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설마! 위스, 아니겠지? 그놈에게 넘어가서 터무니없는 일을 공모한 건…….”
제레미아 왕이 소스라쳤다. 위스는 그를 콱 끌어안아 소동을 못 피우게 막았다.
“목소리 낮추세요. 대공이 보고 있습니다.”
“그, 그래. 그렇구나. 위스, 지금 솔직히 털어놓으렴. 그래야 수습을 하지 않겠니?”
“아닙니다.”
“정말이니?”
‘안 믿을 거면 왜 자꾸 물어보냐.’
위스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예. 그보다 아바마마는요? 뭐 아는 거 없으시겠죠.”
“내가 뭘 알겠니?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난 꿈에도 몰랐다! 백작이 대공 암살을 모의하다니, 그런 자에게 수도의 안전을 맡겼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제레미아 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도 몰랐던 게 자랑이냐?’
이건 이것대로 열받았으나, 위스는 한가하게 화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간신히 상대를 협상 테이블에 앉혔는데 판이 엎어지게 생겼다. 모어 백작은 존재 자체로 위스미아의 약점이었다.
‘백작을 만나야 한다.’
대공보다 먼저.
기회는 곧바로 찾아왔다. 구금한 주동자들을 연행하는 과정에 소란이 생겼던 것이다.
위스는 뒤늦게 나타난 호위에게 담요를 받아서 등에 두르고 있었다. 사시사철 따듯한 서머에서, 밤이라도 몸에 오한이 든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또 몸살은 아니겠지.’
“헤헤, 전하. 제가 전하를 놓치려고 놓친 게 아니라요. 아시지 않습니까? 대공이 워낙 날래셔서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무사하셔서 저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넌 안 따라온 게 잘한 거다.”
“그렇죠?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거 칭찬이십니까?”
“칭찬이겠냐?”
위스는 호위의 귀를 잡아당기다가 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위스미아 전하! 죄송합니다! 그놈에게서 구해 드리지 못해서…… 으악!”
“닥쳐라! 빨리 걸어!”
“전하, 전하!”
압송되던 모어 백작이 위스를 향해 애타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을 묶어서 데려가던 병사들이 위스를 향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위스는 테오도어를 반사적으로 확인했다.
‘망할.’
부관에게 보고를 듣던 그는 고개를 들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백작이 심문받기 전에 접촉할 수가 마땅치 않았다. 차라리 지금 테오도어 앞에서 접촉하는 게 상수인지도 몰랐다.
위스는 표정을 고쳤다. 속으로 ‘나는 동정심이 많은 오메가다.’라고 세 번 외우고 테오도어에게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잠시……. 백작과 아주 잠깐만 대화할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테오도어의 부관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테오도어가 그를 막았다.
“잠시면 되겠습니까?”
“예. 폐를 끼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 사람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묻고 싶습니다.”
‘너희가 어차피 심문할 내용, 친분 있는 내가 미리 물어봐 주겠다.’는 말을 하자 부관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테오도어가 허락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위험인물이니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선선한 허락이었다. 목숨을 구해 준 보람이 느껴지는 놈이다.
위스는 끌려가던 무리에게 다가갔다. 모어 백작은 줄로 줄줄 묶인 무리의 앞쪽에 있었는데, 위스가 가까이 가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이 무슨 비극이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위스는 그가 감상에 젖을 시간을 줬다. 사람이 좀 촉촉해지면 귀가 얇아질 테니까.
“백작.”
“전하, 저를 왜 그렇게 부르십니까……. 평소처럼 애칭으로 불러 주세요. 전하를 보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릅니다…….”
백작이 애틋하게 말했다. 위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되길 원치 않으니, 아는 게 있으면 다 말하도록 해. 대공 전하는 믿을 만한 분이다. 오판하시지 않겠지.”
테오도어의 신체 능력이라면 여기서 속삭이는 소리를 못 들을 리 없다. 애초에 그래서 위스의 대화를 허락했을 테니까.
“그대는 이용당했을 뿐이잖아? 그대가 먼저 남을 해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어. 그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겠지. 조금 순진해도 좋은 사람이란 걸.”
‘순진하고 멍청한 놈이 팔라틴 왕에게 이용당한 거’라는 내용을 강조하고, 위스는 덧붙였다.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줘.”
온몸에 소름이 돋을 듯했으나, 과연 효과는 좋았다.
대공의 이름이 나왔을 때만 해도 붉으락푸르락하던 모어 백작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가 애달프게 말했다.
“예……. 전하를 위해서라면 제가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됐다.’
모어 백작 개인이 이용당했다는 점과, 심지어 그도 속아 넘어갔을 뿐이라는 점을 대공에게 알렸다. 백작도 멍청하지 않으면 자신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깨달았을 것이다.
