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6화 〉 떠나기 전 다시 짧은 만남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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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했네.”
“산골 도시네요……?”
“베어 마운틴이라고 불리는 곳이니까. 정식 명칭은 바리치온이라는 이름이야. 바리치온 후작이 다스리는 곳이거든.”
“아, 여기도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땅인가요?”
“응? 아니. 그런 건 아냐. 여기는 한 70년 됐나? 죄를 짓고 멸문당한 게 아니라면 선대 귀족의 의지를 이어받으라면서 멸문한 가문의 이름을 주거든. 물론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정도로 이름이 남은 귀족 가문은 명예를 위해 제외지만.”
“아하.”
“뭐, 이제 원래 귀족이 아니라 귀족이 되는 평민 입장에서는 역사가 깊은 가문에 들어가는 게 좋긴 해. 여러 모로 편하거든.”
“으응, 그럼 제 성도 누군가의 성을 따라서 만들었나요?”
루피너스라는 성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레이시는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서 원래 있던 가문에 편입시키지 못했어. 만약 레이시가 명성을 쌓아 귀족이 된 다음 나랑 만났다면 그랬겠지만, 나랑 만나고 내 애인이 된 다음 귀족이 된 케이스잖아? 그러면 선택받는 가문의 격이 비정상적으로 올라가서 말이야.”
“아하…….”
“혼란을 피해야 해서 새로운 성씨를 만들 수밖에 없었어. 만약 레이시가 성씨를 남기고 싶다면……, 내가 허락한 첩 중에서 한 명에게 그 성을 주는 수밖에 없겠네.”
“미네르바도 받을 수 있나요?”
“응, 사막 왕국인 베스티아의 일이지만, 베스티아에서는 하피와 마찬가지로 여성밖에 존재하지 않아 인종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라미아가 귀족 가문을 유지하는 일도 있거든.”
“으으응…….”
미네르바는 오라토리엄이라는 이름보단 루피너스라는 이름을 더 좋아하겠지.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네르바를 바라보았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시선에 미르와 레아를 안은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나? 주인.”
“으음, 미네르바는 오라토리엄보다는 루피너스가 좋죠?”
“응? 응. 주인 게 더 좋다.”
“왜? 성씨를 남기고 싶어? 레이시는 그런 거 신경 안 쓸 줄 알았는데.”
“기왕 받았으니까 남겨보게요.”
레이시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그래보라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손길에 배시시 웃다가 영주님에게 인사하고 와야 하지 않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저쪽에서 알아서 올 거라고 말한 다음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뭔가 고요하긴 하지만…….
“곰이 있다기엔 너무 평화로운 숲이네요.”
“그야 곰은 민가에서 떨어진 곳에 있으니까.”
레이시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말한 거겠지.
엘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확실히 너무 평온한 산이었다.
곰이 있고 그 안에서는 당장에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생명체들이 잔뜩 있다.
삶과 죽음의 냄새 정도는 풍겨야 하는데 그런 냄새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퍼지지 않고 있다.
이럴 경우 크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모종의 이유로 생명체가 싹 사라졌거나, 다른 하나는 누군가 숲 안에서 일부러 그런 냄새를 조작하고 있다는 것.
이런 건 스킬이 아니라 그저 감이었기에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도 바리치온의 경우에는 후자일 것이다.
모종의 이유로 이런 냄새가 다 사라질 정도라면 동물의 영혼만 타겟팅해서 죽이는 악령 수십 정도가 산에 퍼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런 낌새가 보였다면 수도에다 연락했을 거고, 그 연락을 받은 수도는 근처에 있던 자신에게 왕명을 내렸을 테니까.
그러니까 아마도 불굴의 장군과 그 수하들이 영주 몰래 이 산에 숨어있는 거리라.
굳이 이 산인 이유는, 이 산에 있는 동굴만 넘기면 수도로 직행할 수 있는 숲이 나오기 때문이겠지.
그 특성 때문에 바리치온의 영지는 무력이 높은 사람이 통치하게 된다.
이 도시의 사람도 6레어도의 스킬 보유자라던가?
그 정도라면 수도의 기사단에 부대장으로도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긴 하니 확실히 강하지만…….
“상대가 안 좋네.”
“그러네요.”
상대는 8레어도의 스킬을 보유한 불굴의 장군.
아무리 본인의 전투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레어가 2개나 차이가 나면 상대하기 힘들겠지.
