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화 〉 결전2
* * *
“어……?”
어둠 속으로 빨리듯이 들어간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여긴 어디지?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블루드는 이제 일어났냐며 키득키득 웃으며 레이시를 바라봤다.
“앗!?”
“여기에서 전투는 불가능하니 괜한 힘은 안 쓰는 게 좋을 걸세, 올케.”
“으으으으!”
“후후, 자네가 엘라의 약점인 걸 깨닫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참, 여기에 대해서 말해줘야겠구나. 여기는 근원. 심연의 근원이지.”
“네?”
“여기에서 나가는 방법도 알려주도록 하지. 여기에서 나가려고 한다면 진정한 너를 발견해야만 하지.”
“네? 그게 무슨 말인……. 잠깐만요! 왜 사라지시는 건가요!?”
“이 마법의 대가라는 거지. 엘라라면 마법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죽지는 않겠지만, 나는 소멸이 대가인가보군. 후후후, 그럼 잘 나갈 수 있도록 빌지.”
“세상에…….”
신물을 사용했는데도 소멸하는 건가?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 것보다는 여기에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다.
빠져나가서 엘라와 미스트, 아샤, 그리고 미네르바를 보는 게 먼저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진정한 자기를 발견해야 한다는 블루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주변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 보이는 건 트럭이었다.
거의 3년만에 보는 과학의 산물.
직사각형에 가까운 몸체에 헤드라이트 근처에 피와 지방이 묻어있는 트럭.
레이시는 그 모습을 보자 반사적으로 움찔 떨면서 손을 뒤로 뺐고, 그런 레이시의 앞에는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못 생긴 것도 아닌 평범한 사내가 나타났다.
“으, 으읏.”
“우와, 내가 나중에 이런 여자가 되는 거구나.”
죽기 전의 자신.
레이시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트럭의 밑을 바라봤고, 이내 뼛조각과 장기가 트럭의 밑부분에 들러 붙어있는 걸 확인하고는 숨을 내뱉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트럭에 뛰어들었다가 애는 살리고 나만 죽었었던 기억.
죽었을 때도 별 충격이 없었고 환생하고 나서 엘라가 자기를 덮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다시 이렇게 두 눈으로 바라보자 그런 생각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의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자 남자는 레이시를 안타깝다는 바라보다가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기에서 못 나갈 거라고 말했다.
“후끅……. 웁, 으우우욱!”
“여자애는 멀쩡하더라. 그 뒤로는 아무런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여기에 오면서 여신님께서 말해주더라. 그 여자애, 잘 커서 훌륭한 선생님이 됐다고.”
“아, 아하하, 그거 불행 중 당행이네요.”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면서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이시.
남자는 그런 레이시를 보다가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자기가 이렇게 여자가 될 줄은 몰랐다며 웃다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앞으로 여기서부터는 힘들 거래. 뭐라더라? 네 근원에 대해서 한번 더 감상해야 한다던가? 그것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대.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을 하는 네 연인들을 볼지도 몰라.”
“으, 으읏…….”
“갈 거야?”
“가야죠, 저는 돌아가고 싶은걸요.”
“그렇구나. 그럼 조심해. 여기는 너와 관련된 사람의 근원을 보여주는 곳이야. 나는 결국에 너이기 때문에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보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니까. 왜, 다들 너에게는 착해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착하다고는 말하지 못하잖아?”
싱긋 웃으면서 손을 젓는 남자였을 적의 레이시.
레이시는 그의 모습이 점점 자신의 것으로 변해가자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어느샌가 눈앞에 나타난 방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는 건 시체.
다짜고짜 시체라는 것에 레이시는 움찔 떨면서 뒷걸음질 쳤지만, 아까 전의 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레이시는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 소리에 시체 사이에 쪼그려 앉아있던 여자애가 몸을 일으켰다.
나이는 18살쯤 되었을까?
