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0화 〉 새로 일을 맡게 되었다3
* * *
“이번 구호 사업은 비정상적인 가뭄이 이어진 곳이네요. 처음 1, 2개월은 저수지의 물을 끌어다 쓰거나 마법사의 물을 썼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라서 농사를 뒤엎고 물과 식량을 보내는 거 같아요.”
“가뭄이라……, 무섭네요. 원인은 밝혀졌나요? 봄에 막 비가 왔다거나 그랬나요?”
“아뇨, 대형 몬스터끼리 싸웠어요.”
“에에에.”
“기간테스와 드래곤이 싸웠대요. 그런데 드래곤이 비의 마법을 잔뜩 사용해서 일대의 수분기가 다 날아갔다네요. 물론 그 때도 지력 회복을 위한 마석과 마법사를 보냈지만, 아무래도 부족했던 모양이에요.”
“그런……. 드래곤이라니 험하네요.”
“보통은 서로의 영역이 겹치지 않는데 기간테스가 태어나면서 싸웠다네요.”
“그런 거대한 몬스터는 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건가요?”
“국경과 국경 틈이죠? 저희들도 그렇고 다른 국가도 그렇고 국격을 맞대고 있는 부분은 적어요. 지도를 보면 여기와 여기는 국경이 떨어져 있네요. 아마 여기에서 태어나서 이쪽으로 온 거 같아요. 흔적이 이렇게 이어졌다는 보고서가 있으니까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미스트와 레이시.
레이시는 미스트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며 궁금한 것을 물어봤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질문에 대답해주면서 레이시의 품에 안긴 자기 아이를 바라봤다.
레이시의 가슴을 더럽히면서 손에 들린 말린 과일을 먹는 아이들.
귀를 쫑긋거리는 그 모습에 미스트는 배시시 웃으면서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하여튼 퇴치는 끝났다고 말해주었다.
“흑창 기사단이 사냥했을 거예요. 애초에 마을의 대피도 끝났었고 서로 공멸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푸욱~. 그렇게 기간테스를 죽이자마자 드래곤도 죽어서 피가 흩뿌려졌죠. 아마 이번 가뭄에는 그 영향도 있을 거예요.”
“그래요?”
“네, 지력이 예상보다 빨리 떨어졌다는 걸 보면 드래곤과 기간테스의 피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 땅의 힘 자체가 약해진 거겠죠.”
“그럼 이번 구호 사업에는 식량과 더불어 땅을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될까요?”
“네, 그렇겠죠.”
“그럼 땅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좋겠네요. 으으응, 그리고 지력이라는 거, 금방 회복되지는 않죠?”
“네, 사람 몸이랑 비슷해요. 저 정도면 약을 먹어도 약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죠.”
“곤란하네요.”
“거기에다가 저런 땅이면 마수가 들끓어서 사냥하기도 해야 해요.”
“사냥은 문제 없으니까 지력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을 골라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냥이야 나비랑 이번에 에일렌이 키우고 싶다고 말한 실버 스콜을 풀어놓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되겠지만……, 아무래도 지력이 문제다.
미스트가 도와준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미스트는 다른 곳으로 가야하니 미스트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아는 것도 아니니…….
레이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미스트를 바라봤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시선에 싱긋 웃으면서 농사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을 몇 명 추천해줄지 물어봤다.
“순수 학문이나 공학 쪽은 국왕님께서 직접 지원하셔서 사람을 고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으으응…….”
“어떻게 할까요?”
“추천해주세요. 사업을 관리하는 사람으로는 안 뽑을지도 모르겠지만, 농업부분은 맡길 수도 있으니까요.”
“후후, 레이시도 이제 제법 귀족의 티가 나기 시작하네요.”
“에헤헤, 우리 애를 위해서니까요.”
과일물이 들어 알록달록하게 변한 셔츠를 보고 작게 웃으면서 미르와 레아에게 맛있냐고 물어보는 레이시.
미르와 레아는 레이시의 말에도 열심히 과일을 우물거리면서 잇몸을 간질어댔고, 레이시는 에일렌이 이빨이 날 때 했던 행동을 떠올리고는 이빨이 나는 거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빠르네요.”
