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3화 〉 둥지 짓기2
* * *
“주인.”
“히약!? 미, 미네르바? 으응, 왜 창문에서 그러고 있어요.”
“주인 빨리 보고 싶어서.”
레이시의 반응에 배시시 웃던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수건을 건네주자 발을 닦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고, 레이시는 미네르바가 방에 들어오자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정말, 제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 들어오면 놀란다구요.”
“에헤헤, 주인. 그나저나 옷은 제대로 입고 있는데 왜 흔들의자에 앉아서 자는 건가?”
지금 시간은 새벽 5시.
이제 막 일어난 레이시가 하양이와 나비를 돌본 다음 이것저것 준비할 시간이기에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배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말에 쓰게 웃더니 미르와 레아가 몸을 뒤집기 시작하면서 더 주의깊게 쳐다봐서 피곤하다고 말했다.
“밤새 울어대더니 엎드린 채 울고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 걸요. 그래서 다시 잠도 못자고 일하고 이렇게 조금 쉬는 거예요.”
“으응.”
“미네르바는요?”
“미스트의 심부름을 하고 왔다.”
“무슨 심부름이에요?”
“으응, 알티네에게 편지를 전해줬다. 레이시를 건들지 말아 줬으면 한다고 정중하게 썼다고 말했다.”
“그런가요? 으응, 안 싸우면 좋을 텐데.”
전생에서 봤었던 한국의 시골의 어르신들하고 현생에서 보고 있는 왕비와 비교하긴 좀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런 종류의 사람은 고집을 쉽게 꺾지 않는다.
왜냐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자기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쳐주고 있을 테니까.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60대면 더 이상 뭔가 배우려고 하지도 않을 거고, 또 지구와 다르게 이쪽 세상의 왕비면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을 테니까 사람을 막 휘두르겠지.
그런 사람은 아무리 정중하게 대해줘봤자 자기 기분에 따라 행동하니 별 소용이 없다.
하지만 시골에서처럼 아예 남이면 알티네는 완전히 남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그렇다.
혈연만 따져보면 남남이긴 해도 가족관계상으로 보면 한 가족이고 알티네는 자신에게 있어서 시어머니니까.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자 레이시는 갑갑한 미래가 보여서 한숨을 푹 내쉬면서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레이시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다급하게 이불을 올려주었다.
“봄이지만 아직 바람이 차갑다.”
“아, 아하하, 그래서 머리가 아픈 건 아니니까 안심해요. 알티네 왕비님과 어떻게 지내야할지 고민하니까 답이 안 나와서 그런 거예요.”
“그런 거라면 괜찮을 거다. 미스트가 알아서 처리해준다고 했다.”
“너무 기대기만 하네요. 저.”
“주인은 그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레이시를 끌어안고 가볍게 입을 맞추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입맞춤에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배시시 웃다가 미네르바에게 다시 입을 맞추고는 미르와 레아를 바라보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잠이 올 뻔 했지만, 미네르바가 자기를 놀래키는 바람에 잠이 달아났다.
피곤하긴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눈을 질끈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피로는 풀 수 있지만……, 이제는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하기에도 조금 그런 느낌.
커피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지.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미르와 레아가 잠에 빠진 걸 확인하고는 창문을 닫고 방문에 걸쇠를 걸어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미네르바, 아직 아침 안 먹었죠? 같이 먹어요.”
“응!”
“그나저나 미스트는 정말 바쁘네요. 아침 일찍 특수부대원 훈련이라니. ……미네르바. 미스트가 무슨 훈련하는지 아시나요?”
“응, 안다. 도와달라고 해서 한 번 봤었다.”
“헤에~ 무슨 훈련을 했나요?”
“불빛 하나 없는 방 안에서 나랑 술래잡기 했다.”
“은근히 재미있는…….”
“발을 잘못 디디면 독에 감염되어서 데굴데굴 구르는 게 재미있었다.”
“……게 아니었네요. 미스트랑 미네르바는 괜찮았어요?”
