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0화 〉 망친 데이트1
* * *
“으응, 가뭄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됐다는데 다들 얼굴이 많이 피곤해보이네요.”
“대형 마수들끼리의 싸움은 최소 10일은 지속되니까, 아마 10일 동안 계속 공포에 떨었겠지. 이번에는 서로 공멸했다지만, 잘못하면 대형 몬스터의 추격을 뿌리치고 다른 도시로 이주해야 했을 거거든.”
“으응.”
“공포가 풀렸는데 이제는 굶어 죽게 생겼으니 어쩌겠어? 그것도 여름이잖아. 지금 막 과일을 수확할 때인데 그걸 다 죽였으니……, 정신이 나가겠지.”
단순히 먹고 사는 거라면 영주의 자산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비축분이 적은 것도 아닐 테니까,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평소보다 식량 소비량이 많아도 충분히 살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다.
1년의 노력을 들여서 키운 과일이 전부 못 쓰게 됐고 다시 기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게 문제다.
10년 정도가 지난다면 자연적으로 땅이 회복되겠지만, 10년 동안 계속해서 배급을 받고 살 수도 없고, 10년 뒤에 되돌아온다고 해서 과수원을 다시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아마 지금 미래가 새까맣게 변해 있지 않을까?
젊은 사람들이야 그래도 괜찮겠지만, 40대가 넘어간 사람들은 새로 기술을 배우기도 힘들 테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샤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런 요소가 전부 다 섞여서 이런 반응일 거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눈을 돌려 젊은 사람들과 중, 장년층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확실히 다른 반응을 보였고, 레이시는 가족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사람과 새로운 곳에 정착할 자신이 없어 망설이는 사람들을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뭐, 그래도 이제 조사단이 생기고 그러니까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겠지. 일은 해야겠지만.”
아샤의 말에 다들 잘 할 거라고 말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마차 안에서 봤을 때 이런 일이 한, 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고 치료 방법도 다 있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말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피식 웃더니 그건 그렇다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여튼 대규모 공사가 시작될 테니 그 다음부턴 엘레오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달린 일이지.”
땅을 갈아엎고 땅을 위한 비료도 뿌리고 나무도 심고 정령도 부르고 온갖 난리를 피워야 할 텐데 이 사람들이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아샤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을의 사람들을 바라봤고, 다소 지쳐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과일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단번에 시선에 꽂히기 시작했고, 아샤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눈을 흘기다가 레이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레이시의 입에 과일을 넣어주었다.
“으응? 왜요?”
“아니, 좀 걸리적 거리는 게 보여서.”
어느 마을이던 간에 지금 자기 마을에 없는 걸 즐기는 이방인이 보이면 배알이 꼴려서 시비를 거는 사람이 나온다지만, 이렇게 곧바로 나올 줄은 몰랐네.
아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을에 대한 평가를 깎았고, 이내 자기 앞을 남자들이 막자 한숨을 푹 내쉬면서 어느 수준으로 때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에잇.”
“아.”
하지만 아샤가 고민을 하는 사이 레이시가 먼저 움직이며 아샤의 생각을 끊어주었다.
땅에 일직선으로 길게 홈이 파인 도로.
사람들은 그 홈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레이시의 손에 감긴 채찍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당황하면서 레이시를 쳐다봤다.
“하나 더 만들어드리기 전에 저리로 가요.”
싱긋 웃으면서 골목길을 향해 손을 뻗는 레이시.
사람들은 천천히 홈과 레이시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뒷걸음질 쳤고, 레이시는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자 아샤에게 팔짱을 끼면서 애들도 저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면서 애교를 부렸다.
“어…….”
“으응? 아샤?”
“아니, 으응. 그게.”
“에헤헤, 아샤가 싸우면 저 사람들이 다칠 거 같아서요.”
“나는 경외의 야차니까 그냥 집어삼키면 되는데…….”
“츗. 그것보다 빨리 가요.”
“으으으응…….”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아샤는 레이시의 반응에 멋쩍게 머리를 긁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걸음을 옮겼고, 레이시는 아샤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을이 이렇게 되기 전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한가한 카페에서 찾은 그림.
