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0화 〉 개선2
* * *
“자, 그럼 오늘로 영지 분할 상담의 마지막 날이네요.”
“아, 아하하하…….”
“수고하셨어요, 레이시 씨.”
“엘레오놀 씨도 수고하셨어요.”
시간 정말 빨리 지나가는구나.
레이시는 눈앞에 쌓인 서류들의 산을 보며 작게 감탄하다가 지도에 표시된 쿨리아 공작 가문의 땅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정말 괜찮으세요?”
“네, 노른자위 땅은 전부 제가 가졌으니까요. 교역로도 꽤 많이 남았고……, 이 정도면 전보다도 더 발전할 수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도스토 연맹국의 교역로는 빛 좋은 개살구같은 거였으니까요.”
“으으응.”
반 이상이 사라진 영토.
미스트와 엘레오놀은 영양가 없는 땅을 넓이만 보고 가져가는 도스토 연맹국이 바보 같다면서 비웃었지만, 레이시로서는 아무래도 그냥 내준 땅이 조금 아쉬웠다.
조금만 더 신경 쓰면 땅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무리 나쁜 땅이라고 해도 일단 있으면 좋을 텐데…….
한국에 있을 때 땅덩어리가 좁아서 집을 못 짓는다는 말을 들었던 레이시는 그런 생각을 이어나가면서 지도를 만지작거렸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눈을 깜빡거리다가 땅을 사보겠냐고 물어봤다.
“네? 제가요?”
“네, 레이시는 공주비이시니까 공주님의 저금을 어느 정도 쓸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도스토 연맹국이 내놓은 조건을 보면……, 그러네요. 이 호수랑 여기 이 정도의 땅은 살 수 있을 거예요.”
“으, 으응. 그래도 괜찮을까요?”
“뭐, 안 될 건 없죠? 공주님께서 레이시가 원하는 걸 들어주라고 따로 떼어놓은 돈만 하더라도 이 정도 땅은 살 수 있는 걸요? 그리고 땅을 산다고 해도 명의만 레이시로 돌리고 관리는 엘레오놀 공작님께서 하실 거고.”
“저도 레이시님에게 충성을 바치는 포지션을 잡을 거니까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죠. 제가 요구하지 않은 건 엘라 공주님의 입지 때문인데……, 미스트 씨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별로 부담은 안 되나보네요.”
“부담이 전혀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딱히 그 정도 부탁을 못 들어줄 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이 호수, 자원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군사적으로 의미 있는 위치도 아니고 그저 풍경이 좋을 뿐이죠? 그렇다면 어떻게든 변명으로 돌릴 수 있는 수준이에요.”
국정감사 때에 잔소리를 듣긴 하겠지만, 여름에는 날이 더우니 아이들과 피서를 간다거나 그런 식으로 둘러대면 사치를 줄이라는 말만 듣고 끝날 정도의 일이다.
특히 엘레오놀은 겉으로만 보면 엘라와 레이시를 믿고 망명한 사람.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고 나라의 영토를 이만큼 넓혀놨으면 레이시가 땅을 산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레이시가 살 곳은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거나 곡창지대도 아닌, 그냥 풍경만 좋은 호수.
그 땅을 산다고 해서 갑자기 권력이 세지거나 부가 부풀어 오르는 게 아니니 귀족들은 레이시의 낭비로 보거나 아니면 엘레오놀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겠지.
미스트는 레이시에게 거기까지 설명해준 다음 땅을 사더라도 문제는 없을 거라며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미스트에게 돈을 따로 쓸 곳이 있냐고 물어봤다.
“혹시라도 중요한 일이 있거나 그러진 않나요?”
“네? 네. 음, 없네요. 굳이 따지자면 행사 때 에일렌과 미르, 레아에게 입힐 드레스를 살 돈이나 레이시의 드레스를 맞출 돈이 있는데 그건 왕궁에서 지원해주는 돈만 써도 구할 수 있으니까 딱히 없어요.”
“그, 그러어어엄…….”
“사실래요?”
“후우, 후웃……, 사, 살게요. 땅은 있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레이시의 대답에 하루도 걸리지 않을 거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진짜 자기가 땅을 산 거냐고 물어봤고, 미스트는 아직 실감이 안 난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레이시의 모습에 키득키득 웃으면서 정말로 그렇다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것보다 공주님이 오실 테니까 레이시는 저택에서 옷 입고 기다려주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식사도 미스트가 가르쳐주신 대로 준비하면 돼죠?”
