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화 〉 케톤증1
* * *
“정말 뭔가 할 일이 하나도 없네요.”
아샤와의 낮잠 이후, 레이시는 놀랄 정도로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 중 하는 일이라고는 에일렌과 놀거나 미르와 레아를 돌보고 걸음마 연습을 시켜주는 것밖에 없으니까.
“으으으응…….”
서류 일을 도와주려고 해도 엘레오놀이 산만한 서류를 한 시간도 안 돼서 정리해버리고, 조사단에 가면 조사단의 사람이 엘라의 눈빛에 바짝 얼어붙어서 뭘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미네르바와 사냥을 나가자니 하양이의 등에 올라타는 사이에 나비랑 코코를 데리고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고, 아샤의 일을 도와주자니 무술이나 전법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도와주지도 못하고…….
전생에 알바할 땐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막상 되고 나니까 너무 심심하다.
“후아아암…….”
애들에게 젖을 물리고 걸음마 연습을 도와주는 것도 좋긴 하지만…….
“심심하네.”
차라리 왕궁에 있을 때처럼 엘라나 미스트에게서 서류를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그것도 안 된다면 최소한 산책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해봤지만, 밖을 보자 레이시는 산책에 대한 마음을 접기 시작했다.
물도 끓이고 정제해서 마시는 상황에 산책은 무슨 산책…….
산책 나갔다가 에일렌이 엄한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러고 싶다가도 그러기 싫어진다.
“흥…….”
전과 다르게 마을 사람들을 과하게 경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가 셋이나 되다 보니 모두에게 잘 대할 수가 없었다.
아마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도 자기 가족에게 나쁘게 대한 사람들은 죽어도 친절하게 대하지 못하겠지.
레이시는 그런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래도 가족에게 그러는 사람에게까지 친절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다시금 소일거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뭐해?”
“아샤! 에헤헤, 돌아왔어요? 수고하셨어요.”
“지루한가봐?”
“윽. 그, 그게.”
“뭐,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까 심심할만 하겠네. 산책도 못 나가고.”
“우우, 그렇죠?”
아샤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더니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물어보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면서 땅을 치료할 방법은 발견했고 이제 공사를 준비중이라고 말했다.
“공사요?”
“응. 아무래도 땅을 갈아엎어야 할 거 같아.”
“그렇구나, 은근히 대공사네요.”
“뭐, 근처 도시에서도 차출하면 사람이 몇십만은 되는데 금방 하겠지.”
“그 사람들이 원래 하던 일들은 어떻게 하고요?”
“대장장이, 군인, 상인 외에 누가 원래 업무를 할 수 있다고?”
서류를 처리할 수 있는 공무원들은 직책이나 원래 활동 분야 따지지 않고 공사에 투입될 거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길드에서 특별히 허락한 사람 외에는 장사를 접을 것이다.
“애초에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8할은 농업으로 먹고사는걸?”
“농업만으로 이런 대도시가 된다고요?”
“안 될 건 뭐야? 수익이 작다면 많이 팔면 되잖아.”
“아하.”
“애초에 짐승을 쫓는 기술이나 해충을 없애는 기술 같은 걸 개발하면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을 테니까.”
마법이든 연금술이든 전법이든 그런 것들을 개발해서 얻는 로열티도 무시하지 못하고 작물의 생산량도 무시하지 못한다.
재배해서 얻는 식량인 만큼 값이 싸기는 하지만 천 개, 만 개를 팔다보면 어지간한 물건보다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
특히 계절에 맞지 않는 과일 같은 경우에는 가격이 꽤 비싸지니 그것을 팔아 돈을 번다면 나름 이런 대도시를 유지할 수도 있다.
아샤가 그렇게 말하자 레이시는 확실히 그건 그런 것 같다면서 고개를 끄덕거렸고, 아샤는 레이시의 대답에 키득 웃으면서 공사가 진행되면 더 지루해질 거라고 말했다.
“왜요?”
“에일렌과 마을 애들이 싸웠고 엘라랑 네가 거기에다 대고 강하게 화를 냈잖아. 그것 때문에 너희가 떠나면 진짜 망하거든.”
“에에에……?”
