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2화 〉 소중한 사람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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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방에서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아샤의 방.
아샤의 방은 하늘에서 빛이 내리쬐는 형태의 폐허였고, 레이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리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느껴지는 피의 향기.
엘라가 있던 곳에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지금 죽어서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에 움찔 떨면서 아샤를 불렀고, 레이시의 목소리에 눈을 뜬 아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도끼를 들었다.
“레이시.”
“제, 제가 누군지 알겠어요?”
미스트는 자기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었기에 긴장하고 있던 레이시.
다행히 아샤는 레이시를 알아보는 듯 레이시를 보자마자 잠시 입을 꾹 다물다가 도끼에 묻은 살점과 피를 떼놓으면서 레이시에게 다가갔고, 레이시는 아샤의 반응에 배시시 웃으면서 아샤에게 다가가다가 이내 아샤가 도끼를 들어올리자 그대로 굳었다.
“아, 아샤?”
“……역시, 아니네. 내가 죽이는 건 아니야.”
한숨을 푹 내쉬면서 걸터앉는 아샤.
아샤는 지금 여기에 있는 시체들이 누군인지 기억하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모르겠다면서 아샤의 옆에 앉았다.
방금 전에는 왜인지 모르게 자기를 죽이려고 했었지만, 아샤가 그럴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시는 아샤에게 머리를 기대면서 누구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레이시를 가리키며 레이시에게 원한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네……?”
“네게 호감을 품은 사람들은 너를 보내주기로 이미 정했고, 네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끌어모아서 전부 죽였어. 몇 개월이나 걸렸지. 네가 몇 살 안 돼서 쉬웠다고 할까, 아니면 네가 늦게 와서 어떻게든 해냈다고 할까?”
“……그, 죄, 죄송해요.”
“아니, 됐어. 괜찮아. 어차피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머리를 긁으면서 한숨을 푹 내쉬는 아샤.
근원에서 본 아샤의 모습은 바깥의 아샤와는 다르게 피곤함에 쩔여져서 멍하니 하늘에 뜬 해와 달을 보고 있었고, 레이시는 그런 아샤의 모습에 뭘 그렇게 보냐며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글쎄? 뭘 보는 걸까? 나는…….”
“네?”
“뭘 하는지 모르겠어. 네가 나타나서, 네가 내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내가 뭐였는지 자꾸만 헷갈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도 아닌데 섹스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에 갇혀서 만나서 섹스 한 번 했다고 네가 내 마음에 박히고…….”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는 아샤.
아샤는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거칠게 긁다가 레이시를 살짝 밀어내더니 이내 자기가 머리를 기대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레이시는 그런 아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샤를 가만히 바라봤다.
“원래 내가 무슨 야차였는지는 알지?”
“엘라가 말해줬어요. 탐욕의 야차라고…….”
“응, 맞아. 나는 산적에게서 태어났어. 산적의 탐욕이었지. 그러다 내가 경외의 야차가 된 건 정말로 원했던 건 저기에 있던 엘라와 미스트 같은……, 그런 거였다는 걸 깨달았어.”
“그것도 들었어요. 아샤가 원했었던 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거였다고.”
“응, 아마……, 산적들에게 붙잡혔었던 인간들의 욕망이겠지. 그런 좋은 욕망과 더러운 욕망이 뒤섞여서 태어났고, 나는 엘라와 미스트를 보고 좋은 의미의 욕망을 쫓아갔던 거야. 그랬었는데……, 지금은 뭘 하고 싶은지 떠오르지 않아.”
“네……?”
“이런 건 처음인데 말이지…….”
멍하니 입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모습에 아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고, 이내 아샤가 말한 것처럼 해와 달이 엘라와 미스트의 기운을 닮은 걸 보고는 작게 웃으면서 자기를 보내줄 수 없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아샤는 자기는 못 한다고 말했다.
“네?”
“어떻게하는지 모르겠네. ……하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데 뭔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안 그래?”
피식 웃으면서 무기력증에 빠진 듯 고개를 파묻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반응에 눈을 깜빡이다가 쓰게 웃으면서 아샤를 껴안은 채 가만히 있었다.
“뭐라고 안 해?”
“으응, 여기에 오기 전에 미네르바를 만났는데, 미네르바가 상상도 못 했었던 말을 했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해서 힘들다면 그냥 안아주고 싶어졌어요.”
“그래?”
“네.”
“……머리 쓰다듬어줘.”
“네, 그럴게요.”
아샤의 말에 싱긋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손길에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다가 그대로 레이시에게 얼굴을 파묻고 시간을 멍하니 보내기 시작했다.
미네르바의 둥지에 있었을 때처럼 시간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
그저 으레 몇 시간, 며칠쯤 지나갔겠거니 생각하는 곳에서 레이시는 아샤의 체온을 느끼며 시간을 보냈고, 아샤는 레이시의 허벅지에 머리를 눕히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레이시.”
“네?”
“너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
“뭐가요?”
“야차는 불완전하다고.”
“에에……?”
여기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샤를 바라봤고, 아샤는 불합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야차는 강해. 태어나자마자 육체와 지성은 완성되어 있고 변하는 건 보유하고 있는 스킬뿐이지. 평균으로 따지자면 어떠한 인종보다 강할 거야. 승천하지 못한 드래곤들과 비교해도 50 대 50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겠지.”
“으응.”
“하지만 야차는 혼자서는 못 살아. 그 약한 인간도 지성인으로서 살기를 포기하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데, 야차는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가지 못해. 네 몸이 야윈 것처럼 야위어지다가 그대로 죽고 말아.”
“……네. 알아요.”
“그래. 야차는 불완전해. 남에 의해서 변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건 자기가 어떠한 존재가 되겠다고 확신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아.”
진지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아샤.