레이시는 그 그림을 보면서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라며 배시시 웃었고, 카페 사장은 레이시의 웃음에 그렇게 환하게 웃어주니 기분이 좋다며 공주님이 왔으니 이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우리 공주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라오.”
“헤에, 어느 부분이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몬스터를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고 혼자서 쓰러트리시는 분이시지. 오라토리엄 왕국에 범죄자들이 발을 디디지 못하는 이유가 엘라 공주님 덕분이라고 한다오.”
“그렇구나.”
아샤를 보면서 저게 정말이냐고 물어보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였다.
반은 정답이고 반은 틀린 말.
“엘라가 강하니까 타국의 쉽사리 뿌리 내리지 못하는 건 맞긴 하지만, 일반적인 범죄자가 오지 않는 건 오라토리엄 왕국의 비밀요원의 노력이 크지.”
“으응, 뭐가 달라요?”
“타국의 비밀요원에게 우리의 비밀요원을 보내면 아무래도 공멸의 가능성이 있거든. 애초에 원래 쳐들어가는 쪽이 불리하기도 하고. 그래서 최대한 손해를 줄이기 위해서 엘라나 나를 보내.그래서 반은 정답이지.”
“그럼 일반 범죄조직은 비밀요원이 하는 건가요?”
“응, 그렇다고 해서 비밀요원들이 질이 떨어진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하여튼 저 사장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지.”
아샤의 설명에 눈을 빛내면서 비밀요원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레이시.
아샤는 에일렌과 퍽 닮은 레이시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미스트가 훈련시키는 사람을 떠올리면 된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급격하게 흥미를 잃더니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왜 그래?”
“그, 훈련하는 걸 봤거든요.”
“응? 평범하게 훈련하지 않아? 독 내성이라거나 사령술 내성 같은 건 기르겠지만, 일반 커리큘럼은 마리아가 하는 훈련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건데?”
“그, 그게.”
“응?”
“전신에 독충을 달고 암호 해독하던데요? 미스트가 특수부대의 요원이라면 적어도 몸 한 곳이 불타는 와중에도 암호를 해독한 다음 암기하고 복귀해야 한다면서.”
“아.”
“하긴 다른 직업에 로망을 가지는 건 그 직업의 멋진 면만 봐서 그런 거니까요…….”
“그것도 그런데 미스트의 훈련이 독한 것도 있어. 뭐, 미스트는 자기가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캘러미티 가문의 훈련법은 아니지.”
“아하하하.”
“그쪽은 엄마가 독을 먹고 그 독으로 젖을 만들어 아이에게 항체를 만들어주는 미친 집단인걸.”
“그, 그러네요.”
생각보다 더 미친 집단이잖아…….
레이시는 도대체 그런 집단에서 미스트처럼 우아한 사람이 어떻게 나왔냐면서 황당해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눈을 깜빡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암살자 시절의 훈련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엘라의 말대로라면 100초 안에 죽는 독초를 몸에 단 채로 식사를 끝내는 훈련을 했다던가…….”
“어…….”
“그렇다더라.”
아샤의 말에 멋쩍게 웃다가 미스트는 미르와 레아에게 안 그러니 이제 괜찮다고 말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미르와 레아가 원하지 않는 한 그런 훈련을 시키지 않을 거라며 커피를 마셨다.
“후우우……. 맛있네.”
“커피요?”
“응. 맛있어. 홍차는 별로야?”
“으음, 잘 모르겠어요. 저는 차 맛을 구별할 정도로 차를 많이 마시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미스트가 해준 게 좀 더 향이 풍부하네요.”
“뭐, 커피랑 다르게 찻잎은 보관기간이 좀 짧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것보다 이제 뭐할래?”
“네?”
“아이들에게 과일 주러 갈래?”
“으으음, 그럴까요?”
솔직히 할 게 없다.
수도에 있을 땐 할 게 많지만, 여기는 아는 사람들은 전부 바쁘고 훈련을 할 수도 없으며 바드 길드에도 갈 수가 없다.
그렇기에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이들에게 과일을 나눠주러 가자고 말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사장에게 팁을 주면서 아이들이 노는 곳이 어디인지 물어봤다.
