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4화 〉 떠나기 전 다시 짧은 만남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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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가 거처를 옮기고 10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레이시는 에일렌과 함께 산책하면서도 저녁에는 엘라와 함께 조사단의 보고를 들으면서 말뚝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고, 곡창지를 벗어나고도 3km를 추가 수색했는데도 말뚝이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는 말뚝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무래도 싸우다가 휘말렸나 보네. 제단을 만들었다고 해도 몬스터를 불러서 싸움을 붙인 후라면 아무런 용도가 없으니까 공을 쏟을 필요가 없잖아.”
“그런가봐요. 다행이에요.”
“그러게.”
이제는 정말 공사만 남은 거구나.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그렇게 생각하다가 기지개를 켜면서 저녁 산책을 다녀와도 괜찮겠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전서구가 날아오자 미네르바와 함께 가면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레이시는 배시시 웃으면서 미네르바와 함께 밖으로 나갔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손을 잡고 바리케이드를 넘어갔다.
“저녁 바람이 좋네요.”
“으음, 나는 강바람이 더 좋다. 여긴 피냄새가 난다.”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땅속 깊숙한 곳에서 나는 냄새다. 드래곤 피 냄새라더니 파충류 냄새가 지독하다.”
“아하하하…….”
드래곤이 파충류라니, 드래곤이 들으면 화날 말이네.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자기가 봤었던 드래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지성만 따지면 천공섬에서 봤던 거대 뱀이 더 뛰어났고, 무력으로만 따지자면 옆에 있는 미네르바가 더 뛰어나다.
그렇기에 지금의 레이시에게 있어서 드래곤이란 전생의 타이거 같은 희귀한 잡종 맹수에 가까웠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말에 키득키득 웃다가 달을 보며 멍하니 걷기 시작했다.
“뭘 보나? 레이시.”
“으응, 슬슬 한 달 째죠?”
“응? 응. 미스트 말하는 거라면 맞다. 공사 시작한지는 아직 2주하고 조금 더 정도밖에 안 됐다.”
“그렇구나.”
“보고 싶나?”
“으응, 솔직히요.”
앞으로 일주일 정도만 있으면 공사를 끝내고 수도로 돌아갈 수 있다지만, 못 본 지 너무 오래됐다.
그리고 그런 것도 신경 쓰이지만 무엇보다도 조금 있으면 블루드를 처리하러 갈 사람이라는 것이 신경 쓰였다.
이번에 가면 다치고 오지는 않을까?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고 있으니 돌아오지 못 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블루드라는 그 끔찍한 사람이 평생을 걸쳐서 모은 군단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걱정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미스트를 보고 싶어졌다.
미스트의 품에 안겨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체취를 맡고 싶다.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뒤를 돌아보았고, 큰 강을 기준으로 구역을 나눠 복구하고 있는 농업지대가 보였다.
“올해는 순무로 넘긴다고 했었죠?”
“그랬었다. 빨리 자란다고 심는댔다.”
“내년에는 과일이 열리면 좋겠네요.”
“과수는 사서 심는댔다.”
“들었어요, 아무래도 나무는 작물이랑 다르게 쉽게 안 자라니까 그런 거겠죠?”
할아버지 농장에서 봤었던 사과도 5년은 걸렸으니까, 새로 심는다고 한다면 아마 몇 년은 있어야 사과가 나오지 않을까?
다른 과수도 마찬가지고.
파인애플 같은 건 6개월이면 되니 빨리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걷자 레이시는 미네르바에게 이제 우리들이 여기에서 할 일이 없을 테니 미리 수도로 돌아가서 미스트를 기다릴지 물어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질문에 자기는 레이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헤헤, 그럼 한 번 말해볼까요?”
“그래도 좋다.”
“그럼 돌아갈까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기사단이 임시로 지은 감시탑을 바라보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가 뭔가 있냐고 물어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시선에 아무래도 일찍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네?”
“이런 소리에요.”
“꺄아악!? 에? 에? 에에에!? 미, 미스트!?”
“후우, 조금 급하게 왔는데 잘 됐네요. 이대로라면 엇나갈 뻔 했어요.”
등 뒤에서 나타나는 미스트.
평소에 늘 입던 정갈한 복장이 아니라 모험하기 편한, 조금은 흐트러진 복장의 미스트의 모습에 레이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환하게 웃으면서 미스트에게 안겼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많이 기다렸냐고 물어봤다.
