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애를 하게 된 건 좋지만 내가 여자가 되어버렸다-441화 (441/542)

〈 441화 〉 연회 n일차­2

* * *

연회장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레이시를 반기는 건 우아하게 춤을 추는 귀족들이었다.

미스트의 말과 다르게 꽤 침착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귀족들의 모습.

레이시는 그런 귀족들의 모습에 의외로 일이 편하게 풀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엘라와 팔짱을 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얼마 가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우아하고 체면을 지키며 움직이기는 했다.

적어도 겉모습만은.

첫째날과 다르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레이시에게 접근하는 사람들.

베스티야 왕국의 사람들은 이미 원하는 걸 얻어서인지 접근하지 않고 멀리서 레이시와 엘라를 응원했지만, 연맹국과 신성 왕국의 사자들은 레이시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서로를 견제하며 레이시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거기에다가 대화도 금방 전쟁으로 몰고 가면서 전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레이시가 피하려고 하면 어떻게든 붙잡고 늘어졌다.

“집요하네.”

“그러게요…….”

귀족 특유의 철면피에 엘라의 지위가 더 높으니 막 나가도 부끄러울 게 없다는 것까지 합쳐지자 거머리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와중에도 호시탐탐 대화할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

레이시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다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인내심이 없어지는 걸 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고 싫기는 하지만, 자기가 저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 엘라가 부담을 져야 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에일렌에게 가서 이상한 짓거리를 할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기에 레이시는 천천히 앞으로 나갔고, 귀족들은 레이시가 앞으로 나오자 피 냄새를 맡은 피라냐처럼 레이시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연회의 시간이 이미 반이나 지나가서인지 이제는 연맹국의 사람과 신성왕국의 사람들이 같이 다가왔고, 레이시는 서로에게 증오를 퍼부으면서 자신에게 아양을 떨기 위해 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속으로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싱긋 웃으며 연기하기 시작했다.

대화의 대부분은 레이시의 칭찬을 가장한 전쟁 요구.

레이시를 칭찬하면서도 자기들을 지지해준다면 레이시의 드레스와 장신구에 어울리는 것들을 주겠다고 유혹했고, 레이시는 그런 그들의 제안을 들으면서 적당히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엘라가 말했듯 저런 사람들의 제안에 하나하나 반응하면 귀찮아지고, 무엇보다 자기가 할 일은 전쟁에서 최대한 멀어져서 국왕이 이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이야기를 흘리던 레이시는 마네킹처럼 계속해서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는 말이라고는…….

“으응,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자작님께서는 제게는 다른 색의 드레스가 좀 더 어울린다는 건가요?”

……같은 상대방의 생각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말뿐, 레이시는 자기 의견은 죽어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레이시의 기계적인 태도는 사신들의 성격을 마구 긁어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의 절반을 에일렌 때문에 날려먹었는데, 상대방이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구는데 어떻게 짜증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하지만 레이시는 그런 상대방의 태도에도 꾸역꾸역 억지로 무시하면서 이야기를 피했고, 엘라는 오라토리엄 왕국의 대신들과 이야기하다가 레이시의 행동을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연회장에 국왕이 들어오자 레이시를 데리고 국왕에게 인사하러 갔다.

“국왕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아, 아버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음. 다들 즐기고 있는 것 같구나.”

국왕의 등장에 아예 국왕과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지만 국왕은 그런 사신들에게 어울려줄 생각이 없다는 듯 레이시에게 연회장의 주인공이 되어 본 소감은 어떠냐고 물어보며 레이시의 옆에 자리를 잡았고, 레이시는 국왕의 질문에 웃는 얼굴로 조금은 어지럽다고 대답해주었다.

“아무래도 저는 이런 곳에 잘 안 어울리나봐요.”

“흐응?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연회에 부족함이 있나?”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만약 음악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면 극단을, 음식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셰프들을 자르겠다고 말하는 국왕.

사용인들은 그런 국왕의 말에 크게 떨면서 레이시의 눈치를 살폈고, 레이시는 자기 말에 겁을 먹고 눈치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엘라가 자기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를 안 좋게 생각하고 틈만 나면 해를 입이려는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반응한 걸 본 레이시는 멋쩍게 웃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연회라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서 조금 어지럽다고 대답해주었다.

“연회라고 해서 즐거운 이야기가 오갈 줄 알았는데, 전쟁 이야기밖에 없어서 어지러워요.”

“흐음, 그런가?”

레이시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는 국왕.

사신들은 그런 국왕의 시선에 움찔 떨면서 뒤로 주춤거렸고, 국왕은 사신들이 주춤거리자 한숨을 내쉬면서 알만한 사람들이 왜 다들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렇게 전쟁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사신들.

마음 같아서는 여기에서 레이시의 태도를 비판하고 국왕에게 자기에게 투자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레이시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고는 하지만 이 파티의 주인공.

여기에서 레이시를 비판하는 순간 전쟁에서 좋은 조건을 얻는 건 물건너 간다.

그렇기에 사신들은 레이시에게 사과하면서 자제하겠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그들의 사과에 싱긋 웃더니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좋지만 여기에서는 미르와 레아를 축복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흠, 레이시의 말대로 이 자리는 에일렌의 동생이 잘 자라도록 축하하는 자리니까 경들도 명심해주면 좋겠군.”

레이시의 말에 동의하면서 대신들을 바라보는 국왕.

엘라와 레이시가 마음에 들든 말든 레이시를 돕지 않으면 혼을 내겠다는 듯한 말에 대신들은 고개를 숙이면서 국왕의 명을 받들겠다고 대답했고, 국왕은 그들의 대답에 흡족하게 웃으면서 타국의 사신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전부 모았을 때 아이야트와 슈레이,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들이 연회장에 들어왔고, 사신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이 지금이 딱 적기라고 생각하며 눈을 빛냈다.

