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미묘한 분위기는 호위 때문에 깨졌다.
“저기, 신관님 도착했는데 들여보내지 말까요?”
그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치료받으시고, 지금부터 열이 떨어질 때까지 주무시는 겁니다. 잘 주무시고 계신지 확인하러 들르겠습니다.”
테오도어는 이불을 위스의 목 끝까지 올려 주고 일어났다. 말 안 듣는 애를 대하는 태도다.
위스는 황당했으나 테오도어가 나가도록 둘 순 없었다. 정말 밤까지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휴식을 취하는 것과 별개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옷이 붙잡힌 테오도어가 위스를 돌아봤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저 할 일 많은데요.”
테오도어는 다정하게 말했다.
“나중에 하십시오.”
“……붙잡아 놓은 귀족들 만나야 합니다. 그자들, 이해득실에는 상인 뺨치게 민감해서 왕성에 붙잡혀 있던 시간도 세금으로 치고 있을 텐데요.”
‘협상에서 불리하단 말이다.’
대공 시해 사건에 연루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던 귀족들도 슬슬 정신을 차릴 때였다.
조여 놨으니 좀 풀어 줘야 대화가 원활히 되지 않겠는가?
“저희 결혼 축의금이라고 생각하고 내라고 하시면 되겠군요.”
테오도어는 꿈쩍하지 않았다.
“축의금으로 받을 건 따로 있습니다.”
“……아. 벌써 생각해 두셨습니까?”
“예. 그건 만나서 받아 내야 하고요.”
테오도어가 위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드디어 말귀가 통하나.’
위스는 그 틈을 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테오도어의 손이 위스의 어깨를 눌러 부드럽게 다시 침대에 안착시켰다.
‘X발.’
“왜 제게 시킬 생각은 안 하십니까?”
“……저 대신 귀족들을 만나시겠다고요?”
“이런 일을 시키려 결혼하신 게 아닙니까?”
테오도어가 웃으며 말했다.
‘이 새끼가 꼽 주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군.’
위스는 슬슬 헷갈렸다.
“귀찮은 일일 텐데요.”
“설명 들을 게 많습니까?”
“예. 좀.”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위스는 영 찜찜했다. 말리고 있는 느낌이지 않은가?
“상단 가진 귀족들과 합자 논의도 해야 하고요.”
“제게 맡기기 불안하십니까?”
테오도어가 지적했다. 위스는 예의상 아니라고 해야 할까 싶었으나, 뭐라 하든 이놈은 신경 안 쓸 것 같았다.
“예.”
“그럼 이곳에서 일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지켜보시면 되겠군요.”
과연 테오도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대책이 괴이했다.
“……여기서요?”
“예. 이곳에 협탁도 있군요. 전하께서는 침대에 누워 쉴 수 있고 저는 일할 수 있으니 괜찮은 대안 같습니다.”
‘이놈은 무슨 생각이지?’
위스는 테오도어를 생경하게 쳐다봤다. 국정에 개입하려 저 난리인가 싶었는데, 자신이 곁에 있으면 멋대로 귀족들을 다루기는 힘들지 않은가?
“마음에 드십니까?”
테오도어가 미끄러진 물수건을 다시 위스의 이마에 올려 주며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위스가 떨떠름하게 말하자, 테오도어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부인의 일을 남편이 돕는 게 이상합니까?”
“…….”
위스는 할 말이 없었다.
⚜ ⚜ ⚜
테오도어는 정말로 짐을 싸들고 왔다. 그 짐에는 부관 예센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관에게 역시 ‘좀 더 쉬어라’라는 진단이나 받은 위스는 체온계를 문 채 이불을 둘둘 두르고 있었다.
“아……. 보고요.”
예센은 누구에게 보고를 드려야 하냐는 듯 위스와 테오도어를 번갈아 보다가, 둘 사이의 어느 지점을 애매하게 보는 걸로 마음을 정한 듯했다.
“마법사들은 여전합니다. 어제는 뒷산을 다시 오른 모양이던데요. 산을 평지로 만들 기세로 찾고 있던데 찾는 게 왜 안 나오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 병사들에게 수색 대충하라고 전해.”
테오도어가 말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애초에 저희 측 병사들은 의욕이 없긴 했습니다만……. 마법사들을 빨리 내보내고 싶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마법사들이 찾는 물건을 부인께서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군.”
“……예?”
예센은 어리둥절한 듯했다.
위스는 체온계를 뱉었다. 테오도어가 김이 오르는 차를 그에게 내밀었다.
위스가 말했다.
“어. 괜히 마법사들 좋은 일 해 줄 필요는 없지.”
“아니, 제가 이해가 잘……. 그 인형 전하께서 빼돌리셨습니까?”
“어.”
테오도어의 유능한 부관은 ‘왜요?’ 같은 쓸데없는 소리는 묻지 않았다. 그가 심각하게 물었다.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마법사들이 오래 머물수록 영지 부담도 늘고, 들킬 위험도 커질 듯한데요.”