“어디 안 다쳤어요?”
“네, 괜찮아요. 자료도 충분히 얻었고요.”
호들갑을 떠는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춘 미스트는 엘라에게 돌아가자며 레이시의 손을 잡아끌었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손길에 배시시 웃으면서 산책을 조금 이르게 끝냈다.
그리고 조사단에 도착했을 때, 흑창 기사단은 미스트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 굳어버렸고, 레이시는 그런 흑창 기사단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흑창 기사단하고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며 엘라가 급하게 무장시킨 사람들에게 미스트의 정체를 설명해주었다.
“으응, 아는 사이는 아니고 훈련할 때 옆 건물을 빌려 썼거든요. 아마 제가 훈련시키는 걸 보지 않았을까요?”
“아하…….”
그걸 봤구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레이시는 미스트의 대답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고, 기사들은 레이시의 인사에 어색하게 웃다가 엘라가 있는 곳까지 레이시와 미스트를 호위했다.
그러자 엘라는 전서구가 가져다준 편지를 흔들면서 왜 둘이서 나갔는데 셋이 되어서 들어온 거냐며 농담하면서 에일렌이 방금 막 잠들었으니 깨우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
“네, 그럼 나긋나긋 말할게요. 우선 블루드 왕자님의 군대 말인데요.”
“응, 총 몇이야?”
“숫자야 별로 상관 없지 않나요? 한 30%만 쓸어도 도망칠 걸요? 사교도들은 그러지 못하게 막아뒀겠지만…….”
“그건 그렇지.”
“이상하게 검성이나 불굴의 장군이 안 보이더라고요. 연맹의 매야 박쥐짓을 하고 있을 테니 안 보이는 게 정상이지만……. 적어도 그 둘은 엘라 공주님에게 원망을 지니고 있을 텐데 말이죠.”
“저어…….”
“왜? 레이시.”
“왜 그 두 사람이 엘라에게 원망을 품은 건가요? 검성은 엘라랑 활동 영역이 달라서 마주칠 일이 없을 거 같고 장군님은 그러니까……, 시아버님 연배시잖아요. 그런 사람이 엘라를 그냥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원망이나 한다니까 조금 이해가 안 돼요.”
“아, 그거? 별 거 아냐.”
“뭐라고 하셨는데요?”
“저번에 공적인 연회에 갔을 때 마법사들은 전위가 지켜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거든. 뭐, 연맹국은 그때도 개판 5분 전이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단결하고 싶었던 거겠지.”
엘라의 말에 엘레오놀이 말해줬었던 연맹국의 상황을 떠올려보는 레이시.
레이시는 엘레오놀이 반쯤 농담으로 하는 삿된 말이 아니라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을 했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어색하게 웃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웃음에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하여튼 공공적으로 나를 깠으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그, 렇죠?”
사석이라면 넘어가겠지만, 사람들 앞에서 무시를 당했는데 그냥 넘어가면 그걸로 또 꼬투리를 잡을 거니까.
어느 정도 감을 잡았기에 레이시는 엘라가 그때 심한 말을 했구나 싶어서 무슨 말을 했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질문에 별말은 안 했다면서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비꼬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휘두르는 칼이라고는 지 좆만 한 게 전부인 개새끼가 그것도 칼이라고 자랑이나 해대니 이 나라 수준도 알겠다, 이 거지발싸개야. 그러고 보니까 쾌검이 장기라더니 그거 니 좆이 작아서 무게가 없어서 그런 거 아냐? 아니면 조루라서 상대 눈에 좆물이라도 싸서 시야를 가린 다음 좆만 한 단검으로 후비는 게이 새끼라 검성이냐? 니 애비가 후장 따주면서 명령내리니까 좋든?”
“…….”
“그땐 말이 좀 험했지. 13~14살 때였으니까……, 그 때 내가 뭐 죽이고 있었더라?”
“그랑메르 강 기준 동쪽을 지배하고 있던 마약상단이요.”
“아, 맞아. 하여튼 그딴 새끼들 죽이느라 입이 마약 하던 놈들과 비슷하게 걸어졌어.”
“어, 어음…….”
“하여튼 지가 먼저 시비 걸었으면서 내가 맞받아치자 길길이 날뛰더라고. 그래서 대련으로 누가 위인지 정하자고 정했고, 발라줬지.”