“3차에는 직접 해결해야겠으니 스트라이크 가문에서 사람이 나올 거고, 그렇다면 그동안 지원한 금액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세율을 높이고 먼지가 나오나 안 나오나 확인하기 위해서 상단이란 상단은 다 탈탈 털어버릴 테니까. 길드도 털릴 거고. 그러면 한동안 높으신 분들의 생활이 불편해질 거 아냐?”
“아하.”
“그러니까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아랫것들을 단속하면서 정말 조용히 있을 걸? 물론 그거 때문에 생기는 일은 감시해야겠지만……, 네가 나설 일은 없을 거야.”
어색하게 웃으면서 뺨을 긁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다가 산책을 갈려고 해도 땅이 이래서야 갈 곳도 없다면서 낮잠을 자는 에일렌의 배 위에 손을 올렸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정 안 되면 에일렌의 훈련이나 봐주겠다고 말했다.
“격투술 훈련을 배우면 밀치는 것 정도야 가볍게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배워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은데.”
“마수는 어떻게 하고요?”
“이제부터 전면전을 더 많이 할 테니까 나는 그렇게 일 많이 안 해도 돼.”
“정말요?”
“응, 조사는 계속하겠지만, 조사 자체는 거의 다 끝났고, 이제 공사를 해야 하는데 공사 인부를 기사들이 전부 지키는 건 아무래도 무리잖아. 그러니까 공사하는 곳은 병사들도 함께 지키니까 수성전이나 대규모 전쟁에 가깝지.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어.”
“그렇구나…….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레이시도 배울래?”
“저도요?”
“응. 어때?”
“으으음…….”
에일렌이 배우니까 나도 배우는 게 좋으려나…….
전생의 교육 프로그램에서는 부모가 같은 걸 배우면 애들 교육에 좋다고 했으니 한 번 배워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레이시는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에일렌을 위해서라도 한 번 배워보겠다면서 아샤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거렸고, 아샤는 레이시의 대답에 그럼 내일 보자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에일렌과 함께 훈련장에 들어간 레이시는 아샤에게 무슨 훈련을 시켜줄 거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잽하고 스트레이트만 가르칠 거라고 말했다.
“그거 두 개만 잘해도 어지간한 녀석은 알아서 쓰러질 테니까.”
“정말요?”
“격투를 잘하는 방법은 특별한 게 없어. 그냥 잘 피하고 잘 때리면 돼. 복싱은 그걸 하려고 몸을 깎아내는 기술이고.”
“으으응. 말이야 그렇죠……?”
“그리고 전문적인 기술은 둘 다 어느 정도 틀이 잡힌 다음에 해야지. 지금 레이시는 힘하고 스킬만 있고 에일렌은 둘 다 없잖아.”
“으응, 그럼 잘 부탁해요, 아샤.”
“잘 부탁해, 엄마아아.”
“그래, 그래. 그럼 일단 따라해볼래? 손목이 안 아프게 때리는 법부터 가르쳐줄게.”
샌드백을 들고 오더니 주먹을 쥐는 법부터 시작해서 뻗는 방법까지 가르쳐주는 아샤.
레이시와 에일렌은 아샤의 지도를 그대로 따르면서 펀치를 배웠고, 아샤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에일렌 먼저 지도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 정도 지난 후 아샤는 레이시에게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주더니 자기 흉내를 낼 수 있겠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느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대, 대련 하자고요?”
“응. 나는 앞에서 멈출 테니까 레이시는 있는 힘껏 때려.”
아샤의 말에 레이시는 어색하게 웃다가 아샤의 스킬을 흉내내기 시작했고, 이내 스킬이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 그럼 할게요?”
“응.”
아샤의 허락에 곧바로 주먹을 휘두르는 레이시.
스킬의 덕분인지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서 주먹질을 별로 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시의 주먹은 매서운 파공음을 내면서 아샤에게 쏘아졌다.
“에?”
하지만 아샤는 레이시의 주먹을 가볍게 튕겨내면서 레이시의 코앞까지 주먹을 휘둘렀고, 레이시는 자신의 눈앞을 검은색 글러브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계속 해볼까?”
“아, 네.”
아샤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세를 잡는 레이시.
아샤는 이번에는 발까지 써도 된다면서 피식 웃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전생에 태권도를 배웠던 것을 떠올리며 다리를 좀 더 넓게 벌리면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종합격투기 채널에서 봤었던 것처럼 카프 킥을 날려봤지만, 아샤는 발에 힘을 빼더니 카프 킥을 그대로 흘려버린 다음 레이시의 턱에 주먹을 갖다 대었다.