“음,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나는 소리만으로 주변 환경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 괜찮았다. 미스트도 소리랑 냄새만으로 공간지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거기에다가 자기는 원한다면 공감각 개방이라는 스킬로 냄새를 눈으로 볼 수 있다고도 말했었다.”
“아, 어……. 네, 참 잘했어요. 안 다쳤다니 무엇보다 다행이에요.”
“에헤헤.”
냄새를 눈으로 본다고……?
소리를 통해서 공간을 지각하는 건 신기한 사람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에서 시각 장애인들 중 귀가 좋은 사람들 몇 명이 그렇게 한다는 걸 알아서 알고는 있었는데, 냄새와 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대체 뭘까?
냄새라면 몰라도 소리는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파동일 텐데 파동을 어떻게 보는 거지?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미네르바를 바라보다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만들어서 옆에 앉았고, 미네르바는 레이시를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먹다가 미스트가 말해줬던 걸 말해주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중에 엘레오놀이 온다고 했다.”
“네? 정말요?”
“그렇다. 미스트의 말대로라면 루룬과 아멜리아의 항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온다고 했었다.”
“으응, 무슨 일일까요?”
“그 전에는 파트너 형식으로 해서 권한이 부족했는데 이번에는 권한을 제대로 받아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요?”
이게 커리어 우먼이라는 걸까?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말에 엘레오놀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히 엘레오놀이라면 그렇게 할 것 같다면서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공작님이니까 좀 더 확실히 대접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손님이 적거나 오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엘라에게 바람을 권유하는 사람들밖에 없었기에 레이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면서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미네르바를 바라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시선에 눈을 깜빡이다가 미스트가 별로 특별한 준비는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면서 레이시를 껴안았다.
“준비는 엘레오놀이 하고 온다고 했다. 전에는 미스트가 준비해야 하지만 이제는 엘레오놀은 쿨리아 공작 가문이 돼서 엘레오놀이 준비하고 올라와야 한다고 들었다.”
“아……. 그건……, 그러네요.”
이제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구나.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말에 그렇게 생각하다가 그래도 자기와 친구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니 선물 정도는 주고 싶다고 말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스트가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레이시라면 선물을 준비하려고 할 테니 선물을 주려고 할 때 자기가 준비한 걸 주라고 했었지.
미네르바는 미래를 읽는 것 같은 미스트의 예지능력에 감탄하면서 미스트가 준비한 다과와 선물 상자를 내밀었고, 레이시는 미네르바가 건넨 걸 보고는 환하게 웃으면서 미네르바를 꽉 안아주었다.
“고마워요.”
“으응, 아니다. 에헤헤……, 청소하고 오겠다.”
레이시의 말에 미네르바는 그릇을 들고 일어났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행동에 같이 방을 청소하며 언제 오는지 엘레오놀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엘레오놀은 두 사람이 청소를 하고도 한참이나 오지 않았고, 레이시는 에일렌과 함께 책을 읽으면서 시계를 바라봤다.
“늦네요. 애초에 언제 온다는 말은 안 했지만…….”
“우응? 누가아?”
“엘레오놀 공작님이요. 기억하나요? 엘레오놀 이모라고 말했었는데.”
“기억해! 남자가 많은 이모!”
“커흡……!”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이의 아무런 악의 없는 말은 이렇게 잔인할 수 있구나.
레이시는 에일렌의 대답에 어색하게 웃다가 에일렌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면서 엘레오놀에게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며 주의준 다음 기지개를 켰다.
“마망!”
“응? 왜 그래요?”
“나, 책 읽었으니까 미네르바 엄마랑 놀래.”
“후후, 그럴까요? 뭐하고 놀까요?”
“으응~ 숨바꼭질! 이번에는 제대로 숨을 거야!”
“에일렌이라면 할 수 있어요! 파이팅!”
“웅!”
레이시의 응원을 받고 이번에는 반드시 숨을 거라고 말하는 에일렌.
레이시는 그런 에일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책을 정리했고, 미르와 레아가 칭얼거리면서 잠에서 깨자 포대기를 매고 두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나저나 정말 언제 오시려는 걸까?”