“정확하게는 흑마법 중에 6위계 웨폰 댄서라는 마법을 사용해서 장기이던 쾌검으로 압도하셨죠. 마법사가 전사를 흉내 내기 위한 마법이라 쓸모없다고 논평이 나돌던 마법이라 다들 경악했었죠.”
“그 뒤로는 절차탁마해서 힘을 쌓아서 8랭크 정도의 검술 스킬을 얻었다는데, 정작 스킬에 의존해서 검술은 엉망진창이야.”
“그, 그런 걸 알 수 있어요?”
“나는 아샤에게서 훈련을 받았으니까. 아샤는 진화 전에는 탐욕의 야차였어. 스킬만으로는 내게 못 이긴다는 걸 깨닫고는 곧바로 무술을 섭렵했고, 그 이후로 승률이 딱 5 대 5가 되고 나서는 서로 마법과 무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떻게 상대하는지 알려줬지.”
“그럼 아샤도 마법을 쓸 수 있나요?”
“아니?”
“네? 왜요?”
“어떻게 쓰는지는 알지만 몸으로 하는 게 더 효율적이잖아. 굳이 따지자면 그건 그리폰의 비행을 와이번이 배우는 거랑 똑같아.”
“그치만 엘라는 무술을 알잖아요?”
“음, 그렇지. 그러니까 그냥……, 아샤의 기술은 내게 효과적이었고 내 기술은 아샤에게 쓸모가 없었다고만 알아둬. 하여튼 스킬로만 휘두르는 검사라 다시 붙었을 땐 더 처참하게 발라줬지. 그러니까 거의 뭐, 부모 죽인 것처럼 지랄하더라. 정작 지 애미새끼는 즈그 애비새끼가 죽였더만.”
“……에?”
“불굴인지 불능인지가 죽였어. 독살로. 아마 지 아들이 자기를 이어서 당주가 되었을 때 잡음이 나오는 걸 막으려고 한 거겠지. 그런데 난 그딴 짓 해야만 제대로 돌아갈 가문이면 좆 되는 게 더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해.”
“아하하하…….”
“뭐, 그래서 전쟁에 나갈 땐 암살자가 됐든 장군이 됐든 내 목을 노리고 올 줄 알았는데……. 고작 두 번 절망했다고 포기할 줄은 몰랐어. 얻은 스킬치고는 쓰레기 같은 놈이네.”
어깨를 으쓱이면서 검성을 비웃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비웃음에 엘라가 너무 뛰어나서 그런 거 아니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질문에 그렇다고 해서 두 번 절망했다고 완전히 뻗어버릴 정도라면 애초에 싹수가 노랗다고 대답해주었다.
“나라고 절망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완성되지 않았을 땐 함정에 뒤질 뻔하거나 마력 고갈로 죽을 뻔하면서 절망도 수십 번은 더 했어. 그래도 안 하면 뒤지니까 이겨냈고. 미스트는 생존 자체가 절망이었고 아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에 잡아먹히나 마냐로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 살았어. 미네르바도 돌연변이로 태어나 배척받다가 결국에는 저주에 걸렸었지?”
“우후후, 저는 절망감 같은 건 잘 못 느끼지만요.”
“나도.”
“나, 나는……. 으음, 나도 그런 거 모른다.”
엘라의 말에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레이시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어색하게 웃다가 자기는 절망하면 포기해버릴지도 모르겠다면서 미스트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미스트는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수상한 점들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불굴의 장군 특유의 불멸대대는 집합장소에 있더군요.”
“와, 불멸대대, 개 오그라들어. 그거 내가 마탄 한 번 쏘면 죽지 않나?”
“죽죠? 하지만 이름이 중요한 거잖아요? 대역까지 세웠더군요.”
“그래, 불멸대대는 거기에 있고 대역도 있다……. 진짜는 어딨는데?”
“그게 미스테리에요. 아예 사라졌어요. 직접 그 현장에 잠입해서 조사도 하려고 했는데, 블루드 왕자님이 깨끗하게 정리해둬서 찾지도 못하겠더라고요.”
“흐으으음……. 그래? 그럼 그 부분은 그냥 감수할까…….”
“그러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하아, 뭐, 상관 없겠지. 그럼 그렇게 하고……, 오늘은 어른들끼리 술이라도 마시자.”
럼을 꺼내면서 키득 웃는 엘라.
미스트는 내일 출발하는 거 아니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엘라가 병을 뜯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잔을 돌리면서 안주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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