“네.”
미스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들어가는 레이시.
미스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에일렌과 함께 빵을 써는 레이시를 보다가 메이드의 복장이 아닌 캘러미티 백작으로서 드레스를 입고 엘레오놀과 함께 밖으로 나갔고, 엘레오놀은 미스트의 복장을 힐끗 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공주님이 복귀하시면 저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러네요. 지금처럼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공주님은 정치에 개입하는 걸 싫어하시니까 남들이 볼 땐 엘레오놀 공작님께서 공주님을 이용하여 지지기반을 만든다는 식으로 보이시면 돼요.”
“어머나, 정말로요? 그러면 저야 편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요?”
“여긴 도스토 연맹국이 아니라서 서로 견제할 필요가 없거든요.”
“아……, 그러네요?”
“물론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귀족들이 엘라와 레이시를 견제하기는 할 거지만, 견제를 당한다고 해서 엘라 공주님의 거부권한이 사라진다거나 그러는 일은 없어요.”
“도스토 연맹국과 다르게 막 싸울 필요는 없단 거군요.”
“네, 그리고 공주님이 원하시는 생활을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싸우지 않고 알아서 기어주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고요.”
“흐으으응~ 오라토리엄 왕국은 평화롭네요.”
“아무래도 지금은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오라토리엄 왕국의 황금기니까요.”
미스트의 말에 엘레오놀은 확실히 그건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정치 형태든 단점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나라의 흥망성쇠가 발생하는 건 그 정치형태에 맞는 교육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달린 거겠지.
엘레오놀은 입맛이 씁쓸해지는 걸 느끼며 입가를 매만지다가 이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면서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어차피 연맹국이 오래 못 갈 거라는 건 옛날부터 느끼지 않았는가?
이번 전쟁이 누군가의 개수작으로 끝났으니 연맹국은 앞으로 5년 내로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반란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면 연맹국이라는 형태에서 벗어나 전국 시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나라 중 몇 군데는 다른 왕국에 흡수될 것이고, 몇몇 왕가는 그 모습을 보고 서로에게 연맹이 무너진 책임을 떠넘기며 정복 전쟁을 벌이겠지.
한심한 작태다.
황금기인 오라토리엄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긴 하지만…….
신성 왕국은 내부에서 부패해서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며 사막의 베스티야 왕국은 얼마 전에 있었던 왕자의 난을 간신히 진압한 상태.
북부의 야만 왕국은 30년 정도 나라의 형태를 유지하는가 싶더니 다시 균열이 일어나 부족들로 나누어져 흩어졌고, 대륙을 양단하는 거대한 강, 그랑메오 강을 기준으로 서쪽은 아직도 종족간의 차별 때문에 이종족 문제가 심각하다.
당장에 사회에 섞일 수 있고 사회에 기여할 수만 있다면 몬스터에게 시민증을 발급하는 오라토리엄 왕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
그러니 서쪽 제국과 왕국들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일은 없겠지.
쿨리아 왕가가 다시 재기하기엔 딱 좋은 상황.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하면서 쿨리아 공작 가문으로서 다시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은 엘레오놀은 자기가 뒤에 설지 물어봤고, 미스트는 엘레오놀의 말에 얕보이면 안 되지 않냐며 키득 웃었다.
“얕보여도 좋다면 기반이 완성될 때까지는 얕보이는 게 좋죠. 도박할 때도 정치할 때도 적당히 얕보이기 좋은 호인의 얼굴이 좋다잖아요? 후후, 그런 얼굴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좋게 말하든 나쁘게 말하든 공작님의 얼굴은 얕보기 힘드니까요.”
“애초에 제왕학에 따라 그런 얼굴을 만들었는데도 얼굴을 쓸 상황이 안 나왔죠.”
그런 상황에서 약해진 모습을 보며이면 다른 왕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고불고 난리가 났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상황이 아닌 지금은 기반이 완성될 때까지 일부러 강한 모습을 유지할 생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엘레오놀은 싱긋 웃으면서 미스트에게 앞자리를 양보했고, 미스트는 엘레오놀의 양보에 예의를 갖춰서 인사한 다음 개선문에서 엘라를 기다렸다.
“엘라 파우스트 오라토리엄 공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직접 전쟁에서 승리한 건 아니지만, 전 세계적으로 적으로 규정하는 사신을 쓰러트리고 와서 일까?
