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5화 〉 시어머니3
* * *
저택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는 레이시.
미스트는 레이시가 저택으로 달려오자 놀란 눈으로 레이시를 바라보다가 레이시의 팔을 휘감고 있는 뱀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알티네의 짓이냐고 물어봤다.
“에? 어떠게 아셨어요?”
“음, 뭐, 왕궁 내에서 이런 뱀을 기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거든요. 그리고 이 뱀의 입안에 있는 문양, 이건 알티네 왕후님께서 국왕님께 오라토리엄의 이름을 받기 전에 계시던 가문의 것이거든요. 몰레바 공작가의 뱀이에요.”
“…….”
“애초에 레이시와 에일렌을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아마 슈레이 공주님을 지지하라고 선언하라 명령하셨겠죠. 후후, 그러면 그럴수록 슈레이 공주님에게 불리하게 작용되는 것도 모르고.”
잔뜩 짜증내면서 뱀의 입을 억지로 벌리는 미스트.
뱀은 미스트에게서 공포를 느끼고 몸을 마구 비틀다가 미스트가 손가락에 힘을 주자 이내 견딜 수 있는 공포의 한계를 넘어섰는지 그대로 몸을 굳히고 덜덜 떨기 시작했고, 미스트는 그런 뱀의 모습을 하찮다는 듯 바라보다가 입안의 문양을 지우고 레이시를 칭찬했다.
“그나저나 그 자리에서 그 분을 안 때리신 건 잘 하셨어요. 공주님처럼 하셨으면 솔직히 꽤 어려웠을 거예요.”
“엘라라면 어떻게 했는데요?”
“그 자리에서 우선 알티네 왕후님의 추종자들을 반쯤 죽였겠죠. 이빨을 전부 뽑는 건 기본이고 손가락을 전부 자유분방한 위치로 옮겨줬을 거예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미스트는 이내 피식 웃으면서 뱀에게 엘라의 문양을 박아넣은 다음 이걸로 도발하면 되겠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잘 부탁한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에일렌에게는 이걸 줄래요?”
“이건…….”
“간식 도시락이에요. 그냥 돌아가면 에일렌이 어디로 왜 갔냐고 물어볼 거잖아요. 그거에 대한 변명거리.”
“아하, 고마워요.”
“뭘요, 평소에는 에일렌이 자주 못 먹는 걸 넣어두었으니까 좋아할 거예요.”
“으응~ 단 거 인가요?”
“아뇨, 쓴 거요.”
“……?”
“이상하게 커피 열매를 좋아하더라고요. 이런 건 공주님을 닮으신건지……. 후후, 하여튼 에일렌과 맛있게 드세요.”
입가를 가리고 키득키득 웃는 미스트.
미스트는 에일렌이 커피 과자를 먹으면 저녁에 잠을 못 자니 평소에는 못 먹게 막았다고 말해주었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미묘한 얼굴로 웃더니 엘라가 보고 싶다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곧 돌아올 거예요. 공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에헤헤, 그래도요. 그럼 가볼게요.”
“네, 조심해서 가세요.”
레이시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미스트.
이내 레이시가 사라지자 미스트는 언제 화사하게 웃었냐는 듯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석상처럼 굳어있는 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자아, 어떻게 할까요?”
솔직히 알티네가 뱀을 보낸 것 자체는 아무렇지 않았다.
예전에 엘라가 제대로 날이 서 있었을 땐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사사건건 부딪쳐서 그녀의 근처에 있던 시종의 손가락이 매일매일 박살났었으니까.
오히려 이제 와서 다시 건들기 시작했다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였다.
아마 그 이유는…….
“국왕의 은퇴 준비 때문인가.”
엘라의 나이가 아직 20대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라토리엄 왕가의 특징인 동안 때문에 종종 망각하지만 국왕의 나이는 올해로 60대 중반.
10년 정도는 공을 들여 인수인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 조금 이르긴 해도 슬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아이야트와 슈레이의 나이도 30대 초중반으로 접어들었고…….
그렇다면 확실히 불안할지도 모른다.
슈레이의 스타트 지점은 아이야트의 것과 비교했을 때 꽤 뒤에 있었으니까.
가문만 따져보면 슈레이가 좀 더 유리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야트는 인간답지 않은 블루드의 형제.
