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7화 〉 서열 정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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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 기사단 내부에는 왕족이 타인과 시비가 붙었을 때를 대비한 두 가지 지침이 있다.
첫째, 상대방의 신분을 파악할 것.
상대방이 오라토리엄 왕국의 귀족이면 귀족을 띄워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누구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지 확인하게 하고, 상대방의 타국의 사람이라면 기죽지 않고 오라토리엄 왕가의 힘을 보여준다.
둘째, 상대방의 신분이 왕족일 때.
오라토리엄의 왕족끼리 싸웠을 때는 우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고기 방패가 되어 거리를 벌리게 한 다음 시시비비를 가리고, 그런 다음 좀 더 잘못이 적은 쪽에게 잘못이 많은 쪽을 용서해달라고 애원한다.
지금 이 상황은 두 번째 상황이니 행동 지침에 따라서 고기 방패가 되어서 일단 거리를 벌리게 해야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도 진은 기사단의 기사들은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레이시와 미스트를 쳐다봤다.
사이에 끼어들면 곧바로 죽이겠다는 듯 흉흉한 얼굴을 하는 레이시와 그런 레이시의 옆에서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면서 자기들을 쳐다보는 미스트.
적어도 여기에 모인 기사 중에서는 저 두 사람을 물리적으로 떨어트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누가 나설 거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싫은데…….”
“저도 싫슴다. 선배.”
전쟁터나 암살자로부터 주군을 지키는 거였다면 이들도 별 말 없이 몸을 희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런 명예로움과는 거리가 먼 것.
알티네의 정치 싸움에 끼여서 몸을 희생하는 것이었기에 기사는 더더욱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고, 알티네는 그런 기사들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당장에 레이시를 제압하지 않는 거냐며 신경질을 부렸다.
“오라토리엄의 왕비에게 무력으로 시위를 하는데 기사들은 뭘 하고 있지?”
“윽……. 왕비님. 지금 상황은 왕비님이 잘못하셨…….”
“경. 기사단의 장비를 누가 사지?”
“……아닙니다. 중재하겠습니다.”
억지이지만, 따를 수밖에 없다.
알티네의 친가는 진은 기사단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는 공작 가문이었으니까.
일이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기사는 레이시가 대화할 수 있는 상태이길 기도하면서 레이시에게로 다가갔고, 레이시는 기사가 다가오자 천천히 기운을 갈무리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맹수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사람들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고, 기사는 레이시가 진정한 듯 숨을 고르자 레이시에게 이 자리에서만 알티네에게 져줄 수 없냐면서 중재를 시도했다.
“이번 일은 알티네 님께서 시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 하려다가 생긴 불상사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기사단의 장비를 정비하는데 드는 돈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로서는 그걸 전부 부담해주시는 알티네 왕비님을 중재할 수가 없습니다.”
레이시는 기사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면서 속으로 작게 화를 냈다.
돈을 대주고 있으니까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져줘야 한다니, 그렇다면 엘라의 돈을 이용해서 기사단의 장비를 사다주면 내가 화를 내도 된다는 걸까?
이 세계나 저 세계나 돈이면 다 되는 건 마찬가지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레이시는 제대로 꼬장을 부려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젓기 시작했다.
알티네가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사에게 화풀이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숨을 고르다가 알티네가 먼저 사과하면 자기도 사과하겠다면서 마지노선을 그어주었고, 기사는 이 정도면 레이시가 많이 참았다 싶어서 알티네에게 가서 레이시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하지만 레이시의 말을 들은 알티네는 레이시와 다르게 화해할 마음이 하나도 없는 건지 자기가 왜 먼저 사과하는 거냐며 기사에게 화를 냈고, 기사는 알티네의 말에 난처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레이시를 바라봤다.
이미 레이시는 한 번 화를 참고 접어주었다.
그런 사람에게 다시 한번 더 화를 참은 다음 먼저 사과해달라고 부탁하라니…….
