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4화 〉 둥지 짓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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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뭘까……?
레이시는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의를 차리는 엘레오놀의 모습에 떨떠름한 얼굴로 엘레오놀을 바라봤고, 엘레오놀은 레이시의 반응에 작게 미소를 짓더니 시종을 시켜서 마차에 싣고 온 선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림잡아도 저택 두어 채는 살 수 있을 것 같은 양의 귀금속과 장인이 만들었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는 작품들.
레이시는 저택 정원에 가득 찬 엘레오놀의 선물에 숨을 깊게 들이마시다가 이내 주변의 귀족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걸 보고는 엘레오놀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엘레오놀 공작님,이게 다 뭐예요?”
커튼 사이로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레이시.
레이시는 주변 귀족들이 자기를 바라보면서 수군거리고 있자 황당하다는 듯 엘레오놀을 바라봤고, 엘레오놀은 레이시의 질문에 오라토리엄 왕국으로 망명온 것에 대한 별 거 아닌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겸사겸사 레이시 씨에게도 부탁할 것도 있고요.”
“네? 뭔데요?”
저렇게 많은 보물을 들고 왔으니까 엄청 힘든 일이겠지?
레이시는 엘레오놀의 말에 한숨을 내쉬다가 무슨 일을 부탁하고 싶은 거냐고 물어봤고, 엘레오놀은 레이시의 말에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라며 레이시를 안심시켰다.
“파티를 열어주셨으면 해요.”
“……네?”
“제가 그동안 연회에 나가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시달렸거든요. 그러니 저를 도와주실 겸 연회를 열어주셨으면 해요.”
엘레오놀은 누구를 초대한다거나 그런 건 전부 레이시에게 맡기겠다면서 싱긋 웃었고, 레이시는 엘레오놀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왜 이런 일을 자기에게 부탁하냐고 물어봤다.
연회와 관련된 일이라면 다른 사람이 더 잘 할 것이다.
아이야트나 슈레이, 볼키릭처럼 왕족으로 태어나서 왕궁 생활을 잔뜩 경험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그들과 결혼한 배우자들도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으니 자기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왜 엘레오놀의 의도도 파악하지 못하는 내게 부탁하는 걸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심쩍은 눈으로 엘레오놀을 바라봤고, 엘레오놀은 레이시의 시선에 레이시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다.
“다른 분들에게 부탁하면 왕정 정치에 시달리게 되거든요. 다른 왕자님들이나 공주님들을 봐도 대부분은 각자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지지하고 있고요. 그런 상황에서 지지기반도 마련되지 않은 제가 어느 한쪽의 편을 들면 쿨리아의 사람들이 위험해질 거예요. 그래서 왕가를 지지하고 있는 엘라 공주님이나 볼케릭 왕자님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데…….”
“볼케릭 왕자님하고는 안 친하니까 제게 부탁한 건가요?”
“그런 이유도 있지만,애초에 볼케릭 왕자님께서는 이런 부탁을 들어주실 리가 없어요. 그 분께서는 지금 국왕님의 아래에서 열심히 일하시고 계시니까.”
“……아. 으응, 그럼 이해했어요. 적당히 권력을 지니고 있고 부탁을 들어줄만도 하면서 왕위 계승에 대한 다툼에서는 한 발자국 떨어진 엘라니까 제게 부탁하는 거군요?”
“네. 맞아요.”
“하지만 저는 아는 귀족이라고는 루룬 씨밖에 모르는걸요. 모르는 분께 제가 연회를 열 테니 참석해달라고 부탁해도……. 그, 알티네 왕바님께서 막으실 거고요.”
일단 알티네에게 경고해서 안 건드는 것 같기는 하지만, 오늘 새벽 미네르바가 편지를 보내고 올 정도로 주변 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이름을 걸고 연회를 연다고 한들 누가 찾아올까?
레이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초청장을 만드는 돈이 아깝다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엘레오놀은 레이시의 반응에 그럼 국왕님에게 귀족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레이시 씨도 공주님이시니까 최소한의 체면을 위해서 몇몇 귀족들이 참석할 거예요.”
“그런…….”
아빠에게 부탁해서 친구 초대하는 거랑 뭐가 달라…….
