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테오.”
위스는 눈을 떴다.
손아귀에 뭐가 잡혀 있었다. 보니 옷자락이었다.
옷의 주인인 호위는 졸다가 깬 모양이었다.
“억, 전하. 일어나셨어요?”
“넌 왜 여기 있느냐?”
“아, 그야 전하께서 일어나시면 연락하라고 명령받아서죠. 삼 일을 못 깬 거 알고 계세요? 대공께서 절 흰 눈으로 쳐다보고 가시던데요. 전하께서 못 일어나시는 게 제 탓도 아닌데 참 억울하고 그렇습니다.”
위스는 몸을 내려다봤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몸이 무겁고 전체적으로 뜨거운 게 열이 있는 듯했다.
‘신관을 불렀나.’
힐이 만능은 아니었다. 인체의 치유력을 가속화하는 방식이라 남용하면 몸에 부하가 갔다.
“근데 어쩌다 또 다치셨어요?”
“엎어졌다.”
“또요? 마가 끼었나. 몸이 성할 날이 없으시네요. 아니, 근데 어디를 가시게요?”
“산책.”
“어어? 나가시면 안 되는데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주인의 앞길을 막는 종복은 듣도 보도 못 했다.
위스가 황당해서 호위를 쳐다보는데 또 문이 열렸다. 궁인이 물이 든 대야와 새 수건을 가지고 들어오다 위스를 보고 놀랐다.
“어? 전하, 일어나셨어요?”
“막 일어나셔서 산책 가신답니다.”
“어어? 어디를요? 가시면 안 돼요.”
궁인까지 가세했다.
“누구 앞을 막는 거냐?”
위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둘을 돌아보고 문으로 나갔다.
“어어어?”
“대공께서 못 나가게 막으라고 하셨는데요! 으악, 전하?”
“……누가 뭐라고 해?”
위스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왕자의 호위와 왕자궁의 궁인이 대공 명령을 듣고 왕자를 막고 있다는 소리인가?
“제가 부탁했습니다.”
테오도어가 들어왔다. 그는 궁인에게서 대야를 받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 몸으로 어디를 가려고 하셨습니까?”
“산책 가시려고 했답니다.”
호위가 고자질했다.
‘이 새끼가.’
테오도어가 물수건을 짜며 말했다.
“인형이라면 아직 무사합니다.”
“그거 건들지 마십시오.”
위스는 냉큼 대답했다.
“역시 찾으러 가려 하셨군요. 제 약속을 못 믿으시고.”
그런 건 아니었으나 위스는 입을 다물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마법을 의심하고 있었다.
‘저놈이 공방에 어떻게 들어왔지?’
임시로 만든 공방이라 해도, 어지간한 마법사는 뚫을 수 없게 경계를 둘러놓았다. 그런데 테오도어는 아무런 저항 없이 공방으로 들어와 인형을 공격했다.
마법사도 아닌 기사가 마법을 파훼했다는 건 이상하다.
‘설마.’
이 몸이 마력에 알레르기만 일으키는 게 아니라 아예 마력 회로 자체를 변형시키는 건가?
위스로서는 다시 확인해 봐야했다.
무엇보다 공방이 뚫렸다면 인형이 위험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인형을 감지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어쨌든 위스의 마법에 관련된 일이었다. 테오도어에게 털어놓을 바는 아니다.
“약속드린 대로 인형은 깨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일어나셨고 저도 그동안은 인형을 지켰으니 이제 부수러 가도 되겠군요.”
“……?”
위스는 테오도어가 주는 대로 이마에 수건을 얹고 있다가 눈을 번쩍 떴다.
‘뭐라는 거야.’
“인형 부수면 누가 상 줍니까?”
“상은 몰라도 전하께서 피 칠갑이 되어 있는 모습은 다시 안 보겠죠.”
“점막이 약해서 원래 피를 잘 흘립니다.”
“그 인형을 왜 보호하려 하십니까?”
테오도어가 팔짱을 꼈다.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바로 나가서 부수겠다는 태도였다.
위스는 방법을 바꿨다.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데 중요한 물건이라는 감 안 오십니까?”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으니 곧 찾게 되겠군요. 전하의 궁에서 인형이 나오면 그들이 전하를 적대시하리라는 걱정은 안 드십니까?”
“걔네 이미 적입니다.”
“……뭐라고요?”
“뭐, 누가 골렘을 훔쳐 가서 회수하러 왔단 말을 그럼 믿으셨습니까? 골렘의 크기가 자갈만 해서 어디 주머니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그 거대한 게 수십 개가 화분처럼 왕성 안에 심어져 있었는데 마탑의 개입이 없었겠습니까?”
테오도어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감탄하기까지 했다.
“역시 그렇군요. 마탑의 협조를 원하더니 리엔델이 성공한 모양입니다.”
위스는 이놈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마탑의 예언이 어쩌고 하더니 스스로는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다.
‘이놈도 성년을 훌쩍 넘긴 것 같지는 않은데…….’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진 않지만, 테오도어도 새파랗게 젊은 기사였다. 그 나이에 이룬 전공이 눈부셔 금방 깨닫기 어려울 뿐이다.