“엣.”
“스킬만 있으니까. 검성이 레어도 8의 스킬을 지녔음에도 약한 것도 스킬만으로 싸워서 그래. 반대로 미스트가 강한 건 레어도 5나 6의 스킬이라도 그것을 200% 활용할 수 있어서고.”
“으, 으으응.”
“레이시라면 힘도 세고, 복사한 스킬이 나나 엘라의 것이니까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강하겠지만, 만약의 사태가 있으니까 알아두기만 해둬.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꽤 크니까 말야.”
“으응, 그럴게요.”
아샤가 말한 건 블루드에 대한 걸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다시 자세를 잡더니 이번에는 잽으로 시야를 가린 다음 아샤의 옆구리를 노리고 돌려찼다.
하지만 아샤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레이시의 발을 잡은 다음 레이시의 가슴에 주먹을 뻗었다.
“스킬에 의한 거면 조금만 눈썰미가 있어도 다음 동작을 알 수 있어. 초견만 피하면 어떻게든 파훼할 수 있어.”
“으, 으응. 그렇군요.”
“자, 오늘은 스킬에 휘둘리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부터 시작할까?”
에일렌과 한 시간씩 교대하면서 하자고 말하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이게 다 필요하니까 가르쳐 주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훈련을 따르기 시작했다.
“헤엑, 헤엑…….”
“마망, 괜찮아?”
“네, 네에에. 조금 지친 거 뿐이에요. 에일렌.”
“우으으응.”
그 결과, 레이시는 땀을 비처럼 흘리면서 훈련장 구석에 앉았다.
평범하게 움직이는 거라면 지치지 않지만, 계속 뭔가 신경 써서 움직여서 그런지 정신적으로 지쳐버렸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에일렌의 볼을 쪼물거리다가 에일렌은 재미있게 놀았냐고 물어보면서 같이 씻자고 말했고, 에일렌은 레이시의 말에 환하게 웃으면서 레이시의 품에 안겼다.
“아이참~, 끈적거려요오~.”
“에헤헤헤!”
“새 옷 입어야겠네요.”
에일렌을 안아들고 욕실로 가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를 뒤따라가면서 앞으로 가끔씩 이렇게 훈련하자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고 왜 하는지 모를 일이라도 아샤와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재미있고 기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도시에서 할 일이라고는 애들하고 노는 거 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아샤와 함께 에일렌을 씻긴 다음 미르와 레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미르와 레아는 레이시를 보자마자 엉금엉금 기어오기 시작했다.
“에헤헤, 잘 지냈어요?”
“마우!”
“으뮤우우우!”
“에헤헤, 마망에게 와요오.”
“레이시, 쪼그려 앉은 채 걸어가고 있잖아.”
“하지만 애들이 기는 건 힘들어 보이는 걸요.”
“아니, 오라고 해놓고 네가 가면 어떻게 해?”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미르와 레아를 보니까 어쩔 수 없다면서 둘러댔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피식 웃더니 레이시의 머리를 꾹 눌러준 다음 미르와 레아를 껴안고 침대에 올려주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차라리 애들 전용으로 매트라도 깔까? 연무장에 있는 것보다 부드러운 걸로.”
“아! 그거 좋네요. 에헤헤. 그렇게 해요!”
“그래, 그나저나 아이는 몇이나 더 낳을 거야?”
“에……?”
“그냥, 나도 엄마잖아. 들어보고 싶어서.”
“그, 그건 잘 모르겠어요. 에, 에헤헤헤……. 이, 일단 되는 대로……?”
얼굴을 붉히고 어색하게 웃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얼굴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가족이 한 16명은 되야 만족할 거냐면서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는 그래도 되는데 네가 너무 힘들지 않을까?”
“에, 에헤헤……, 그래도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인걸요.”
“하긴 너는 네가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하면 아이를 가지지 않을 수 있지?”
“네.”
“그럼 많이 낳자. 도와줄게.”
“에헤헤, 사랑해요, 아샤.”
아샤에게 안겨서 눈을 감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를 안아주다가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미르와 레아를 돌보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에일렌과 함께 책을 읽으면서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