기사들은 다시금 이런 일에 끌려왔단 사실에 회의감을 느끼면서 한숨을 내쉬었고, 미스트는 기사의 반응에 레이시에게 기사들이 레이시에게 한 번만 더 접어줄 수 없냐고 물어볼 거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레이시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미스트에게 자기가 알티네와 비교했을 때 일방적인 갑을 관계인지 물어봤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질문에 웃으면서 절대로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엘라 공주님의 친모도 아니시고 남보다는 조금 가까운 사람에 불과하죠.”
“그렇죠?”
“네.”
“그런데 제가 일방적으로 참아야 할 이유도 없죠?”
“그럼요~. 레이시, 말만 해요. 어떻게 할까요?”
레이시의 손을 잡으면서 말만 하라고 속삭이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알티네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짐승들도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다시금 이를 드러내면서 기사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쳐다만 봤었던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이번에는 비늘이고 발톱이고 뭐든 잔뜩 세운 채.
명령만 떨어지면 곧바로 피바람이 불 상황에 알티네도 이번만큼은 정신을 차렸는지 당황한 얼굴로 레이시를 쳐다봤고, 레이시는 알티네가 자기를 쳐다보자 숨을 고르고 손을 들었다.
“나가세요. 제 연회장에서 이게 무슨 행패죠? 제가 예의 없이 초대장을 보낸 것도 아니고 예의를 갖추고 초대장을 보냈는데 왕비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시죠?”
“너, 너……!”
“이 일은슈레이 형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볼케릭 아주버님에게도요.”
“네가 이러고도 멀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이 나라의 왕비다!”
“네, 그래서요?”
“뭐?”
레이시의 말에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알티네.
그동안 알티네가 봐왔던 귀족들은 능력을 중점적으로 사람을 보든 가문을 중점적으로 보든 자신의 출신과 가문을 말하면 그대로 말문이 막히는 경향이 있었다.
설령 말을 이어간다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식으로 말하지는 못 했다.
자기 능력이 부족해도 자기가 소속된 가문의 힘이 약한 건 아니니까.
그렇기에 알티네는 레이시의 반응에 당황하면서 레이시가 자기 앞에 올 때까지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고, 레이시는 알티네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목을 가볍게 손에 쥐었다.
“인간 주제에.”
“컥!?”
“레이시 공주비님!?”
“인간 주제에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알티네가 말할 수 있게 힘을 조절하면서 목을 조르는 레이시.
기사들은 레이시의 행동에 당황하면서 레이시를 말렸지만, 레이시가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정도에서 내는 힘으로는 레이시를 말리지 못했고, 알티네는 그런 기사들의 행동에 욕짓거리를 퍼부으면서 레이시의 팔을 때려댔다.
“이, 이, 몬스터가하아……!”
“몬스터라니요? 저는 정령이 육체를 가지게 된 존재인데요? 정령도 몬스터에 불과한가요?”
이죽거리는 얼굴로 알티네를 놀리는 레이시.
알티네는 레이시의 말에 무례하다고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레이시가 자기가 정령에 좀 더 가까운 존재인 증거를 보여주겠다면서 마력을 뿜어대자 손에 힘을 주는 것도 잊고서 멍하니 레이시를 바라보게 되었다.
목을 졸리고 있다.
손찌검도 당해본 적 없는 자기가 목을 졸리고 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야 하는데……, 가문이든 뭐든 써서 어떻게든 화를 내야만 하는데 화를 낼 수가 없다.
알티네는 자기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 기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레이시가 작게 웃는 소리를 내자 눈을 돌리지 못하고 레이시를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고, 레이시는 알티네가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자 대답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켁, 케흑……!”
“자아, 다시 말해보세요. 저는 몬스터인가요? 아니면 정령인가요?”
“……정령! 정령이니까……!”
“네에, 놓아드릴게요. 대신에 한 가지 약조를 해주셔야겠는데 괜찮죠?”
알티네의 말에 손에 주던 힘을 풀고 알티네를 놓아주는 레이시.
레이시는 알티네가 쓰러지지 않게 한쪽 팔로 알티네를 받쳐주면서 더 이상 엘라와의 단란한 가정을 방해하는 일은 하지 말아 달라고 속삭였고, 알티네는 레이시의 말에 자기 목을 조른 주제에 그런 부탁을 하는 거냐면서 악을 쓰려고 레이시를 올려다봤다.
