈만 크게 뜬 채 바르르 떨었다.
‘이 사기꾼이!’
‘잠깐만’이라고 하면 듣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믿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도 위스는 배신감을 느꼈다.
테오도어도 위스의 말은 믿지 않았으니 상황은 같았다.
그도 위스의 ‘잠깐만’이 정말로 멈추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의 사랑스러운 부인은 언제나 거짓말만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