같은 피를 가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실한 청년이긴 하지만 자신의 길을 확실하게 마련하는 능력만큼은 블루드의 것을 그대로 받은 것처럼 뛰어났고, 그 특유의 능력을 확실하게 발휘해 자신이 생각하는 부국의 길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슈레이는 그러지 못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단단하게 만드는 능력은 있지만,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은 아이야트보다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솔직히 말해서 국왕이 누가 되든지 이 나라는 한 세대나 두 세대 정도는 황금기를 맞이할 거라 누가 왕이 되든 관심은 없지만요.”
나라를 굳이 확장해야 할 필요는 없고, 두 사람 중 누구에게 맡겨도 이 나라는 알아서 잘 번성할 것이다.
국왕도 그걸 알고 있으니 두 사람에게 동시에 국정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알티네 왕후는 그런 걸 모르죠.”
태생이 귀족이라서 그런지 알티네는 왕이 되는 마지막 조건을 귀족의 지지라고 알고 있다.
아마 지금도 자신의 추종자들을 슈레이의 추종자들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까?
헛수고지만, 자기 자식에 대한 애정과 그 피에 대한 애정만은 진짜이니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알게 되었으니 알티네를 방치할 수도 없다.
레이시에게 집안일을 배우라고 했지만, 이런 일은 단순한 집안일로 치부할 수도 없으니 직접 나서야겠지.
“응애애애애애애!”
“어머, 이 울음은 미르네요.”
아이의 웃음에 살기를 거두고 정신을 차리는 미스트.
미스트는 엘라의 문양을 받고 얌전히 있는 뱀에게 싱긋 웃더니 정원에 나가서 안 보이는 곳에서 대기하라고 말했고, 뱀은 미스트의 말에 레이시와는 다른 방향으로 저항할 수 없다는 걸 느끼면서 미스트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미스트는 미르와 레아에게 다가가서 두 사람에게 가슴을 먹여주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 어떻게 하면 레이시를 건드는 게 슈레이에게 악영향만을 준다는 걸 어필할 수 있지?
레이시가 직접 움직이지 않는 선에서 자기가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은 뭐지?
미스트는 미르와 레아의 목과 등을 한 손으로 용케 받치면서 생각에 잠겼고, 미르와 레아는 미스트가 자기를 바라보지 않자 미스트의 가슴을 때려대면서 시선을 끌었다.
“응? 아~ 죄송해요. 엄마가 지금 다른 걸 생각해버렸네요.”
아이를 돌볼 땐 아이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모든 게 너무 오랜만이라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미스트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미르와 레아를 재운 다음 집안일을 처리하기 시작했고, 에일렌이 소풍을 끝내고 달려오자 에일렌을 받아주면서 잘 놀고 왔냐고 물어봤다.
“웅! 미네르바 엄마가 하늘도 데려다 줬어! 그리구, 그리구, 엄청 큰 나무가 있는데 나중에 엘라 엄마가 허락해주면 같이 올라가기로 했어!”
“아하~ 그 나무인가요. 공주님은 머리가 복잡하실 땐 언제나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풍류를 즐겼답니다.”
“풍류가 뭐야아?”
“으음~ 노래를 부르거나 음료수를 마시며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거랍니다.”
“재미있어?”
“후후, 에일렌은 머리가 복잡할 땐 아무 생각 안 하고 마망하고 있는 걸 좋아하죠?”
“웅!”
“그런 거랍니다.”
“아하~, 그렇구나아~.”
“그럼 손 씻고 나오시겠어요?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요.”
“으응~ 별로 안 피곤한데.”
“침대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걸 드릴게요.”
만지면 딸깍딸깍 소리가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장난감.
하지만 에일렌은 미스트의 말에 눈을 보석처럼 빛내더니 레이시의 손을 잡고 욕실로 쪼르르 달려갔고, 미스트는 잔뜩 들뜬 에일렌의 모습에 작게 웃다가 미네르바를 보며 입을 열었다.
“미네르바.”
“응, 듣고 있다.”
“부엉이로 변하는 건 작은 덩치로도 가능한가요?”
“가능하지만, 힘이 약하다. 와이번 정도라면 죽일 수 있지만 그 몸으로 너랑 싸우면 10분 안으로 죽는다.”
“괜찮아요. 제게서 10분을 버틸 수 있으면 지금 왕궁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는 도망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 부탁할 일은 싸우는 게 아니라 겁에 질리게 하는 거거든요.”