“힉…….”
하지만 알티네는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역광 때문에 보이지 않는 레이시의 얼굴, 차갑게 가라 앉은 듯한 눈동자가 자기를 쳐다보자 슈레이를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이 몸을 채우기 시작했으니까.
알티네는 처음에는 그것이 정신계 스킬로 인한 최면이라고 생각하고 늘 들고 다니던 아티펙트를 몇 번이나 사용했지만, 아티펙트를 아무리 써도 감정이 사라지지 않자 점점 공포와 애정이 뒤섞인 눈으로 레이시를 바라봤다.
“저와 엘라의 평화로운 삶을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아시겠죠?”
“아, 아아…….”
레이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알티네.
레이시는 알티네의 대답에 싱긋 웃으면서 너무 험하게 대해서 미안했다며 사과했고, 알티네는 레이시의 사과에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자기가 너무 조급했다면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네, 전부 이해한답니다. 그러니 돌아가주세요.”
레이시의 말에 움찔 떨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사단을 추스르고 가는 알티네.
주변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변한 알티네의 모습에 수군거리다가 레이시가 몸을 돌리자 입을 다물고 레이시를 지켜봤고, 레이시는 주변 사람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자 원래 계획하고는 조금 벗어나긴 했어도 잘 됐다면서 엘레오놀의 앞에 앉아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꽤 과격하시네요.”
“아하하.”
“저도 그렇게 힘이 있었으면 좋았을 건데.”
“으응, 엘라하고 상관 있는 일이라서 이렇게 한 거지 평소라면 이렇게 안 해요.”
“그건 알고 있어요.”
싱긋 웃으면서 적어도 여기에 초대를 받고 모인 사람들 중에서는 레이시를 제일 잘 알고 있을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엘레오놀.
레이시는 엘레오놀의 자랑에 어색하게 웃다가 너무 난폭한 성격으로 보이면 곤란하다면서 어깨를 움츠러트렸고, 엘레오놀은 레이시의 반응에 키득키득 웃으면서 어차피 정령의 핏줄임을 강조해서 알티네에게 적대할 생각이 아니었냐고 물어봤다.
“다만 알티네 왕비님께서 저렇게 싸가지 없이 오셨…….”
“엘레오놀!? 마, 말이 험하잖아요?”
“어머? 뭐가요? 네 가지가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요?”
“싸, 싸가지라고…….”
“예의 없고, 경우 없고, 존경도 없고, 존중도 없이 왔잖아요. 네 가지가 없으니 싸가지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그, 그러니까아아…….”
“하여튼 레이시가 짠 계획은 어린애가 짠 계획 같네요.”
“아흑!”
“하지만 그렇기에 통하는 계획이었겠죠. 연맹국의 한 주축을 뽑아서 다른 나라로 망명시키고 그 당주와 영토협상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면 어린애 같은 작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레이시에 대해서 정말로 정령 특유의 행운이 따르는 건가 싶었겠죠. 다만 지금은 정령 특유의 행운보다는 야차 특유의 폭력성에 대한 게 퍼진 것 같지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이시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엘라의 명성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원래 계획보다 엘라의 명성이나 다른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지금 이 결과가 레이시에게 좀 더 나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능력은 별 볼 일 없지만, 가문의 돈과 왕가 세력의 위엄을 등에 업고 왕이 허락하는 선에서 마구 날뛰던 알티네가 단번에 다른 사람이 되어 떠나갔으니 겁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면 레이시를 톡톡 건드는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소문이 퍼진 후에도 건드린다면 레이시를 제대로 어떻게 해보려는 걸 텐데, 오라토리엄 왕가는 지금 도스토 연맹국 내부 상황과 다르게 위계질서가 명확하게 잡혀 있으니 그렇게 하기도 힘들겠지.
그렇게 생각한 엘레오놀은 어깨를 늘어트리고 시무룩하게 눈치를 보는 레이시를 다독여주었고, 레이시는 엘레오놀의 다독임에 눈치를 보다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원래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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