엘라는 마치 직접 전쟁에 나가 승리한 사람처럼 퍼레이드를 하며 들어오고 있었고, 미스트는 죽상을 쓰는 엘라의 표정에 작게 웃으면서 준비한 꽃을 엘라에게 건네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주님.”
“……그래, 자네도 수고하는군, 캘러미티 백작.”
“나라를 위해 애쓰시는 공주님만 할까요? 이번 전투는 어떠셨습니까?”
“그저 그랬지. 수많은 생명을 빨아먹고 자라난 녀석 치고는 허망한 결말이었어.”
“어떻게 사신을 처리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냥 외도마법으로 묶고 운석을 계속 떨어트려서 죽였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공주님의 전공을 널리 퍼트릴 수가 없습니다.”
“피곤해. 그리고 일반인은 사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게 나아.”
“후후, 알겠습니다. 국왕님께 공주님의 휴식을 간청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백작으로 있을 생각이야?”
“네, 조사할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
마차에 올라탄 미스트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는 엘라.
엘라는 잠시 할 말을 고르듯 눈을 깜빡이다가 레이시와 이야기는 된 일이냐고 물어봤고, 미스트는 레이시도 납득한 일이라며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엘라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손을 휘저으면서 왕궁 안으로 가서 사신을 죽인 보고를 이어갔고, 전쟁의 감시와 사신 살해에 대한 공로로 적당한 양의 돈과 보석을 받고 나오기 시작했다.
“참, 대신들이 말하던 땅 투기는 뭐야?”
“아, 레이시가 쿨리아 왕가가 가지고 있던 땅을 구매한 거예요. 전략적 가치나 곡창지대도 아니고 그냥 풍경만 좋은 호수 근처의 땅을 샀어요. 이 정도? 아마 엘레오놀 공작님에게 조금이라도 땅을 더 주고 싶은 거겠죠.”
“레이시가 볼 땐 엘레오놀이 영토를 반 이상 날린 게 되니까?”
“그런 거 같아요.”
“흐응, 이유야 어떻게 됐든 잘 됐네. 레이시는 돈을 좀 써야 해. 보석 같은 건 안 샀고?”
“네. 안타깝게도요.”
“아쉽네. 뭐, 땅은 엘레오놀이 관리하게 하고 나중에 목적은 내가 레이시와 상담한 다음에 정한다고 해줘. 별장이나 파티회장 같은 걸 지어도 괜찮겠네.”
“그런 목적으로 준비해둘게요.”
미스트의 대답에 레이시에게 귀족의 씀씀이를 가르쳐주라고 말하는 엘라.
미스트는 엘라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알티네와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고, 엘라는 처음에 알티네가 레이시를 건들였단 말에 화를 냈지만, 레이시가 반격했단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잘 됐네. 개인적으로는 좀 더 화를 내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러면 단순한 물리적 충돌로는 안 끝났을 거예요.”
“뭐 어때, 잘못은 그 년이 먼저 저질렀는데.”
“그래도 어머니이신데 ‘그 년’이라뇨.”
“시끄러워, 그거 말고는 별일은 없었지?”
“글쎄요? 후후, 제가 돌아가면 재미있는 걸 가르쳐뒀으니까 기대하셔도 좋아요.”
“……?”
엘라는 미스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미스트가 없는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빨리 돌아가자고 말했고, 미스트는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른 일은 나중에 해도 되니 돌아가자고 말했다.
“…….”
“아, 오셨어요? 에일렌, 엘라 엄마 왔어요!”
“엄마아아아!”
“아, 에일렌! 잘 지냈어?”
에일렌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에일렌을 안아주는 엘라.
에일렌은 이런저런 장식이 많이 달린 엘라의 옷차림에 멋지다며 눈을 빛냈고, 엘라는 에일렌의 웃음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힐끗힐끗 레이시를 바라봤다.
“아, 으응……, 좀 안 어울려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몸에 착 달라붙는 원피스라니…….
엘라는 미스트를 힐끗 바라보면서 저게 무슨 옷이냐고 물어봤고, 미스트는 엘라에게 새로운 취향은 어떠냐며 웃었다.
“……좋긴 한데.”
어쩌라는 걸까?
애 보는 앞에서 덮치라고?
엘라는 에일렌의 교육 때문에 차마 꺼내지 못한 말에 레이시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가만히 바라봤고, 레이시가 시선을 느끼며 골반과 엉덩이를 가리자 크게 헛기침하면서 에일렌에게 선물을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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