에일렌이 크는 걸 봤으니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나이는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에일렌을 닮은 여자의 모습에 떨떠름하게 여자를 바라보다가 혹시 엘라냐고 물어봤고, 아직 어렸을 시절의 엘라는 히죽 웃으면서 나를 아냐고 물어봤다.
“하긴 알겠지! 나에게 접근하는 인간들이 원하는 건 내 몸이랑 내 권력, 돈, 그런 것들인데 알고 있어야겠지!”
“에, 엘라.”
“그래, 그래서 넌 누구지? 내 몸에 이딴 상처를 낸 녀석들과 똑같은 녀석인가? 아니면 내 내장을 녹이려고 독 따위를 쓴 쓰레기들? 응? 그게 아니라면 몸으로 아양 떨면서 내가 왕가에서 받는 것을 받기를 원하는 존재?”
옷을 벗고 히죽 웃는 엘라.
그런 엘라의 몸에는 레이시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온갖 흉터가 있었고 시체와 같은 혈색을 띄고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몸을 가로지르는 흉터.
대체 어떤 흉터를 입어야 저렇게 되는 걸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뒷걸음질치다가 엘라가 자신의 흉터를 손으로 만지면서 이게 그렇게 이상하냐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나를 죽이려던 캘러미티 가의 녀석들도 질려 하더라. 5살밖에 안 되던 놈이 자기 내장을 몸으로 억지로 집어넣으면서 싸우니까 말이야. 키킥! 괴물은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그 녀석들인데.”
엘라가 발길질을 강하게 하자 레이시의 발치에 떨어지는 시체.
그 시체는 미스트와 같은 귀와 하고 있었고,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평범해서 위화감이 드는 얼굴.
레이시는 그 얼굴에 침을 삼키면서 혹시 미스트와는 만났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질문에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곧바로 레이시의 목을 조르고 바닥에 내다 꽂았다.
“으컥!?”
“흐응? 뭐야, 미스트에 대해서 물어서 캘러미티 가문의 사람인줄 알았는데……, 왜 낙법을 치지 않지?”
“그, 그게……, 저는, 그러니까.”
“말해.”
“저는 먼 미래에 엘라랑 결혼해서 애까지 낳는 사람이라서요. 그래서 여기의 엘라에게도 손을 올릴 수가 없네요. 아하하하…….”
“……? 정신이상자?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순수하게 정체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다가 자기들이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해주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레이시를 보고 미친 년이라고 말했다.
“네가 확실히 내 취향의 여자이긴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럴 리는 없어. 왜냐면 나는 오라토리엄의 마녀니까!”
“네?”
“애초에 아버지란 작자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낳은 딸이라고. 창녀의 딸로 태어나서 내가 죽인 왕자랑 공주가 몇인데 내가 결혼해서 애까지 가진다고?”
“네, 에일렌이라고 하는 걸요?”
“에일렌……?”
처음 듣는 이름이다.
뭔가 읽는 방법만 간신히 번역해놓은 고대어 사전을 뒤적거리다 보면 나오지 않을까 싶은 단어.
하지만 엘라는 묘하게 마음 속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일렌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터트리게 될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하게 나쁘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눈앞의 여인, 레이시에 대한 정보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단순 정신이상자에서 어쩌면 정말로 미래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여자로.
“그래서……, 여기에서 나가고 싶어?”
“으응,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의 엘라를 보니까 달래주고 싶어요.”
“하! 나를? 웃기지도 않네. 내가 왜?”
“엘라도 힘들 테니까요.”
“…….”
“힘들진 않나요?”
“몰라, 나는 태생이 이러니까. 그러니까 그냥 견디는 수밖에.”
“…….”
“나는 강해, 강하지. 응. 평범한 인간은 나를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해. 그러니까 그냥 견뎌야지.”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옆에 앉았다가 자기가 앉고 있는 곳이 시체 위라는 걸 깨닫고 바닥에 앉아 엘라를 자기 허벅지 위에 앉게 했다.
그러자 엘라는 레이시의 품에서 벗어나려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시에게 기댔고, 레이시는 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자기가 아는 엘라의 근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둡고 무서운 모습.