“수인족이니까요. 거기에다가 제 아이니까 유전자 개량이 되어 있는 상태일 거예요. 수술은 안 되어 있지만. 그러니까 아무래도 성장도 빠르겠죠?”
“으응, 그렇구나.”
“아마 제가 조사를 다녀오면 걸어다니겠네요.”
“아쉬워요. 두 사람의 걸음마, 미스트랑 같이 보고 싶었는데.”
“후후, 저는 괜찮아요. 저는 이렇게 평온한 가정을 가진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꿈꾸는 것 같은 걸요.”
눈을 감고 잔잔하게 웃는 미스트.
미스트는 레이시의 볼에 입을 맞추더니 조심스럽게 오늘 밤은 어떠냐고 물어보며 레이시의 허리를 가볍게 간질였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아이가 있는데 그런 말은 안 된다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 그리고 오늘 저녁은 엘라랑 에일렌이랑 같이 놀기로 했는 걸요.”
“어머, 다음 날에는요?”
“……야, 약속이 없으면.”
“푸훗, 밤에 조용히 찾아갈게요. 창문 열어두고 있어요.”
미스트가 레이시의 귀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얼굴을 붉히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레이시.
다행히 레이시가 엘라의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건 소문난 사실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들은 레이시를 보고 부럽다는 얼굴을 할 뿐 별로 흉을 보지 않았고, 레이시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미스트의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그러자 미스트는 이제는 안 그러겠다면서 작게 웃었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대답에 배시시 웃다가 뭘 조사하러 자리를 뜨는지 물어봤다.
“미스트?”
“블루드 왕자님이랍니다.”
“네!?”
“저희 대륙이 그랑메오 강을 기준으로 동부와 서부로 나뉘는 거 아시죠?”
“……네.”
“블루드 왕자님께서 그랑메오 강 서쪽에서 활동했었다는 보고가 보였어요.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사신이 나타난 걸 보면 아마 블루드 왕자님께서도 만반의 준비가 끝난 거겠죠. 용병, 암살자, 정규군과 무에 미친 자들, 사신숭배자와 오라토리엄 왕국과 적대적인 자. 쓸수 있는 무력은 전부 모았으니 전쟁에 나선 거겠죠. 사실 이 이상으로 끌어봤자 세력이 붕괴가 일어날 뿐이고.”
“그런 무력을 모아서 뭘 하신대요?”
“사람을 죽이겠죠? 동서전쟁을 일으키고 싶을지도 모르겠어요. 사람이 아주 많이 죽을 거니까요.”
“…….”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력을 지닌 엘라 공주님을 그저 죽이고 싶은 걸지도요. 사실 그 분의 머릿속은 저도 잘 못 읽겠거든요. 왜냐면 캘러미티 가문의 암살법은 기본적으로 논리가 있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거니까요.”
블루드는 그 최소한의 논리가 없다.
현실 감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몸으로 태어나서 이해하지도 못하는 논리를 이해하는 척하며 그것을 사용한다.
심지어는 이해하는 척 하는 논리도 매번 달라져서 추측을 해도 미묘하게 오차가 생겨 3번째, 4번째 추격에서는 꼬리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잡혔다.
아니, 잡혀준 거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블루드도 슬슬 한계이니 엘라가 자기를 쫓아오게 만들어야만 하니까.
그렇기에 미스트는 지금 자기가 가는 건 초대를 받고 가는 거니 레이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마라면서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었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속삭임에 미스트의 손을 잡고 가볍게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꼭이에요. 우리 아이도 있으니까 꼭 돌아와요.”
“네, 꼭이요. 세상이 무너져 내려도 돌아올게요.”
레이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미스트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돌아가자고 말했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왔어?”
“이게 다 뭐예요?”
“어린이용 마법도구 세트. 에일렌이 하고 싶다는데 마법은 스킬 보석이 없으면 마력이 있어도 아무래도 쓰기 어려우니까 사봤어.”
“망가졌……네요?”
“에일렌의 마력은 나를 그대로 물려받았나 봐. 전에 실로트 오라버니가 준 핸드벨을 생각해보면 대충 예상했던 거지만.”
“마망! 이거 봐라! 비눗방울이다!”
