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들어온 남자는 물론 호위가 아니었다.
“전하! 무사하셨군요. 마지막으로 뵌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는데, 왕성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습니다. 어……?”
남자의 눈이 커졌다. 대야의 핏물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누구냐.”
“……전하! 전하의 피입니까? 분명 전하께서 무사히 깨어나셨다고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제가 전하를 보호하지 못해서…….”
남자가 비통하게 외쳤다. 위스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위스미아의 건강을 저토록 걱정할 놈이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놈이 그 애인인가.’
판단을 마치기 무섭게 위스는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지?”
“전하?”
“왕성 출입을 금지당했을 텐데? 누가 너를 이곳으로 들여보냈느냐?”
“전하께서 알려 주신 비밀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저를 원망하시는군요. 이해합니다. 저를 때리고 탓하셔도 됩니다.”
‘아, 그래?’
위스는 주먹을 바로 쥐고 남자의 턱을 날렸다.
“억!”
“미친놈. 전쟁 중에 왕자를 데리고 도망쳐? 네놈이 그러고도 수도 방위군이라고?”
“자, 잠깐, 전하…….”
턱이 흔들린 남자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넘어진 상대는 팰 곳이 많았다. 위스는 남자의 배를 전력을 다해 걷어찼다.
퍽!
“…….”
분은 좀 풀렸으나 발목이 이상했다.
위스는 싸한 예감이 들어 발길질을 멈췄다. 발목을 만져 보니 통증이 올라왔다.
‘돌았나.’
이 몸뚱이는 유리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어린아이도 이것보단 튼튼할 것이다.
위스는 이를 악물고 발목을 살폈다. 누굴 패다가 발목이 나갔다고 신관에게 갈 수는 없었다.
복숭아뼈부터 발목 뼈대를 더듬었다. 골절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틈에 남자가 일어나 위스를 끌어안았다.
“전하처럼 섬세한 분이 이러실 리가……? 정말 화나셨군요. 화내지 마십시오, 전하. 저는 전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전하를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놔라.”
“아니오, 전하. 이젠 놓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모질게 구셔도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저를 원망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게 가라는 말씀은 마십시오. 전하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염병 떤다.’
위스는 이놈의 가슴을 정말 찢어 줄까 싶었으나 포기했다.
‘여기서 더 약점을 늘릴 순 없지.’
팔라틴군이 장악한 성이다. 위스의 힘으로 몰래 시체를 처리할 순 있어도 이놈이 성으로 잠입했다는 사실까지 숨길 수는 없을 터였다.
어쨌든 신분이 귀족인 모양인데, 굴다리의 부랑자도 아니고 귀족씩이나 되는 놈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찾기 마련이었다.
‘남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내보내야 돼.’
위스는 분노를 내리눌렀다.
“듣기 싫으면 더 듣지 말고 나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의 목소리가 듣기 싫을 리 없지 않습니까.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전하를 떠나보낸 동안 저도 타는 듯한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타 죽든가.’
위스는 남자를 흰 눈으로 쳐다봤다.
“왜 저희가 행복해지지 못했는지 다시 되돌아보다가…… 깨달았습니다. 제 각오가 너무 물렀던 겁니다. 저는 다시 전하를 되찾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남자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위스는 그의 어조가 약간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저를 이리도 모질게 대하시는 이유를요. 폐하께서는 전하를 아카젤 대공에게 보내려 하신다지요. 왕국을 짓밟은 저 무도한 정복자에게……. 전하께서는 차마 저항하실 수 없었을 겁니다. 저는 전하께서 대공에게 웃어 주셨다 해도 원망치 않습니다.”
남자가 위스의 손을 잡았다. 위스는 그가 뭘 하는 일단 두고 봤다.
“제가 결혼을 막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아무 걱정 없이 저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어쩌려고?”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위스에게 몸을 기울였다.
“제 가문에 수정구가 있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수정구야 어디든 있는 게 아닌가.
“수정구를 통해 놀랄 만한 인물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저희를 지원하기로 약조했습니다. 아카젤 대공은 방비하지 못할 겁니다……. 그때는 제레미아 폐하께서도 저희 사이를 반대하지 못하시겠지요. 다시 만날 날까지 부디 옥체 보존하십시오.”
밖에서 소음이 들리자 남자의 어투가 다급해졌다. 그는 위스의 손등에 입 맞추고 재빨리 통로로 빠져나갔다.
위스는 핏물에 손을 닦고 손수건으로 벅벅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아카젤 대공이 방비할 수 없다……. 방비라는 표현은 보통 ‘공격에 대한 방비’를 표현할 때 쓰지 않는가.
대공이 방비할 수 없는 공격을 준비할 놀랄 만한 인물?
한 명밖에 없지 않은가.
팔라틴 왕.
‘미쳤나.’
남자를 붙잡아야 했다. 그러나 그를 소리쳐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침입자가 있다고 광고할 일 있나.