그러자 사장은 두 사람에게 마을의 놀이터를 가르쳐주었고, 레이시와 아샤는 놀이터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른들과 다르게 그저 식단이 불만인 건지 뾰로통한 얼굴로 다들 먹는 걸로 투덜거리는 아이들.
레이시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작게 웃다가 아이 중 한 명이 자기와 눈을 마주치자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면서 아이를 불렀다.
경계심이 강한 건지 레이시의 인사에 움찔 떨면서 눈치를 보는 아이.
레이시는 그런 아이에게 육포 주머니에세 말린 과일을 꺼냈고, 아이는 레이시의 손에 들린 말린 과일을 보고 환하게 웃더니 쪼르르 달려와서 레이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맛있게 먹으렴.”
“네에~!”
에일렌과 다르게 천천히 컸겠지만, 그래도 에일렌처럼 귀여운 아이.
레이시는 모성애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아이에게 요즘 분위기가 어떤지 물어봤고, 아이는 레이시의 질문에 그다지 좋지 않다고 대답했다.
“왜인지 전부 화를 내고 있어요.”
“그래?”
“네에. 엄마아빠는요오, 영주님이 땅을 제대로 보상 안 해주신다 하시구요오오, 오빠는 다른 곳으로 가자구 계속 졸라요! 그래서 엄마아빠랑 오빠랑 싸워서 시러요!”
“그렇구나. 왜 그렇게 싸울까?”
“몰라요오, 근데 오늘은요~ 엄마아빠가 공주님이 왔다고 엄청 좋아했어요!”
“푸훗, 그러니?”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는 레이시.
아이는 레이시가 다시 말린 딸기 같은 걸 주자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면서 오빠는 엘라가 온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거렸다고 말해주었고, 레이시는 그런 아이의 말에 키득키득 웃으면서 아샤를 바라봤다.
그러자 아샤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엘라의 행보가 행보이니 안티도 많다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작게 웃으면서 저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을 봤다.
“야! 넌 누군데 우리 동생을 껴안고 있는 거야!?”
“아, 오빠다아아~.”
“저는.”
“야차!? 야! 안 떨어져!? 이 괴물아!”
“……와. 수도랑 다르네요.”
“수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야차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으니까. 특히 저런 모험가들은 더더욱. 그래도 그렇지……, 너 이 분이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이냐?”
“알게 뭔데!”
“이 분은레이시 루피너스 공주비님이시다.”
“……뭐?”
“왕족상해죄는 당사자 처형, 삼족은 노역형인데 어떻게 할 거지?”
“으윽!?”
아샤의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남자.
그러다가 레이시가 웃는 얼굴로 돌멩이를 가루로 만들어주자 딸꾹질하며 레이시의 눈치를 바라봤고, 레이시는 한숨을 내쉬다가 자기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내려놓으면서 과일은 더 못주겠다며 사과했다.
“으으응, 오빠 때문이야!”
“그, 그게! 야차잖아! 야차가 얼마나 위험한 존잰데!”
“흥! 몰라! 저 언니 과일 줬는데!”
“푸훗.”
아이의 말에 작게 웃다가 아이의 양손에 말린 과일을 쥐어주면서 저 멀리 보냈고, 그런 다음 아이의 오빠에게 눈을 돌렸다.
“처음 보는 분께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요?”
“그, 그게……!”
“엘라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것 같은데 엘라에게 데려다드릴까요? 눈앞에서 불만을 토로할 기회를 드릴게요.”
오랜만에 아샤와 나왔는데 데이트를 망쳤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난 레이시는 보기 드물게 짜증을 부리면서 남자를 쏘아붙였고, 남자는 레이시가 쏘아붙이자 말을 더듬다가 자기가 잘못했다면서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다고 빌지 말고 엘라에게 가서 말해요.”
그렇다고 짜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여기에서 데이트는 끝났으니까 마을 사람들의 허심탄회한 기분이라도 듣기로 생각한 레이시는 남자의 손을 잡더니 따라오지 않으면 아샤에게 맡길 거라며 협박한 다음 남자를 엘라에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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