그리고 불굴의 장군이라는 이명답게 병사들을 데리고 있을 거고.
병사들의 실력 차이까지 생각해본다면 영주 입장에서는 왕궁에 이상이 있다고 보고한 다음 영지민만 지키는 것이 최선이리라.
아니, 어쩌면 그냥 숲속에 무슨 이상이 있다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 수도 있겠지.
불굴의 장군 아래에 있는 녀석들은 기사가 아니라 병사니까, 옷에다가 싸고 말리면서 몇 날 며칠을 잠복할 수도 있을 테니까.
“뭐, 일단 가봐야 알겠지?”
“네?”
“곰 사냥하러 간댔잖아. 사냥철인지 물어보려고. 사냥철이 아닌데 사냥하면 곰들이 아래로 내려온다거나 그런 문제가 생기거든.”
“아하……, 금어기 같은 건가요?”
“응. 레이시, 미네르바랑 같이 귀족 전용 여관에 가서 방을 잡아줘. 4개 부탁할게.”
“네.”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레이시는 엘라와 미스트, 아샤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석에 앉아 하양이를 데리고 움직였고, 엘라는 코코를 빌려간다면서 코코의 목줄을 잡고 따라오라며 끌고갔다.
미네르바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산 안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젓기 시작했다.
엘라나 아샤는 감이 나쁘지만, 미스트라면 자기가 알아차린 걸 알아차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미네르바는 마차 안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여관을 발견하고는 레이시에게 저기가 아니냐고 물어봤다.
“아! 맞아요. 고마워요.”
“그럼 상으로 나랑 같이 씻어주라.”
“아하하, 그럴까요? 애들부터 씻기고 우리끼리 씻어요.”
레이시의 말에 배시시 웃으면서 미르와 레아를 포대기로 안은 다음 가슴에 기대게 하는 미네르바.
그렇게 미네르바가 한참 기대감을 부풀일 때 엘라는 영주의 저택에 도착해서 영주와 대면하고 있었고, 영주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괜찮아. 너를 책망하려거나 그럴 생각은 아니니까.”
“죄송합니다, 공주님. 바리치온의 이름을 받고도 이런 추태를 보여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전대 바리치온도 이런 식으로 충정심이 대단했었지.
왕궁의 도주로 중 하나를 맡고 있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인선이지만, 적을 상대로 두고 농성 중이라고 머리를 바닥에 쳐박으며 사죄하는 모습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애초에 네 행동은 옳았어. 밖에 있는 건 미련 곰탱이거든.”
“곰탱이라고 한다면……!?”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곰탱이만 있는지 곰탱이의 새끼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쯤이면 입구를 뚫는 방법을 찾고 있겠지.”
“아,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응?”
“제가 귀족이 될 때 듀세리안 국왕님께서 바리치온의 상징에 왕가의 피와 함께 제게 하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용병 생활 때 모은 돈으로 온갖 금속으로 보강했습니다.”
“엉……?”
“국왕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왕가의 연금술사님과 함께 작업해서 왕가의 피에만 반응하게 하도록 만들었고, 그다음에는 물리적인 공격에 무너지지 않게 위장막 뒤에 아다만티움으로 벽을 만들었습니다. 쉽게 뚫을 수 없을 겁니다. 겉보기에는 그저 강철 합금으로 보이지만,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뚫을 수 없을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불굴의 장군이 여기에 계속 머무는 것도 이상했네.
작전의 성공률을 높일 거면 수도 안에서 수도의 구조를 파악하고 사보타지와 함께 암살을 시도하는 게 이상적이었을 텐데.
과도한 충정심이지만, 이런 건 마음에 드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바리치온에게 자신에게 특별히 곰의 사냥을 허락해줄 수 있냐고 물어봤고, 바리치온은 베어 마운틴은 오라토리엄 왕가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그럼 그렇게 알게. 그런데…….”
“네. 혹시 원하는 게 있습니까?”
“웅담이 그렇게 좋다던데,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네? 아! 네. 와인으로 숙성된 웅담이 있습니다. 공주비님과 함께 드실겁니까?”
“응.”
“그렇다면 저희 저택의 셰프에게 부탁해두겠습니다. 그러니까…….”
“6인분 정도로 준비해줘.”
“네. 알겠습니다.”
용병 출신이라 그런지 이런 부분에선 널널하네.