‘점수가 깎이진 않았겠고.’
서머 왕국이 개판 났다는 건 만방에 알리게 되었지만, 그건 테오도어도 이미 알던 사실일 것이다.
‘이렇게 내부 단속이 안 되어 있으니 본인이 조종하기 더 쉬울 거라는 판단도 가능하겠지.’
오히려 가점이 될지도 모른다.
위스가 그렇게 놔두진 않겠지만.
그는 가벼워진 걸음으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가오는 테오도어를 발견했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뭐지?’
고개를 들자, 테오도어는 위스의 담요를 끌어당겨 목까지 덮어 주었다. 희게 드러나 있던 목이 부드러운 면에 덮였다.
테오도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좋아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
“그 남자를 더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테오도어는 그렇게 말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못 할 말을 했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조금 민망한 듯했다.
그가 부관과 함께 떠날 때까지 위스는 제자리에 굳어 있었다.
‘뭐냐.’
방금 태도…… 미묘하지 않았나?
⚜ ⚜ ⚜
그리고 그 후 며칠을 위스는 앓아누웠다.
‘진짜냐.’
자기 발로 산을 탄 것도 아닌데 뭘 잘했다고 쓰러졌는지 알 수가 없다.
침대에 눕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싶었는데, 눈을 떠 보니 며칠이 사라져 있었다.
정신만 차렸을 뿐이지 몸 상태는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침대에 앉으려다가 아래로 고꾸라질 뻔한 뒤, 위스는 그냥 누워 있었다.
‘습격 건은 정리됐나?’
서머의 귀족이 팔라틴의 대공을 습격한 일이다.
제레미아 왕에게 맡겨 둘 건이 아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위스가 테오도어를 도와 골렘을 격퇴한 것을 명분으로 ‘우리는 동맹’이라는 주제를 강화했어야 하는 자리였다.
‘악독한 팔라틴 왕에 맞서, 우리는 서로 손잡을 필요가 있다.’
명확하고 좋지 않은가.
이 부분이 정리되면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강맹한 적이 생기면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게 수순이니까.
‘대공과 결혼 동맹을 맺고 서머의 힘을 기른다.’
여기까지 진척시켰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위스는 제레미아 왕의 협상 능력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 선에서 추측했다.
‘귀족원은 뒤집어졌겠군.’
누가 팔라틴 왕의 협력자일지 모른다. 제레미아 왕의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면, 남아 있던 왕성 귀족 중에 배신자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을 추궁할 힘은 왕에게 없다.
‘대공에게 있지.’
서머 내에서 대공의 영향력이 막대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중에 해결할 문제였다. 당장은 나쁜 일이 아니다.
대공과 결혼하면 막대해진 대공의 영향력을 위스가 휘두를 수 있을 테니까.
“전하, 저 왔는데요.”
심부름을 보내 놓은 호위가 문 너머에서 말했다. 음식 냄새가 났다. 환자식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들어와.”
“저기, 근데 손님이 오셔서요.”
“누군데?”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테오도어가 들어왔다.
위스는 얼떨떨하게 그를 쳐다봤다.
‘한창 바쁠 놈이 왜 여기 있냐?’
심지어 환자식을 들고 있는 쪽은 테오도어였다. 다른 손에는 꽃 한 송이도 들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정원을 보니 피어 있기에.”
테오도어가 미소 지었다.
“전하를 닮은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제가 꺾은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군가 잘못 건드렸는지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위스는 자신이 뭘 걱정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떨어진 꽃 닮은 걸?’
위스미아가 깡마르고 볼품없는 몸을 지니긴 했어도 얼굴은 위스와 흡사했다. 면전에서 욕 듣는 기분을 뭐라 표현할 수 없었다.
“꽃을 좋아하십니까?”
“……싫어하진 않았습니다.”
‘너 때문에 방금 싫어진 것 같다.’
테오도어는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미소 지었다.
“다행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곳에 장식해 두겠습니다. 이곳에 화병이 있나?”
“예? 화병이요? 전하, 그런 거 보셨습니까?”
“아니.”
“없는가 본데요.”
테오도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앓아누우신 내내 걱정했습니다. 이렇게 깨어 계신 모습을 보니 좋군요.”
“예……. 감사합니다.”
위스는 그 외에 할 말이 없었다.
‘왜 이렇게 약해 빠졌냐고 한 소리 하려고 오지는 않은 것 같은데.’
테오도어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위스를 빤히 보더니, 아쉬운 듯 말했다.
“음식이 식겠군요. 드십시오. 저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살펴가세요.”
인사는 호위가 했다.
문이 닫혔다.
“대공이랑 친해지셨어요?”
호위가 물었다.
위스는 그 경박한 입을 잡아당기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저게 그런 태도인가? ……뭔가 좀 다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