아샤는 레이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레이시를 보고 나서 밑을 보게 되었다면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래서 애써 무시했어, 내가 불완전하다는 걸. 나는 그럴만한 힘이 있었고, 주변인들이 보내는 경외심도, 내가 약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고.”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아샤.
그러다가 아샤는 점점 떨리는 목소리로 레이시를 끌어안았고, 레이시는 아샤가 자기를 꽉 끌어안자 아샤를 안아주면서 다 괜찮다고 속삭여주었다.
“네가 내 눈을 끌면서 내가 애써 무시하던 게 눈에 밟혀. 내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내가 사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이……. 계속해서 눈에 밟혀.”
“으응.”
“나는 엘라나 미스트와 다르게 혼자서는 오롯이 설 수 없을 정도로 불완전하고, 네 옆에 서기에는 반쪽짜리의 생명체라는 게 밟혀. 네가 미숙한 모습을 보이면 내 모습이 겹쳐 보이고 네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내 성장과 비교하며 내가 초라하게 보여. 그리고 그러다 보면 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고 네 옆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탐욕이 끓어올라. 무엇보다도, 내가 생명체로서 완전하지 못해서 너와 아이를 가지지 못 한다는 게 너무나 싫어.”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푹 내쉬는 아샤.
아샤는 레이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야만 했었다고 말하면서 레이시의 손을 잡았고, 레이시는 아샤의 손이 떨리자 아샤의 손을 꽉 잡아주면서 아샤를 바라봤다.
“너는 날 반쪽짜리로 만들어. 하지만 내가 그걸 원하고 있어. ……그러지 않았다면 네게 적의를 가지고 있던 다른 존재들을 전부 이런 식으로 고깃덩이로 만들지는 않았겠지. 저기, 레이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아샤는 장고 끝에 피식 웃으면서 레이시에게 평생 반쪽으로 살아가는 게 맞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아샤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다가 생각에 잠겼다.
아샤에게 뭐라고 말하는 게 맞을까?
차라리 꿈이 없다거나 그런 거라면 자기도 그렇다거나 그런 식으로 공감대를 찾을 수 있겠지만, 생명체로서 불완전하다니…….
자신이 여자가 되었다는 건 받아들였지만, 인간으로 살았던 기억 때문에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었던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머리가 어지럽다는 듯 아샤를 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표정에 피식 웃으면서 레이시를 끌어안아 다시 바닥에 누웠다.
해와 달이 있는 하늘.
언젠가 아샤가 목표로 삼았었던 엘라와 미스트의 것을.
그렇게 레이시와 아샤는 또 멍하니 엘라와 미스트의 빛을 바라봤고, 레이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자아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감정의 기아증이 심해져서 아사의 단계를 밟기 시작하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뺨을 쓰다듬다가 여기에서 죽는 건가 싶어서 멍하니 레이시를 바라봤고, 레이시는 아샤의 시선이 느껴지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가……, 멍하네요. 아샤.”
“그러게.”
“……밖에 가야 하는데.”
“미안.”
“아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작게 웃으면서 아샤를 바라보는 레이시.
레이시는 아샤의 뺨을 쓰다듬다가 점점 지치는 것 같다고 말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겠냐고 물어봤다.
이대로 자면 편할 거라고…….
그러자 레이시는 눈을 깜빡이다가 역시 그건 무리인 거 같다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씁쓸하게 웃다가 나가는 방법을 모르겠다면서 사과했다.
“그러네요……. 후후, 저도 아샤도 불완전하긴 한가봐요. 엘라와 미스트, 미네르바는 전부 잘 보내줬는데……, 저희가 반쪽이라서 못 나가는 것 같아요.”
“그러게. 뭐가 경외라는 걸까? 또 뭐가 연정이라는 걸까? 우리는 결국 다른 사람이 없다면 비익이나 연리랑 같은데.”
“후후, 그러네요. 엘라가 보고 싶어요.”
아샤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같이 나갈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문을 여는 시늉을 해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레이시는 나타나지 않는 문에 아샤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 정말로 자기는 다른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말했다.
“불완전하긴 한가봐요. 연정이니 뭐니 그래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거잖아요. 아샤의 말처럼 비익연리의 야차나 할까 봐요.”
“풉, 재밌네. 그러네. 그래도 괜찮겠네. 너는 예쁘고 사랑스러우니까.”
눈웃음을 지으면서 레이시를 품에 껴안는 아샤.
레이시는 멍한 눈으로 아샤를 바라보다 자기는 이대로 죽는 거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듯 말을 멈추다가 죽으면 같이 죽어줄 테니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자 레이시는 그러길 원하는 건 아니라면서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숨을 깊게 내쉬었고, 아샤는 레이시의 호흡에 또 자는 거냐고 물어봤다.
“으응, 아니요. 피곤한데 졸리지는 않아요. 그나저나 이번에 잠들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주지 않을래요?”
배시시 웃으면서 죽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요청에 잔인한 말이라면서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다가 레이시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면서 천천히 몸을 만져주기 시작했다.
“에헤헤헤…….”
그러자 레이시는 기쁜 듯 웃으면서 아샤를 끌어안았고,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면서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바보네.”
“에헤헤, 아샤의 말대로 저희는 생명체로서도 불완전하니까요. 그러니까 바보로 괜찮아요.”
레이시의 말에 피식 웃더니 다시 입을 맞추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부드러운 혀에 자신의 혀를 섞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불완전하니까 저희 떨어지지 마요. 네?”
“알았어, 떨어져 달라고 애원해도 있어 줄게. 그리고 문을 열지 못한다면 그냥 같이 죽어줄게.”
자기는 죽지 않겠지만.
아샤의 근원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멍한 눈을 하고 있는 레이시의 옷을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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