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들은 리엔델 왕과 연결되어 있다고 의심되는 자들이었다.
그 이름을 왕자가 알 리가 없다. 예센은 서류에 그들의 이름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습격 주동자들이 그 귀족들에 대해 몰랐으니, 진술서에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서머의 귀족이라 한 배려는 아니군요. 리엔델 왕의 개입 사실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입니까?”
“대, 대공 전하! 대공 전하께서 이분께…….”
“말하지 않았다.”
대공은 왕자를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왕자가 말했다.
“그자들이 리엔델 왕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테오도어가 물었다.
예센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위스미아 왕자는 정치와 관련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정무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공식적인 자리에도 얼굴을 거의 비치지 않았다. 제레미아 왕이 왕자를 대하던 태도를 보면 제왕학을 제대로 가르쳤을 것 같지도 않다.
왕자는 서류를 넘기며 대답했다.
“봤습니다.”
“무엇을?”
“수도로 올라온 귀족들을요.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한 자들이 보여 알아봤습니다. 최근 씀씀이가 늘었다더군요.”
“그런 게 보이십니까?”
대공이 놀라 물었다.
“대공과 달리 한가한 처지여서요. 왕성 찾은 손님 구경 좀 했습니다.”
“대단하시군요.”
대공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러나 예센은 그럴 수 없었다.
“자, 잠시만요. 그렇게 보고 그냥 아셨다고요? 뭔가 수상하게 느껴지는 점이 더 있으셨겠죠! 왕성에 들어오는 귀족이 치장하는 거야 별일도 아니고…….”
“별일 맞습니다.”
“예?”
“그자들은 왕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고, 결혼 적령기 자녀도 없고, 근 몇 년간 자금 문제를 겪고 있었으니까.”
왕자는 다시 서류를 넘겼다.
‘지금 저거 읽으면서 대답 중인 건가?’
예센은 눈을 의심했다.
대공이 물었다.
“왜 저를 의심하진 않으셨습니까? 제가 그들을 뇌물로 포섭해 전쟁에 이용했다는 쪽이 더 쉬운 추측인데요.”
예센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는 다 읽은 서류를 내려놓고 대공을 쳐다봤다.
“안 그러셨지 않습니까.”
“예. 전 아닙니다.”
테오도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대답이 아니었다! 예센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끼어들었다.
“왜 리엔델 폐하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자들이 결혼식에 불참했으니까.”
‘그랬나?’
예센은 누가 참석했는지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나, 불참자들에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왕자는 대공에게 설명했다.
“본래 습격 결행일은 결혼식 당일이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그쪽이 리엔델 왕에게 이득이 되니까요.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왕이 서머 왕실과의 결합을 어째서 원했는지. 그분이 대공을 죽이고 싶어 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겠지만, 대공의 결혼을 종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을 텐데요.”
예센이 물었다.
“대공 전하가 서머 왕실과 혼인한 채 돌아가시는 걸 원했다는 말입니까?”
“그래.”
“아! 그렇게 되면 리엔델 왕은 서머 왕실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 테고…… 대공 전하의 공훈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겠군요!”
줄곧 의문으로 남아 있던 문제가 풀렸다. 예센은 놀라서 위스미아 왕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왕국을 버리고 애인과 도주하려 했던 왕자는 소름 끼치도록 훌륭한 정략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사랑의 도피 같은 짓을 저지르려 했을까?
“결혼 피로연이 야회 연회장에서 열리면, 정해진 대로 습격이 일어났을 테고……. 안에서 귀족 셋이 호응하고 있었다면 대공께서 달아날 길은 없었을 겁니다.”
왕자가 설명했다.
“하지만 습격일이 당겨지면서 일은 실패했고, 귀족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겁니다. 지시받은 대로라면 결혼식 날 일을 쳐야 할 텐데, 습격을 막아 낸 대공을 어찌할 자신도 없었을 테고. 결혼식에 참석하긴 힘들었겠죠.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든 겁에 질려서든.”
“습격일은 왜 옮긴 걸까요?”
예센은 누구보다 열의 있게 대화에 참여했다.
왕자는 잠시 싫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먼 곳에서 꾸민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법이 오히려 드물겠지.”
“하지만 이건 결행 시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습격이었을 텐데…….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골렘이라니, 상상도 못 한 물건이 나왔으니까요. 미친 리엔델 왕…….”
예센은 이를 갈았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기사들 앞에서 하듯이 왕을 욕하고 말했다.
그는 왕자가 놀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자들을 심문하지 않은 건 리엔델 왕 때문이 맞는군요.”
“그렇습니다.”
대공이 인정했다. 이번에는 예센도 막아서지 않았다.
“그럼 제가 잡겠습니다. 리엔델 폐하를 추궁하지 않는 선에서 처리하면 문제없겠죠.”
“잡겠다는 말씀은…….”
“적당히 털겠다고요. 서머의 귀족을 서머의 왕자가 처벌하는 건 팔라틴 왕가에서 관여할 일이 아닐 텐데요. 전 대공과 달리 관대하지 못해, 받은 원한은 갚아 줘야겠습니다. 그때 목숨을 위협받은 건 대공만이 아닙니다.”