“응?”
“그 쪽에서 뱀으로 협박했다면 이쪽에서는 맹금류라는 거죠.”
“……날 저 뱀과 동급으로 보지 마라, 기분 나쁘다.”
“후후, 알아요. 미네르바는 지성이 없는 드래곤과 싸워도 이기겠죠.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예요. 그들은 실력이 높은 하피가 새로 변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니 겁에 질리게 만들어주세요. 그 상대가 아무리 레이시의 시어머니라고 해도요.”
“나는 그 시어머니라는 게 뭔지 모른다.”
하피들이 먹잇감을 봤을 때의 미소를 짓는 미네르바.
입이 귓가까지 찢어진 채로 어금니를 드러내는, 숲 안에서는 절대로 봐서는 안 되는 표정 중 하나.
평소라면 여기에서 말렸겠지만, 미스트는 미네르바에게 조그마한 주의사항만 알려줄 뿐 더욱 부추겼다.
“오랜만에 왕가에 공포심이라는 걸 새겨줄까요? 엘라 공주님의 이명에 걸맞게요.”
“나는 책임지지 않는다.”
“네에~. 그럼 부탁할게요.”
아무리 시어머니라고 해도 손녀를 건드는 건 선을 넘었어요, 알티네 오라토리엄.
미스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시를 도와 에일렌을 재우러 위로 올라갔고, 미네르바는 미스트가 위로 올라가자 평범한 부엉이의 모습으로 변해 미스트가 알려준 장소로 날아갔다.
알티네 왕후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저택.
성인들만 지내는 곳은 이제 막 저녁식사 시간이었는지 알티네는 여러 시종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고 미네르바는 그런 알티네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빤히.
붉은색 눈동자로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자 알티네의 손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기 시작했고, 알티네보다 심약했던 다른 시종들은 알 수 없는 메슥거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법사! 마법사를 불러라!”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상에 알티네는 왕후 자리를 위해서 각종 인간 군상에게 시달렸었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마법사를 불러 저주나 독이 있냐고 물어봤지만, 지금 그들의 몸상태는 미네르바의 살기 때문.
당연하게도 마법사는 아무런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고, 알티네는 마법사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기사들에게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오라며 닦달하기 시작했다.
자기만 이런 반응을 보였다면 기분을 나쁘게 한 레이시의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 모두가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분명 누가 무슨 개수작을 부린 게 틀림 없다.
아마 레이시……, 아니, 엘라가 주운 들개 녀석인가?
레이시도 제법 이빨을 들이밀긴 했지만, 자기가 본 레이시는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괴롭히는 수단은 쓰지 않을 것이다.
직접 마주한 건 한 번뿐이지만, 레이시의 성격을 파악한 알티네는 이를 으득으득 갈더니 엘라는 여기에 없어도 도움이 안 된다며 혀를 차기 시작했다.
“이래서 천한 피는…….”
블루드나 아이야트는 자신과 동등한 공작가의 사람이니 라이벌로 인식할 수 있다.
슈레이가 밀리는 건 자기가 국왕을 유혹하지 못해서 슈레이를 늦게 낳아 슈레이가 불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한 자기의 잘못이다.
하지만 엘라는 다르다.
엘라는 고작해야 부패 귀족과 반란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잠시 안았었던 창녀의 딸.
혈통부터 고귀한 자기에게 협력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러질 않는다.
“알티네 왕후님. 내일 일정은…….”
“레이시에게 가죠.”
“네? 하지만 내일은 백작과의 만찬회가 있습니다. 점심 무렵에 공주비님의 저택에 찾아가시면 백작과의 만찬회에 늦을 겁니다.”
“이른 점심에 가면 문제 없겠죠. 이 일이 캘러미티 백작이 한 거라면 레이시의 얼굴에서 티가 날 거니까요.”
“으읏……. 그, 그럼 사용인들을 준비해놓겠습니다.”
“네. 준비하세요.”
알티네의 말에 빠르게 물러나는 사람들.
알티네는 자신의 사용인들이 물러나자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이를 으득으득 갈기 시작했다.
“감히…….”
천한 피에 홀린 년 주제에 자기에게 이빨을 드러내?
그것도 슈레이를 도와줄 기회를 줬는데?
알티네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레이시가 괘씸해지기 시작했고, 이내 미네르바의 살기를 분노로 잊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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