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3화 〉 연회 n일차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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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의 4일차.
타국의 사신들을 상대하는 건 이제 나름 익숙해질 시간이었지만, 레이시는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고, 그런 레이시의 모습을 바라보던 엘라는 그저 쓰게 웃다가 조심스럽게 레이시에게 사과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놀리거나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 레이시가 긴장하는 이유는 자기의 전 애인들 겸 아직도 자기라면 애인 정도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여자이니까.
물론 그런 과거에 대해서 후회하는 건 아니다.
뭐 때문에 선택했던지 여자들과 문란하게 놀아난 건 자기가 선택한 것이고 그것도 분명 어디에선 도움이 될 거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미안한 건 미안한 것.
엘라는 레이시를 끌어안으면서 작게 사과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사과에 어색하게 웃다가 푸념 섞인 한탄을 시작했다.
“엘라, 인기가 너무 많잖아요.”
“아, 아하하하…….”
“벌써 밖에 마차들이 줄 선 거 보이죠? 3일 까지는 저렇게 만지가 않았는데……, 전부 엘라를 만나러 온 사람인데, 어떻게 생각해요?”
“아니, 전부는 아니지. 반은 아마 레이시 보려고 하는 걸 거야.”
“부우우. 엘라.”
“미안.”
레이시가 볼을 부풀이고 화를 내자 그대로 꼬리를 말면서 사과하는 엘라.
아샤는 그런 엘라의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레이시에게 좀 더 갈궈달라고 부탁했고, 엘라는 아샤의 말에 발끈했지만, 레이시가 자기를 쳐다보자 얌전히 레이시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레이시는 엘라의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먼저 떠올린 건 전생에서 엄마가 보는 걸 스쳐 지나가면서 본 막장드라마.
거기에서는 어떻게 하더라……?
드라마에서는 대충 머리채를 잡고 막 싸웠었지.
지금 자기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레이시는 문득 궁금해져서 아샤에게 물어봤고, 아샤는 떨떠름한 얼굴로 레이시를 바라보다가 솔직하게 말해줄지 물어봤다.
“그, 좀 잔인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거든.”
“네?”
“음. 뭐, 괜찮겠지. 진짜 싸울 것도 아닌데. 지금 네 힘으로 평범한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고 확 당기면 두피까지 같이 벗겨져서 뼈가 드러날걸?”
“…….”
아샤의 말에 순간 입을 다물고 아샤를 바라보는 레이시.
아샤는 마차의 고삐를 옆에 있던 미네르바에게 건네준 다음 레이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 한번 설명해주었고, 레이시는 듣기만 해도 슬래셔물이 뚝딱 만들어지는 아샤의 설명에 눈을 피하며 자기 손을 바라봤다.
“영 안 믿기면 이거 찢어볼래?”
“네? 이렇게 두꺼운 책을요?”
“응. 한 번 해봐. 어차피 그거 쓸모없는 책이니까 그냥 스트레스 푼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을 거라며 찢으라고 말하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자기가 무슨 괴물인 줄 아냐면서 그대로 책을 양손으로 잡고 위아래로 비틀었다.
그러자 맥없이 찢어지는 책.
손에 걸리는 감각도 없었는데 쉽게 찢어지는 책의 감촉에 레이시는 멍하니 입을 벌리다가 조심스럽게 찢어진 책을 바구니에 넣은 다음 물리적 접촉은 최대한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마리아나 부하 정도로만 강하기만 하다면 마음껏 때리겠지만, 마리아도 벽천화 기사단의 단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니까 그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
“저, 의외로 강하네요…….”
“응, 이미 멸문한 가문의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암살자 가문의 전투원들을 혼자서 처리했잖아. 그런 거 보면 너도 약하지는 않아. 그저 싸우기 싫어할 뿐이지.”
아샤의 말에 떨떠름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웃음에 피식 웃더니 뭣하면 엘라에게 뭐든 맡기고 에일렌하고 같이 놀라면서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췄고, 레이시는 아샤의 입맞춤에 배시시 웃다가 정 힘들면 그렇게 하겠다면서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그러자 엘라는 레이시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고, 레이시는 엘라의 웃음에 배시시 웃다가 엘라가 잘못한 거니까 자기는 모른다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내가 잘못하긴 했지.”
“에헤헤, 그럼 슬슬 도착하니까 내려요.”
“응.”
레이시의 말에 자는 에일렌을 깨우는 엘라.
에일렌은 엘라의 손길에 눈을 깜빡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그런 에일렌의 눈가를 닦아주다가 에일렌이 일어나자 에일렌을 안아 들고 마차에서 내려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단번에 꽂히는 시선들.
레이시는 그 시선에 귀를 쫑긋 세우면서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봤고, 예상대로 엘라와 닮은 에일렌을 보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운이 좋아서 엘라의 선택을 받았을 뿐인데 저렇게 분에 넘치는 호의호식을 누리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레이시는 그런 사람들에게 운이 좋아서 그럴 뿐이라면 자기가 이렇게 사랑받을 리가 없지 않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에일렌이 배시시 웃으면서 오늘은 자기 또래도 많이 보인다며 기뻐하자 화를 내지는 못하고 말없이 에일렌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오늘도 조심해서 놀아요?”
“네에~.”
“아샤랑 미네르바 말 잘 듣고요.”
“네에에~.”
“사랑해요. 에일렌.”
에일렌의 이마에 입을 맞춘 다음 자신을 닮아 녹색의 빛을 띠는 에일렌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레이시.