“와아~ 엄청 크네요~. 장해요~.”
“에헤헤헤!”
“근데 이거 한 번 쓰면 못 써!”
“으, 으응~ 괜찮아요. 아직 에일렌이 어려서 그런 거예요. 에일렌이 나이를 먹고 열심히 공부하면 쓸 수 있을 거예요.”
“정말!?”
“네, 정말요. 에일렌은 엄마랑 같이 노력하는 착한 아이니까, 엄마랑 같이 하면 할 수 있어요. 나중에 엄마랑 같이 연습해요. 약속.”
“에헤헤, 약소오옥.”
레이시의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고 배시시 웃는 에일렌.
레이시는 에일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간식 먹을 시간인데 뭐가 좋냐고 물어봤고, 에일렌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힘차게 딸기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후후, 딸기가 좋아요?”
“웅!”
“잠시만 기다려요. 마망, 미르랑 레아 재우고~, 옷 갈아입고 올게요~.”
“네에~.”
에일렌은 레이시의 말에 엘라에게 달려갔고, 엘라는 에일렌을 안아들더니 진지한 얼굴로 자기를 쳐다보는 미스트를 바라봤다.
“뭐, 왜? 문제 있어?”
“공주님.”
“응?”
“여자 대 여자로 부탁하는데 오늘 레이시를 안 건들면 안 될까요?”
진지한 얼굴로 내일, 자기가 레이시를 안고 싶다고 속삭이는 미스트.
에일렌에게 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하는 미스트의 요구에 엘라는 놀란 눈으로 미스트를 바라보다가 이내 히죽 웃으면서 미스트를 안아주었다.
“급해?”
“솔직히 오늘 레이시가 에일렌이 아니라 공주님과 단둘이서 데이트한다고 했으면 몰래 납치해서 잔뜩 즐긴 다음에 공주님에게 사후 승인을 받을 정도로요.”
“네가 이렇게 욕심을 부릴 줄은 몰랐는걸. 알았어, 레이시랑 밤에 에일렌이랑 같이 노는 거 외에는 놀지 않을게.”
“약속이죠?”
“응. 공주로서, 그리고 네 주인으로서 약속이야.”
지그시 눈을 감던 엘라는 이내 기지개를 켜면서 아샤도 신경 써달라며 미스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었고, 미스트는 엘라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숙인 다음 오늘이 최대한 빨리 가길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레이시.”
그리고 잠시 후, 저녁이 되자 나가는 레이시와 엘라, 그리고 에일렌.
미스트는 그런 세 사람을 배웅해주다가 세 사람이 안 보일 정도로 멀어지자 와인을 꺼내 가볍게 목을 축였고, 아샤는 그런 미스트의 모습에 블루드를 탐색하는 게 그렇게 긴장되는 거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네요.”
“……?”
“미르랑 레아, 돌볼게요. 아샤, 집안일 맡겨도 돼죠?”
“요리 밖에서 먹고 오라고?”
“네. 그래줘요,”
“어, 뭐, 못 할 건 없는데…….”
“고마워요.”
아샤는 미스트가 순순히 사과하자 정말로 뭔가 일이 있나 싶어서 미스트를 바라봤고, 이내 보기 드물게 미스트가 긴장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자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스트가 저런 표정이니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미네르바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미스트는 두 사람이 나가자 미르와 레아에게 자신의 가슴을 물리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저번처럼 교육하는 방식으로 갈까?
하지만 그러면 부부라기보다는 다른 관계처럼 느껴지지는 않을까?
“으으으음…….”
아무리 욕심이 생긴다고 해도 자기는 엘라에 이은 두 번째니까, 아무래도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그렇게 생각한 미스트는 처음으로 자기 직업에 대해서 불만을 품으면서 단검을 빙빙 돌리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계획적으로 흐트러져서 레이시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음.”
머리를 매만지다가 나쁘진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미스트.
물론 그러려면 자기의 스킬 여러 개를 꺼트린 다음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여야 했지만, 레이시에게 절대로 못 잊을 하룻밤을 선물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나쁜 거래는 아닐지도 모른다.
“후후.”
그렇게 생각한 미스트는 레이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한 다음 저택을 떠나기 전 레이시와 보낼 하룻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