나름 합리적인 해결방법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부끄러운 해결방법이었기에 레이시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건 좀 그렇다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엘레오놀에게 해코지 않으라는 법도 없고요.”
“그건 감수할 생각이에요.”
“으으응…….”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니 레이시 씨의 선택에 따르겠지만, 엘라 공주님께서는 앞으로 2주 뒤면 복귀할 텐데 그때도 알티네 왕비님하고 싸우고 계시면 조금 그렇잖아요?”
“윽…….”
엘라의 이름을 꺼내자 움찔 떨면서 한숨을 내쉬는 레이시.
엘레오놀은 레이시의 반응에 알티네가 평소에도 엘라를 창녀의 딸이라며 같은 왕족으로 취급해주지 않았던 걸 가르쳐주면서 지금 이 상태로 엘라가 돌아오면 큰 일이 날 거라고 말해주었고, 레이시는 알티네와 엘라가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부르르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엘라라면 당장에 처들어가서 저택을 난장판으로 만들겠지.
그럴 만한 힘도 있고 권력도 있으며, 애초에 엘라는 필요하다면 곧바로 상대가 누구든 그냥 공격할 성격이니가.
“으으으응!”
“어떻게 하시겠어요?”
“으우우우……, 일단, 내일이나 모래에 대답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괜찮답니다. 저는 지금 수도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제가 떠나기 전에만 말씀해주시면 괜찮아요.”
“정말요?”
“네, 쿨리아 왕가가 오라토리엄의 공작 가문이 되면서 쿨리아의 영지를 나누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거든요. 우선 도스토 연맹국과 딱 달라붙어 있는 영토 40%는 넘겼고 나머지 60%가 논의 중인데 아마 50대 10으로 나눌 거 같아요. 50은 공작 가문으로서 쿨리아 가문이 가져가고 나머지 10%는 도스토 연맹국이 가져가기로요. 아마 공작 가문으로 가는 거니 도스토 연맹국에서도 연맹국 나름의 체면을 차리려는 거겠죠.”
아예 땅을 안 주고 쫓아내면 국제적으로 불리한 위치로 가버릴 테니까.
……연맹국치고는 나름 많이 양보해준 거려나.
하긴 전쟁을 위한 돈의 30%를 대주고 도스토 하이 킹 가문에 돈을 그렇게 찔러줬는데 이 정도도 안 챙겨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알겠어?
엘레오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레이시를 바라봤고, 레이시는 엘레오놀의 시선에 창문 밖을 힐끗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네르바, 아이들을 부탁할게요. 애들이 깨어나면 이 병에 든 모유를 데워서 먹여주세요. 미리 짜낸 모유에요. 조금 미지근하게 중탕해서 주시면 될 거예요.”
“주인, 나갈 생각이냐? 저 여자 말대로 국왕에게 갈 건가?”
“으응, 일단은……. 최대한 좋게좋게 해결하려고요.”
알티네가 좋게 말한다고 해서 좋게 들을 일은 아마 없겠지만, 그래도 시도라도 해보고 뭐라고 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바로 발걸음을 옮겨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내게 찾아왔나? 쿨리아 공작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네, 볼케릭 아주버님.”
“……크흠. 음, 내가 어머니의 편을 들 생각은 못 했나?”
“아주버님이라면 그러지 않으실 거 같아서요. 왕궁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일에는 철저하게 오라토리엄의 왕에게 충성한다.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연회는 공식적인 일이 아니잖나?”
“공식적으로 만들어주실 수 없나요? 엘레오놀 공주님의 영지 분배라거나 그런걸로…….”
레이시가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알티네의 일로 헐레벌떡 뛰어왔었던 볼케릭.
자신이 다치자마자 약을 준비해준다거나 미르와 레아가 태어났을 때도 국왕의 이름으로 몰래 선물을 보내거나 그랬었기에 레이시는 볼케릭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볼케릭에게 연회의 개최를 부탁했고, 볼케릭은 레이시의 부탁에 난처한 듯 눈을 찌푸렸다.
레이시의 부탁은 합당하다.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 전에 자기에게 부탁하러 온 게 용케 이렇게 발전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문제가 되는 건 알티네의 꼬장.
자기 어머니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는 과할 정도로 집요한 구석이 없잖아 있으니 연회를 열었다가 알티네가 레이시에게 해코지 하지 않을지 걱정된다.