에일렌은 레이시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까치발을 들고 레이시의 입에 입을 맞췄고, 레이시는 에일렌의 애교에 피식 웃더니 엘라와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레이시는 다시 첫날처럼 긴장하게 되었고, 엘라는 긴장한 티가 역력하게 나오는 레이시의 반응에 레이시의 손을 잡고 편하게 가자며 손을 잡아 이끌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으응.”
“그리고 여기에 모인 모두가 레이시에게 적대적인 건 아니니까 안심해.”
“네?”
엘라의 말에 떨떠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레이시.
에일렌이 있을 땐 적의만 한가득이어서 느끼진 못했었지만, 연회장의 안에는 엘라의 말대로 확실히 자기에게 우호적인 시선도 있긴 했다.
엘라나 다른 사람들처럼 연인으로서의 호감을 느낀다거나, 엘레오놀이나 루룬처럼 좋은 친구로서 호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육욕과 물욕에 가득 찬 느낌의 시선.
과연 이런 시선도 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 걸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엘라가 저런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 시점에서 레이시를 싫어하는 사람도 막 나갈 수는 없을 거라고 속삭이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거라면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그렇게 생각하던 레이시는 자기를 그저 지갑으로 보는 사람들마저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을 푹 내쉬며 엘라에게 기대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힘내자고 말했다.
“이제는 늦었으니까.”
“끄으응, 엘라가 그렇게 말하기에요?”
“푸훗. 미안.”
레이시의 투정에 피식 웃더니 레이시와 함께 다른 사람들의 인사를 받기 시작하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가 다른 사람들을 맞이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엘라의 옆에서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주기 시작했다
다행인 점은 엘라의 말대로 적대적인 사람들이 꽤 많긴 했어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아예 대놓고 자기를 적대시하지 못한 것이랄까?
만약 저 사람들이 전부 자기에게 대놓고 적의를 표했다면 울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부르르 떨면서 엘라에게 빨리 끝나면 좋겠다고 속삭였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레이시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래도 힘내야지?”
“으으으, 엘라. 엘라가 인기가 많은 건 알고 있었는데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요……?”
“예전에는 날마다 다른 여자를 만났으니까.”
“…….”
“지금은 레이시만 보는 거 알잖아?”
“아뇨. 으응, 그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뭐, 만난다고 해도 루룬을 제외하면 전부 나를 지갑으로 봤을 걸? 나는 적당히 스트레스 풀이용 인형으로 본 거고. 가볍게 만나고 가볍게 헤어진 거야.”
“으으으……. 뭐라고 화내기도 어렵게 만드네요.”
“그야, 레이시가 화내는 건 다른 무엇보다 싫으니까.”
레이시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자 레이시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 애정표현을 하는 엘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면서 수군거렸지만, 엘라는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레이시에게 애정을 표현하면서 남들이 자기가 레이시에게 완전히 홀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레이시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엘라가 이렇게 남들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이유는 바로 전쟁 때문이었다.
이 연회가 끝나면 신성 왕국과 연맹국 간에는 전쟁이 일어날 거고, 자기는 좋든 싫든 아샤와 함께 전쟁에서 불법적인 무기가 쓰이는지 안 쓰이는지 감시하는 감시관으로서 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기 위해서 자리를 비우면 레이시를 질투하는 사람이든, 레이시를 이용하려는 사람이든 지금이 기회라면서 레이시에게 접근할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다고 아예 접근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어중이떠중이들을 걸러낼 수는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평소보다 레이시에게 찰싹 달라붙어 움직였고, 레이시는 엘라가 평소보다 애교를 많이 부리자 뭔가 죄책감 같은 걸 느끼나 싶어서 자기는 괜찮다고 속삭여주었다.
“저는 엘라가 옛날에 누구를 사귀었든 신경 안 쓰니까요?”
처음에는 신경을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에일렌까지 가지고 지금 누구보다도 자기에게 헌신적으로 대해주는 걸 알고 있는데 과거 같은 걸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엘라의 애교를 받아주었고, 엘라는 자기 생각을 전혀 읽지 못하는 레이시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냥 한동안 못 볼 테니 애교를 부리는 거라고 대답해주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전쟁하는 동안에는 일하러 나가니까 그동안엔 못 만나서 하는 거야.”
“으응…….”
“안심해,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아니야. 그냥 나가서 전쟁을 구경하는 것밖에 안 해.”
“그래도요. 그것만 해도 충분히 위험하잖아요.”
“나를 그런 식으로 걱정해주는 건 레이시밖에 없을 걸?”
혼자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봐주는 사람은 몇이나 되고 그리고 그 사람이 전쟁터에 간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엘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시의 볼을 가볍게 잡아당겼지만, 레이시는 그래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한 곳으로 간다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겠냐면서 엘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눈을 깜빡이면서 한숨을 깊게 내쉬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반응에 다른 수가 있으면 다른 수를 찾아보자며 엘라에게 말했지만, 엘라는 그런 게 아니라며 레이시를 껴안더니 어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딱 키스까지만 하고 오면 안 되냐고 물어봤다.
“엣…….”
“응? 안 돼?”
“사, 사람들이 듣잖아요……!”
“뭐 어때? 부부끼리 키스할 수도 있지. 안 그래?”
“그, 그으으…….”
엘라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아무튼 안 된다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어보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에게 레이시를 확 끌어안으면서 다른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강요했고, 레이시는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갈 엘라의 목소리에 얼굴을 붉히면서 주변 사람들을 쳐다봤다.
마치 엘라에게 양보하듯이 얌전히 물러나 있는 다른 사람들.
레이시는 아까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던 사람들이 얌전히 있자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엘라는 얌전히 포기하라면서 레이시를 자꾸만 유혹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속삭임에 얼굴을 붉히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라는 레이시의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연회장을 빠져나간 다음 정열적으로 레이시의 입술을 훔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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