예센은 답답한 속이 뚫리는 걸 느꼈다. 이 왕자는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말만 하고 있단 말인가?
예센의 상관이 받은 만큼의 반이라도 갚아 주는 분이었다면, 자신의 심혈관 기관은 지금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대공께도 도움이 됩니다.”
“제게요.”
대공이 웃었다.
“예. 서머 국고를 살찌우는 일이니까요.”
‘귀족들의 재산 환수!’
예센은 흥분 탓에 가슴이 뛰었다.
그래. 서머는 이제 대공의 땅이 되었다. 서머의 국고를 채우는 건 곧 대공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왕자의 말이 마음에 드는 것과 별개로 대공은 거부할 터였다.
대공은 충직한 기사였다. 결코 충성을 맹세한 왕에게 날을 세우지 않는다.
예센이 다시 침착해질 때였다.
“그렇게 할까요.”
대공이 대답했다.
“……?”
예센은 의문에 차 대공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가 위스미아 왕자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목격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맹세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를 이용할 권리를 드리겠다고.”
대공이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예센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사랑을 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그는 주춤거리며 침실을 빠져나갔다. 부부 중 누구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예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중 한 명이 대공이라는 점에서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 ⚜ ⚜
예센의 생각과 달리 당사자는 속이 편하지 못했다.
‘경고인가.’
위스는 테오도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며 생각했다.
테오도어가 이용할 권리 운운하는 걸 보니 뭐라고 눈치 주고 싶긴 한 모양이었다.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동맹이 유지되고 있다는 거였다.
첫날밤을 보낸 것으로 테오도어는 동맹을 깨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페로몬 조절하는 법을 가르쳐 위스가 외출할 수 있게 돕기도 했다.
애초에 그가 아니었다면 위스가 페로몬으로 곤란해질 일은 없었겠지만…….
“오오, 위스. 이런 좋은 날 대공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나를 만나러 와 주다니. 안 그래도 너를 떠나보낸 기분에 쓸쓸해하고 있었단다. 이제 네가 정말 팔라틴에 가 버리면 이 아비는 얼마나 외로울지 모르겠구나…….”
제레미아 왕은 위스를 환영했다. 그의 주변에 빈 술병이 굴러다녔다.
“약주가 과하신 것 같은데요.”
“다정하기도 하지. 걱정 말렴. 그렇게 많이 마시진 않았단다.”
제레미아 왕은 위스를 안으려다 휘청거렸다. 평소라면 모르는 척했겠으나 위스는 그를 부축했다. 그에게 받아야 할 약속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 건강을 챙기셔야죠.”
“그렇지. 손주를 볼 때까지는 정정해야지.”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스는 욕설을 참았다.
“예. 그러셔야죠. 안 그래도 신관에게 아바마마의 건강이 최근 크게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신 탓이겠지요. 제가 아바마마의 걱정에 한몫 보탠 듯해 죄송스럽습니다.”
“네가 내 걱정을 해 주다니, 어쩌면……. 아이가 결혼을 하면 철이 든다더니…….”
왕이 훌쩍였다. 위스는 이를 악물었다.
“신관은 아바마마께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쉴 시간이 어디 있겠느냐? 네 결혼이라는 국가 행사가 끝났으니 이제 평시 업무로 돌아가야지.”
위스가 막으려는 게 그것이었다.
‘이 새끼한테 맡기면 망한다.’
제레미아 왕은 외모뿐만 아니라 성품도 신기할 정도로 제레미를 닮았다. 위스로서는 후손이라도 이렇게 빼닮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제레미는 도통 결정을 못 하는 성격이었다. 그 성격으로 결정권자의 위치에 올라가 있으면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누구도 그를 존중하지 않게 된다는 거였다.
-예? 회의 기록이요? 전하께서 그런 걸 왜…….
-내가 뭘 읽을지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줄 몰랐군.
-죄,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위스는 왕족 권한을 이용해 국무 회의 기록을 찾아 읽었다. 최근 세 달간의 기록만 읽었는데도 혈압이 올라갔다.
귀족들과 관리들은 왕의 권한을 저들끼리 나눠 갖고 있었는데, 제레미아 왕은 그 상황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왕이 하는 일은 올라온 안건을 듣고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아니오. 아바마마께서 하셔야 할 일은 휴식을 취하는 겁니다. 왕국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왕이 아니겠느냐?”
“왕국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누구입니까?”
“나, 나구나.”
위스의 박력에 밀린 왕이 대답했다. 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마마께서 곧 서머인데, 만일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온 나라가 눈물에 잠길 겁니다. 가서 쉬십시오. 제가 별궁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세상에.”
제레미아 왕이 감격했다.
“정말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네가 이리도 나를 생각해 주니 모든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지는 것 같구나.”
‘개소리 말고.’
“신관이 ‘충분히 강건하시다, 정무를 보아도 되시겠다’ 인정할 때까지 쉬다 오십시오.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오오, 내 착하고 귀여운 아들. 하지만 그래도 될지…….”
“됩니다.”
“그, 그래. 정말 가도 되겠니?”
“네.”
위스는 왕의 직인을 넘겨받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호위가 감탄했다.
“패륜 아닙니까?”
“입 닫아라.”
재료는 다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