“그럼 엘라, 레이시, 이 자리를 빌려서 묻겠네. 그대들은 이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국왕의 질문에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라.

누가 물어도 레이시에게 전쟁에 대한 걸 물어본다면 레이시는 아마 전쟁은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레이시는 사람이 죽는 건 설령 그 사람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싫어하니까.

그리고 레이시가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사신들은 일제히 레이시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없다고 판단하고 차선의 수를 사용할 것이다.

그건 레이시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엘라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을 가늘게 뜨면서 국왕을 바라봤고, 레이시는 엘라와 국왕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에 괜찮다면서 엘라의 손을 잡아주었다.

잘 모르겠지만 국왕은, 아니, 자신의 시아버지는 자기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 자기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으면 스킬이 먼저 자신에게 경종을 울려줬겠지.

그러지 않은 걸 보면 국왕의 이 질문은 내가 전쟁이라는 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대답할 걸 예상하고 한 것이다.

“무섭다고 생각해요.”

평소보다 머리를 열심히 굴린 레이시는 이번에도 중립적인 대답을 내놓으면서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전쟁이란 무섭다.

거기까지만 들으면 전쟁을 반대하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자기에게 해가 끼치지 않는 조건을 내건다면 신경을 안 쓴다는 말로도 들을 수 있는 상황.

국왕은 그런 레이시의 대답에 미소를 머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첫 일을 전쟁처럼 무거운 일로 하는 건 그렇겠구나. 거기에다가 엘라는 왕위 계승권을 노리지도 않을뿐더러 계승 순위도 낮고, 그런 아이와 며느리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건 너무한 처사겠지.”

숨을 잠시 고르고 아이야트와 슈레이의 등에 손을 올리는 국왕.

그 후 국왕은 전쟁과 관련된 일은 이 두 사람에게 말해서 의견을 정리하게 하고 레이시가 두 사람의 제안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기로 하자고 말했고, 엘라는 그런 국왕의 말에 작게 감탄했다.

이렇게 된다면 레이시에게 직접 전쟁에 대해서 요구하는 사람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종 결정권이 다른 곳으로 간 것도 아니라 레이시에게 완전히 홀대할 수도 없으니 레이시는 이득만 받고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다.

거기에다가 아이야트나 슈레이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으니 차기 국왕이 되었을 때 신하들을 압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겠지.

엘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국왕을 바라봤고, 국왕은 피식 웃으면서 고맙다는 말은 나중에 해도 괜찮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렇다면 다들 연회를 즐기게나. 나는 손녀를 보러 가겠네.”

국왕이 물러나자 다시금 움직이는 신하들.

하지만 이번에는 레이시가 아닌 아이야트와 슈레이에게 몰리기 시작했고, 엘라는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관심을 끄자 레이시의 손을 잡고 이런 부분에선 레이시가 나은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에헤헤, 아버님이 평소에 저를 아껴주셔서 알 수 있었던 거예요.”

“그래?”

“네. 안 그랬으면 저도 아무 생각도 못하고 엘라의 손만 잡았을 거예요.”

“흐응.”

연정의 야차란 스킬은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것.

그러니 평소에 자신을 어떤 형태로든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판단은 못 내렸을 거라며 레이시는 국왕에게 공을 돌렸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연회장을 힐끗 둘러봤다.

“3일찬데 우리에게 오는 관심은 확 줄어들었네.”

“그러게요. 그래도 이게 좋잖아요.”

“응. 그건 그래.”

지금 레이시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전부 베스티야 국가의 사람들.

이미 원하는 걸 얻을 대로 얻은 사람들은 순수하게 레이시의 몸을 걱정하는 동시에 미르와 레아에게 줄 선물이나 에일렌에게 줄 선물을 이야기하면서 다과와 와인을 즐겼고, 엘라와 레이시는 그런 사람들을 부부로서 대접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둘이서 20명이 넘는 사람들의 대화를 받아주느라 목이 마르고 정신적으로 조금 지치긴 했지만, 결혼식에 대한 말이 나온다거나 그래서 기쁘기도 한 일.

그렇기에 레이시는 연회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엘라에게 머리를 기댄 채 기쁘다며 배시시 웃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자기도 행복하다면서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나저나 내일부터는 좀 걱정이네.”

“네?”

“연회의 3일 동안은 왕족, 그리고 대신들만이 연회장에 참석하지만 4일차부터는 일반적인 왕궁의 귀족들도 참석할 수 있거든. 그러면 그, 알다시피, 음…….”

“전 애인이요?”

“……미안.”

“아뇨, 괜찮아요.”

“하여튼 그 년들도 올 텐데 괜히 네게 해코지하는 거 아닐까 몰라? 아니면 네게는 많은 애인이 있으니까 나와의 시간을 양보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볼 수도 있고.”

“…….”

“뭐, 선을 넘는다면 내가 처리해주겠지만, 그런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싫잖아. 그래서……, 조금 걱정되네.”

“으응…….”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레이시.

하지만 레이시는 이내 괜찮을 거라면서 엘라의 손을 잡았고, 엘라는 해맑게 웃는 레이시의 얼굴에 피식 웃더니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레이시, 많이 강해졌네.”

“저는 엘라의 아내인 걸요. 강해져야죠.”

“고마워.”

“에헤헤, 아니에요. 제가 더 고마워요. 사랑해요.”

엘라에게 사랑을 표현하던 레이시는 다시 다른 사람들이 오자 소파에서 일어나 베스티야의 사신들을 맞이해주기 시작했고, 엘라는 자기가 도와주지 않아도 사신들과 대화를 나누는 레이시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시를 도와 베스티야의 사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