위스는 남자의 이름도 몰랐다.
대신 그는 호위를 호출했다.
“여기서 나간 사람 못 봤느냐?”
“누가 나갔습니까?”
“…….”
이 호위가 호위의 역할은 할 수 있을까? 위스는 의문이었다.
“방금 이 몸의 애인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예? 그 사람이 어떻게……. 전하께서 부르셨습니까?”
‘내가 불렀으면 너한테 왜 말하겠냐.’
위스는 한숨을 참았다.
“내가 이 말을 왜 했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자가 비밀 통로를 알고 있다. 가서 잡아 와.”
서머 성을 왕성으로 삼은 즉시 위스는 이 성의 모든 비밀 통로를 외웠다.
서머 성에 머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도 평생 전장에서 살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됐지만.’
왕자궁에도 비상 탈출용 비밀 통로가 하나 있었다.
남자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왕자궁을 드나들었다. 순간 이동이라도 할 줄 아는 게 아니라면, 그 통로를 통해 입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왕족만이 알아야 할 비밀통로를 누군가 남자에게 알려 줬다는 얘기로…….
위스미아가 알려 줬다는 ‘비밀 문’은 바로 그것일 터였다.
“헉. 어디입니까?”
“왕자궁 동쪽 숲 창고를 뒤져 봐.”
“예, 전하.”
호위는 재빨리 뛰쳐나갔으나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위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 몸의 애인은 귀족이다. 호위는 그가 자기 영지로 내려갔을 거라고 말했으나 아직 수도에 있었다. 귀족이 수도의 자기 집을 두고 어디에서 묵겠는가?
“이 몸 애인 저택으로 찾아가서 그놈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전해. 아니, 내가 한번 봐야겠다. 그놈 이름이 뭐냐?”
“……저기 전하. 머리가 안 아프신 척이라도 좀…….”
위스는 호위를 쳐다봤다.
“질문에 토 달지 말고, 명령에 군말 없이 따라. 앞으로 이를 어기면 넌 해고다.”
위스에게 이 기사의 쓸모는 호위라기보다 정보 수집용이었다.
그러나 호위가 특별히 소식통인 것도 아니고, 과묵한 사용인으로 대체된다면 그편이 나았다. 앞으로 곁에 두고 부려야 할 인물이라면 지금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할 것이다.
위스의 손발 같던 부관은 과묵하고 믿음직한 인물이었다.
결국 배신했지만.
호위는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재빨리 주인의 질문을 떠올리고 대답했다.
“모어 백작입니다.”
“소백작이 아니라?”
“예. 백작입니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작위와 재산을 상속받은 것으로 압니다.”
고위 귀족이지 않은가.
그만한 작위면 수도 방위군에서도 상당한 직책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놈이 전쟁 중에 왕자를 들고 내빼?
‘더 팼어야 했는데.’
여하튼 팔라틴 왕의 인선은 훌륭했다.
대공에게 자기 연인을 빼앗겼다고 분노하고 있는 놈이 심지어 이름값 있는 귀족이기까지 한 것이다. 백작쯤 되는 놈이 ‘침략자를 물리치자’고 나서면 동조할 인물이 꽤 될 것이다.
이때 침략자는 아카젤 대공이다.
‘설마?’
위스는 인상을 썼다. 팔라틴 왕이 대공과 서머 왕실의 혼인을 부추긴 이유가 뭔지 가설이 세워져서였다.
위스미아가 대공과 결혼했다고 치자. 당연히 대공은 서머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그가 서머 왕국민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하면 어떻게 되는가?
일단 대공의 전 재산은 위스미아에게 상속된다.
자식이 없을 경우, 재산은 배우자가 전부 물려받도록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아카젤 대공은 팔라틴의 왕족이기도 하다.
서머 왕국은 전쟁에서 패해 팔라틴에 충성과 우애를 맹세했다.
대공을 살해한 순간, 서머 왕국이 팔라틴에 반란을 일으킨 셈이 되는 것이다.
반역자의 재산은 국가에 환수된다. 다시 말해 팔라틴 왕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이 경우 위스미아의 재산을 팔라틴 왕이 환수하게 되는 것이다.
팔라틴 왕은 손 안 대고 서머 왕국령과 대공의 사재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뜻이다.
‘팔라틴 왕은 즉위하자마자 자기 동생을 사지로 밀어 넣었지.’
이 형제가 화기애애한 관계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서로 죽이고 싶어 안달 나 있을 정도냐 하면…….
‘형 쪽은 확실하고.’
문제는 형이 죽이고 싶어 하는 아우 쪽에 위스도 한 편으로 묶여 있다는 거였다.
모어 백작이 팔라틴 왕의 약속 따위를 믿고 반란을 일으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머 왕국이 뒤집어쓰게 되지 않는가.
위스는 반드시 팔라틴 왕의 수작을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