“하지만 그게 인형을 파괴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안 되는 것 같군요. 오히려 마탑이 적이라면 적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술 병기는 파괴해 두는 게 옳지 않습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군.’
위스는 열받는 한편 감탄했다. 이런 생산적인 대화를 얼마 만에 해 본단 말인가?
“제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아니면 지금 부수겠습니다.”
“대공의 명예가 그리도 가볍습니까? 제게 부수지 않겠다 이미 약속하시고 다시 협상에 올리십니까?”
위스는 이를 갈며 기사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명예를 입에 올렸다.
대공은 난처한 눈치였다.
“전하……. 그렇게 티를 내시면 제가 계속 그걸 협상에 써먹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했다.
위스는 기가 막혀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놈 고지식한 기사 아니었나?’
“인형을 부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인형이 전하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을 막고 마법사들이 전하를 적대하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더불어 전하께서 제게 화내느라 열 오른 몸으로 자꾸 논쟁하시는 것도 막을 수 있겠군요.”
테오도어가 얄밉게 굴었다.
위스는 물수건을 던져 버리고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물수건은 테오도어가 동물적인 반사 신경으로 잡아챘다.
“제가 쉬길 바라시면 논쟁 그만하고 같이 인형 보호할 방안이나 찾아 주시죠!”
“논쟁의 원인을 제거하면 논쟁도 사라질 텐데요.”
‘X발.’
이놈은 왜 말로 지지를 않는가?
위스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주인에게 왜 그런 명령을 내렸냐고 묻는 부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테오도어에게는 계속 변명과 설명을 할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는 위스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위스는 절반의 이유를 털어놓았다.
“인형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떻게 말입니까?”
“마력 패턴이 있습니다. ……마법사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인형은 특정 마법사만 조종할 수 있다고. 인형을 조종하는 특정 마력 패턴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군요.”
테오도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책에서 읽었습니다. 위스 대왕 서재에서.”
위스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을 참았다.
“어쨌든 패턴만 알면 인형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실험해 보던 중이었습니다.”
“실험이요?”
“예, 뭐. 인형을 좀 뜯어서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위스는 마도공학은 전혀 모르는 주제에 공학자처럼 말했다.
사실 마력으로 살펴보고 있었지만.
“……그렇게 봐서 알 수 있는 겁니까?”
“해 봐야 알겠죠.”
“그렇군요…….”
테오도어는 떨떠름한 듯 대답했다. 납득이 덜 된 듯해 위스는 덧붙였다.
“제가 좀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예…….”
“머리도 좋고요.”
“…….”
고개를 내젓던 테오도어가 이내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께선 항상 자신만만하시군요.”
“자신 없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납득한 것 같군.’
위스도 표정을 풀고 쿠션에 등을 기댔다. 테오도어가 웃으며 말했다.
“위험하지 않으면 돕겠습니다.”
“……위험의 기준이 뭡니까?”
“말씀드리기 저어되는군요.”
“……왜요?”
“말씀드리면 기준에 아슬아슬할 때까지 실험하실 것 같아서요.”
위스는 입을 닫았다.
‘머리 좋군.’
기사가 눈치까지 빠를 필요가 있나? 이놈은 좀 과하게 괜찮은 인재였다.
다시 테오도어를 가진 팔라틴 왕에게 배가 아파지려는데, 그가 말했다.
“그러니 위험을 감수하지 마십시오. ……제가 전하께서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부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도 인형을 부술 수 없으니, 위스에게 알아서 조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
위스는 등에서 힘을 뺐다.
‘이놈은 과하게 사람이 좋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는 계획을 재조정했다.
‘일단 공방 경계 마법만 재설치하고 연구는 내일 재개할까.’
열을 좀 떨어뜨리고 하면 마력이 몸에 주는 부담도 한결 덜할 것이다.
옆구리가 창에 찔려도 일을 했던 과거의 위스를 생각하면 대단히 여유로운 발상이었다.
‘육체의 성능이 떨어지니 어쩔 수 없나.’
위스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테오도어가 위스를 다시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신관이 괜찮다고 할 때까지 쉬십시오.”
“……신관들은 항상 안 괜찮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항상 안 괜찮은 상태셨던 거 아닙니까?”
테오도어가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니, 신관들 입버릇이 항상 휴식을 취해라, 잠을 자라, 뭐 그 난리인데…….”
“하루에 몇 시간 주무십니까?”
위스가 호위를 돌아봤다.
“내가 몇 시간이나 이 꼴로 있었느냐?”
호위는 어쩐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삼 일이요?”
“삼 일 밤낮을 잤다는군요.”
위스가 전달했다.
테오도어가 한숨을 쉬었다.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십시오. 평소에 말입니다.”
“알아서 충분히 잡니다.”
“안 주무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밤에 다시 오겠습니다.”
“뭐라고요?”
테오도어와 보낸 ‘밤’이 떠올라서 위스는 덜컥했다.
그 반응에 테오도어도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