특히 알티네를 모시고 있는 메이드장은 안 그래도 선민 의식이 강한 후작 가문의 출신이니 레이시를 고깝게 여길 텐데…….
“후우, 사람을 고르는데 일주일 정도 걸릴 거다. 제 1 왕비님과 다르게 알티네 왕비님은 이 왕궁 여기저기에 손을 뻗치고 있으니 연회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릴 거다. 그리고 중립을 선언한 귀족들의 이름을 보내주지. ……그것에도 3일 정도 걸릴 거다. 정말로 안전한지 조사해야 하니까.”
“네, 감사합니다.”
“이 다음에 어디 방문할 생각인가?”
“네, 시아버님께 한 번 방문할까 해요. 장소를 빌려주시는 건 어디까지나 시아버님이시니까요.”
“시아……, 크흠.”
“……?”
잘못 말했나?
역시 부부관계를 할 때 누가 위에 있는 걸로 여자쪽 호칭을 쓰는 건 이상한가……!?
뭔가 이상한 볼케릭의 반응에 레이시는 혹시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거냐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볼케릭은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런 호칭을 듣는 건 아무래도 처음이라서 말이지.”
“그……, 그런가요? 이러면 시아버님께서 좋아하시던데…….”
“공적인 자리에서 부르는 건 아니겠지?”
“네, 개인적으로 만나서 저희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크, 크흠. 그럼 잘 부탁하지. 그런 종류의 효도는 우리 아내에겐 조금 힘드니.”
“그, 으응……?”
“귀족에겐 귀족 나름의 호칭이 있단 거다.”
“아아……. 우응,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볼케릭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이시.
레이시는 볼케릭의 말을 생각해보다가 이내 국왕에게 발걸음을 옮겼고, 국왕은 레이시의 부탁에 한숨을 푹 내쉬면서 대신 사과했다.
“알티네, 그 여자가……. 미안하구나.”
“에헤헤, 괜찮아요. 그것보다 장소 대여는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우리 며느리가 연회를 연다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니? 그리고 거절했다간 왕궁 안에서 피바람이 몰아칠 테니까 무리를 하더라도 내줘야 하지 않겠니?”
“아, 아하하하……. 엘라는 착한데…….”
“엘라가 아니라 다른 여자들이 문제란다. 특히 미스트나 아샤가 말이지. 우리 며느리를 얼마나 사랑하는 건지 가끔씩 내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인데도 무섭더구나.”
“에헤헤…….”
레이시의 대답에 국왕은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인 채 질색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레이시는 그런 국왕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다시 한 번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왕궁을 거닐면서 머릿속을 정리해보는 레이시.
일단 엘레오놀의 부탁이고 보석과 작품들을 많이 들어주려고 하고 있지만……, 과연 내가 이렇게 해서 얻는 이득이 뭐가 있을까?
괜히 시어머니랑 다투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반복하던 레이시는 잠시 후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이왕 일을 저질렀으니 이번 일로 필요한 걸 구하자며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고, 이내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놓은 결론은 알티네가 자기를 건들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도구.
알티네가 뭘 원하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는 볼케릭의 말이 있었으니까 고귀한 피가 필요한 걸까…….
……그런데 그거, 엘레오놀 한 명으로 해결되는 거 아닐까?
엘레오놀이면 왕족 출신이니까.
타국의 왕족이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까?
그렇다면 엘라의 피를……?
아니, 엘라는 이미 창녀의 딸로 굳어져 있으니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좋겠지.
“으으으으음…….”
고귀한 피라고 해도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는데…….
레이시는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자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머리카락을 베베 꼬면서 왕궁 밖을 바라봤다.
“응?”
그러자 보이는 건 수레에 책을 잔뜩 싣고 움직이는 노인.
레이시는 층수를 확인한 다음 가볍게 창문 너머로 뛰어내려 노인에게 다가갔고, 노인은 레이시를 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인사했다.
“어디까지 가나요?”
“아, 이건 왕궁에서 고아원에 기부할 책들입니다. 동화들이죠.”
“아하, 그러고 보니까 그런 사업도 있었죠.”
동화책…….
에일렌이 좋아하려나.
레이시는 한 손으로 수레를 잡아끌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눈에 동화책의 표지가 들어오자 자기도 모르게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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