엘라는 이런 건 좋다고 생각하면서 영주의 어깨를 두들기며 나중에 귀족 전용 여관으로 셰프를 보내면 된다고 말했고, 영주는 엘라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숲의 출입 허가증을 엘라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엘라는 우선 산책만 조금 하고 오겠다면서 출입증을 들고 밖으로 나갔고, 미스트는 엘라가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오늘은 몇 명 잡을 거냐고 물어봤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한 3명은 잡아야겠지. 영주 저택을 관찰하던 녀석 말야.”
“아하, 그렇다면 제가 안내할게요.”
엘라의 말에 싱긋 웃으면서 숲으로 들어가는 미스트.
그리고 나무의 그림자에 숨은 미스트는 별안간 몸이 슬라임처럼 녹아내렸고, 잠시 후 숲 안쪽에서 기절한 사람 세 명을 질질 끌고 앞으로 왔다.
“환영으로 더미도 설치했으니 한 이틀 정도는 모를 거예요.”
“으겍, 언제봐도 그거 참 이상하단 말이지.”
“브레인 이터 말인가요? 나름 일 잘하는 귀여운 아이인걸요.”
“네크로맨서들도 안 쓰는 녀석을 그렇게 말하는 건 너밖에 없어.”
“나름 귀여운데. 비침습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면 레이시에게도 썼을 걸요? 침습적인 효과라서 문제지.”
“……너, 위험한 상상을 하는 거 아니지?”
“예이, 저도 선은 지킨답니다? 그래도 공주님도 보고 싶지 않으세요? 완전히 백치가 되어서 아양부리는 레이시요.”
“…….”
“후후, 그렇죠?”
“나는 소환마법에는 재능 없어. 소환해봤는데 내 마력을 못 견디고 소환수의 몸이 터지더라.”
“그땐 저도 있었죠. 아샤는 있었나요?”
“……나는 불사조라고 불리는 피닉스가 단번에 죽는 모습은 그때 처음 봤어.”
“아니, 그건 나도 할 말이 있는 게 소환사들이 불사조 같은 신수는 마력을 전부 다 불어넣듯 해야 한다고 말해서 다 불어넣었을 뿐이라고? 근데 그게 그렇게 터질지 몰랐지. 그래도 불사조의 심장 같은 것도 얻었고 나름 이득 아냐?”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이 없기는 한데…….”
정말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아샤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저 멀리 커다란 곰이 자기를 관찰하며 덜덜 떨자 어떻게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죽일까? 말까?
괜한 고기를 만들었다가 버리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아샤는 엘라를 바라봤고, 엘라는 코코의 이마를 쓰다듬어주다가 저 곰에서 자기들이 먹을 양을 딱 떼어놓으면 나비랑 코코가 먹을만한 양이 나오겠다고 말했다.
“아, 그러네. 우리만 고기를 먹을 순 없구나.”
“식비가 꽤 나온단 말이지.”
“신수 언저리의 맹수 한 마리랑 태생 자체가 강한 맹수잖아. 어쩔 수 없지.”
“하긴, 그 정도 돈이야 매일매일 빠져나가도 별 상관없지만.”
어깨를 으쓱이면서 웃는 엘라.
아샤는 엘라의 웃음에 한숨을 내쉬면서 도끼를 던졌고, 곰의 머리가 뚝하고 떨어지자 곰의 시체를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영주에게 보여주는 게 좋겠지? 이 머리.”
“그러네. 시체 도축 같은 건 아무래도 귀찮으니까.”
엘라의 말에 아샤는 미스트를 바라보며 아공간에 넣으라는 듯 턱짓했고, 미스트는 아샤의 턱짓에 어깨를 으쓱이면서 곰을 아공간에 던져놓고 마을로 돌아갔다.
“흐아아암……, 레이시는 제대로 갔고, 그나저나 미스트. 곰 고기는 어떤 맛이야?”
“육구가 맛있어요.”
“응?”
“곰발바닥이 제일 맛있어요. 적어도 제 입맛에는요.”
“웅담은?”
“웅담이라, 그냥 약으로 먹는 거죠.”
“……효과는 있어?”
“글쎄요? 약효를 증폭시키는 음식은 있어요.”
“부탁할게.”
“네.”
곰 고기가 맛이 없다면 약효라도 제대로 봐야지.
엘라가 그렇게 말하자 미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아샤는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섹스에 미친년들이라며 욕을 퍼붓다가 엘라가 안 할 거냐고 물어보자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씩씩거리면서 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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