“걔네가 남아 있으면 오히려 좋지. 성벽 보수하고 길도 좀 다듬고 싶었는데 이참에 처리해야겠군.”
“아……. 협력을 얻어 낼 자신이 있으시군요…….”
예센은 뭐라 더 못하고 그렇게만 말했다.
물론 위스는 자신이 있었다.
그보다 마법사들을 붙잡아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리고 그놈들이 있어야 인형 작동법도 캐내지 않겠어?”
위스는 차를 홀짝였다.
“인형…… 작동법이요?”
“마력 회로를 알아내면 인형을 작동하는 방법도 알아낼 수 있다고 추측하시더군.”
“그 인형 저희가 작동할 수 있다고요?”
예센이 흥분했다.
‘이거지.’
위스가 테오도어에게 바랐던 반응이었다. 사실 테오도어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라면 다 이렇게 반응할 터였다.
“마탑에서 아끼던 인형도 팔라틴 왕에게 빌려줄 정도로 둘 사이가 괜찮은 모양인데, 네 주인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잖아.”
팔라틴 왕이 테오도어를 습격하는 데 마탑의 힘을 빌렸다. 그 말은 또 마법사의 습격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역시 마탑이 왕과 공모한 겁니까? 대공 전하를 제거하려고? 그럼 큰일 난 거 아닙니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위스는 두 손으로 찻잔을 쥔 채 픽 웃었다. 차의 열기가 그의 얼굴을 데워 코가 불그스름했다.
“둘 사이가 그렇게까지 좋을 리 없지. 애초에 마법사들이 대공을 진짜로 제거하고 싶었으면 인형 하나 빌려줬을 리가 없고.”
평범한 기사라면 모를까, 표적이 테오도어다.
마법사들이 돌아 버리지 않고서야 그 정도 지원에 그쳤겠는가?
“인형을 회수하러 요란하게도 온 걸 보니 열 좀 받은 모양인데. 괜찮았던 둘 사이도 지금 삐걱거리고 있지 않겠어?”
같이 일하던 두 놈 사이를 갈라놓고 싶으면 그 일을 실패하게 만들면 된다.
이 경우 테오도어를 습격하고 싶어 하는 쪽은 팔라틴 왕이고, 마탑은 대가를 받고 협력한 쪽일 것이다.
테오도어가 설명하지 않았는가? 마탑은 필요하면 ‘힘을 빌려준다’고.
‘자부심이 엄청난 놈들인데, 이번 실패가 속 쓰리지 않을 리 없지.’
그렇다면 마탑에서는 누구 탓을 하고 있겠는가?
‘멍청하게 일을 실패시킨 팔라틴 왕이다.’
예센의 눈이 커졌다.
“그런 상황에 마법사들이 서머 성에 상주하면…….”
“팔라틴 왕은 고깝겠지.”
“마법사들과 관계가 나빠지겠군요?”
“거기에 인형을 작동시켜 팔라틴 왕에게 보내면 일이 재미있어질걸.”
위스는 테오도어를 쳐다봤다.
‘어떠냐.’
목숨의 위협을 받고도 충성하는 놈은 없다. 기르는 개도 주인의 손을 물 것이다.
하물며 인간인 이놈이 진심으로 팔라틴 왕에게 충성하겠는가?
‘네 위험 부담을 반으로 줄여 줬다.’
이만하면 복수심이 고개를 들지 않겠는가?
마법사들을 서머에 상주시키는 데는 또 다른 이점이 있었다. 팔라틴 왕과 마탑을 이간질하고, 테오도어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팔라틴 내에서 테오도어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니, 협력자를 찾기도 쉬울 터였다.
테오도어가 힘이 부족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면, 이만한 기회가 없다.
“전하……!”
예센은 위스가 허락만 하면 그를 찬양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가 테오도어를 돌아봤다.
위스는 그 반응에서 테오도어 휘하의 기사들은 팔라틴 왕에게 불만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기야 어지간한 호구 새끼가 아닌 이상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제 걱정을 하고 계셨습니까?”
테오도어는 대단한 호구 새끼였다.
‘X발.’
지금 맥락에서 나올 대답이 그게 아니지 않나?
“염려를 끼쳐 드렸군요.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리엔델은 반드시 보복하고자 할 테니까요. 상대가 마탑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세력이 내분을 일으키면 대공 전하께는 좋은 일이잖습니까……!”
예센이 목소리를 낮춰 애원했다.
‘텄군.’
위스는 아찔했다. 부관과 테오도어의 반응이 여상한 게 이런 대화가 한두 번 진행됐던 분위기가 아니다.
테오도어가 웃었다.
“내가 살자고 전쟁을 일으키라고?”
“……!”
예센이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위스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가 주먹을 내지르고 싶은 곳이 허공이 아닌 테오도어의 명치라는 점만 달랐다.
이 새끼는 왜 쓸데없이 사람이 됐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