조금 있으면 점심 시간인데 점심을 같이 먹으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문 너머로 시선을 옮기자 레이시는 저 멀리서 저택으로 다가오는 마차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그 마차의 행렬에 흠칫 떨며 마당으로 나와 다른 기사에게 지시를 내리는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마리아는 안전은 맡기라는 듯 엄지를 치켜들고는 진지한 얼굴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마리아의 대답에 엘레오놀이 오고 있다는 걸 직감하며 황당한 얼굴을 했다.
오고 있는 마차만 해도 10대.
거기에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고, 아마 그 행렬이 궁금해서 쫓아온 사람들의 수도 20명이 넘는 상황.
그동안에 엘레오놀이 방문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아무래도 이상한 상황에 레이시는 좀처럼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고, 에일렌도 마차의 행렬에 놀랐는지 정원 한 구석에 숨어있다가 말고 쪼르르 달려와 레이시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마망, 마망, 저게 다 뭐야?”
“엘레오놀 이모의 마차인가봐요…….”
“엘레오놀 이모 대단한 사람이야?”
“네? 네……, 대, 대단하긴 하죠?”
한 왕가의 사람이며 말도 안 되는 보석과 금액을 도스토 연맹국에 주고도 공작 가문에 부끄럽지 않은 자산을 지니고 있으니까 이야기로만 들으면 아이야트나 슈레이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대단하냐, 대단하지 않냐 물어본다면 대단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사람.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이렇게 예의를 차리는 걸 보자 레이시는 얼떨떨한 기분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고, 엘레오놀은 창문 너머에서 자기 아이들과 함께 자기를 바라보는 레이시의 모습에 싱긋 웃으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놀랐을까?”
“당연합니다, 아가씨. 레이시 님께서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으시지 않으십니까.”
“어머, 집사. 레이시 씨를 얼마나 봤다고 아시는 건가요?”
“아가씨께서 자발적으로 3번 이상 만나는 사람은 전부 아가씨의 적이 되거나 아군이 될 사람. 전부 외우고 있습니다.”
“후후, 그러네요.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잖아요?”
알티네의 일 때문인지 안 그래도 사교계에 나오라며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교계에 나간다면 자연스럽게 도스토 연맹국에 있을 때 누가 더 뛰어난 것처럼 보였냐는 이야기를 시작하겠지.
그런 질문은 어떻게 대답하더라도 해밖에 되지 않으며 어물쩡하게 넘어간다고 해도 그것으로 해를 입는다.
그러니 최상의 수는 그 자리를 피하고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쉬이 헛소문을 퍼트리지 못할 세력을 구축하는 것.
다행히 오라토리엄에는 좋은 친구가 있었고, 자기는 굴러온 기회를 그대로 걷어찰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현 왕가, 그리고 다음 왕가에도 충성을 바칠 뿐인 엘라 공주님을 중심으로 봉신관계를 맺어서 세력을 구축할 수 있다는 건 말이죠.”
“네, 정말입니다. 아가씨께서 머리를 조금 조아리는 것으로 무력과 시시한 사담에 휘말리지 않을 권력, 그 두 개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집사, 요즘 제게 차갑지 않나요?”
“허허, 이 늙은이가 야근을 자주 하다보니까 피곤해진 모양이군요.”
“음, 최대한 빨리 서류 작업에 뛰어난 아이를 구해 보내드릴게요. 안 그래도 몇 명 추려놨답니다.”
“아가씨의 애인분께서 말입니까?”
“어머, 집사. 질투하시는 건가요? 나이가 60인데…….”
“크흠!”
“후후, 알았어요. 나중에 봐요. 그럼 이제 레이시 씨를 보러 갈까요? 쿠션을 준비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이제는 봉신관계.
주종은 아니지만 대등하지도 않는, 그런 관계.
지금껏 봐왔던 레이시라면 그런 관계는 싫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지금은 그런 관계이니 적어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 되겠지.
“엘레오놀 쿨리아 공작. 레이시 공주비님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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