그렇기에 레이시는 엘라를 꽉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면서 자기가 아는 엘라와는 무척이나 다르다고 말했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지금의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물어봤다.
“에일렌을 잘 돌봐줘요. 가끔 너무 야해지는 게 문제지만 저도 사랑해주고 있고요. 아이를 가르칠 땐 법과 규칙을 가르쳐주면서 에일렌을 가르치고, 미스트와 아샤, 미네르바랑 투닥거리기는 해도 서로 잘 양보해서 저를 사랑해주고요.”
“잠깐, 잠깐.”
“네?”
“아샤랑 미네르바가 누군지 모르겠으니까 넘어가겠는데 미스트랑 내가 투닥거린다고?”
“네.”
“서로 독 뿌리고 칼 들고 난도질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이야기로 꺄아꺄아 거리면서? 오늘은 내가 널 안을 거라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네? 네. 보통은 기싸움을 하다가 사이좋게 둘이서 저를 사랑해줄 때도 있어요. 으, 으응……. 그럴 땐 허리가 아프지만요.”
“우와, 내가 그걸 허락한다고?”
“네? 네.”
“정신 나갔네. 아니, 미스트까지 내가 네 첩으로 주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2명이나 더 너에게 주고 내가 독점하는 게 아니라 사이좋게 나눠 가진다고?”
“으응, 그런 걸요? 스케쥴이 비어있을 때 매일 같이 같은 침대에서 자자고 조르긴 하지만.”
레이시의 말에 멍하니 입을 벌리다가 머리를 긁는 엘라.
엘라는 자기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레이시를 보면서 정말로 그렇다면 자기가 왜 그러는지 아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다들 사이가 좋았는 걸요?”
“으응?”
“그랬어요. 정말로요.”
“내가 친구 같은 걸 사귄다고?”
“네. 많아요. 엘레오놀이라는 다른 나라의 공주님이었다가 우리나라로 온 공작님하고도 친해지셨고 루룬이라는 전 여자친구도 있으세요. 아샤와는 매일 조금 거친 농담을 하시면서도 사이좋게 지내고 미네르바랑은 사회의 규칙을 가르쳐주시면서 적당히 날뛸 곳을 주세요.”
레이시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엘라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레이시에게 정말로 그렇다면 자기가 어떻게 되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엘라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아는 엘라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엘라는 레이시의 이야기를 듣고 표정이 다양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 레이시를 보고 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얼굴을 구겼고, 에일렌을 가지게 된 계기를 말해줄 때는 부럽다는 얼굴을, 자신과 친구를 공격한 사람들을 완전히 조져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땐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얼굴을…….
레이시는 엘라의 표정 변화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손길에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른 곳으로 갈 거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나는 그렇다 쳐도 미스트는 위험할 건데도?”
“네, 그래도요. 그래도 밖에서 다들 기다리는걸요.”
“미스트는 너 보자마자 죽일 걸?”
“에헤헤, 미스트랑 아이도 가졌으니까 안 그럴 거예요.”
“…….”
레이시의 말에 다시 입을 다무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얼굴을 붉히면서 자기 몸도 어른의 몸이니 미스트에게 가기 전에 해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네?”
“세, 섹스. 해줘. 어차피 미스트에게 가면 다시는 못 보잖아.”
“여, 여기에서요?”
핏물이 바닥에 깔려있고 여기저기 시체가 널린 곳에서……?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엘라가 자신의 옷을 찢어버리고 가슴끼리 어색하게 비벼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엘라를 끌어안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제, 제가 리드할까요?”
“……그럼? 나는 처음인데 어떻게 해?”
“어, 밖에서는 엘라가 리드해요. 경험인수가 엄청 많거든요.”
“나는 대체…….”
“에헤헤, 저는 질투하지 않으니까요.”
품에 안겨서 자괴감 섞인 얼굴을 하자 엘라의 등을 토닥이면서 웃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웃음에 한숨을 깊게 내쉬다가 이내 레이시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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