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0화 〉 연회 n일차1
* * *
“흐아아아암…….”
“피곤해요?”
“네에, 조금 많이 피곤해요. 그리고 결국 애칭 문제 때문에 침대에서도 제대로 못 잤고요. ……두 시간은 잘 수 있었는데.”
“후후, 저만 쏙 빼놓고 재미있게 노셨나 봐요?”
“으읏!? 죄, 죄송해요…….”
“화난 건 아니에요. 대신 저도 애칭을 얻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레이시의 머리를 빗질해주면서 웃는 미스트.
어제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즐길 때 미르와 레아를 돌봐준 걸 알고 있는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쭈뼛거리면서 지금 당장은 잘 안 떠오른다고 사과했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말에 싱긋 웃으면서 그럼 다른 사람들의 애칭을 알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으으응.”
“공주님은 어떻게 불러요?”
“……여, 여보야로요.”
“헤에~.”
레이시의 말에 비음을 흘리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묶어주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비음에 움찔 떨다가 뭐라도 좋으니 반응해보라고 투덜거렸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투정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엘라다운 선택이라서 그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요?”
“으응…….”
“미네르바는 뭐로 불러주기로 했나요?”
“내 미네르바요.”
“‘레이시의’ 라는 단어가 중요한 거네요.”
“그……, 네.”
미네르바는 평소에도 자기가 레이시의 것이라고 늘 말하고 다녔으니까 대충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
그렇게 생각한 미스트는 레이시의 말에 대충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아샤는 뭐라고 불렀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말하기를 꺼려하면서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목덜미를 가렸다.
레이시가 가린 곳은 화장품으로 가린 키스마크가 있는 곳.
아샤의 호칭을 물어보자마자 가린다는 건 아샤의 호칭은 꽤나 부끄러운 걸까?
미스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레이시의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미스트가 계속해서 아샤를 어떻게 부르냐고 물어보자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돌렸다.
“말해주기 싫어요?”
“그으으……, 그게.”
“후후, 말씀해주세요. 안 되나요?”
말해주지 않으면 너무 슬퍼서 울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미스트.
레이시는 그런 미스트의 말이 농담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미스트가 우는 척하자 움찔움찔 떨면서 미스트를 바라보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자 미스트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넘어오겠다 싶어 계속해서 레이시에게 말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부탁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요.”
“네?”
“우, 우리 귀염둥이에요…….”
“푸흐읍! 큭! 크큭! 아, 아샤가요?”
“쉬잇, 비, 비밀이라고요…….”
“크힛! 아, 아흐으으……, 알았어요! 저희들끼리의 비밀로.”
욕실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고 둘만이 남았을 때 찰싹 달라붙어서 레이시도 주의깊게 듣지 않으면 못 들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었던 아샤.
아마 아샤 성격상 그런 호칭으로 불러달라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웠던 거겠지.
레이시는 그걸 알면서도 미스트에게 말한 것에 죄책감을 지니면서 울먹거렸고, 미스트는 튀어 나온 웃음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레이시에게 입힐 드레스를 옷장에서 꺼내기 시작했다.
“저번이랑 다른 옷들밖에 없네요?”
“같은 옷을 입으면 귀족 사회에서 얕보이니까요. 한 파티에는 한 드레스만, 그게 기본이에요.”
“사치가 좀……, 심하네요.”
“후후, 여러 국가에서 사신들이 모이는 파티에서는 백작 이상은 다들 이래야 해요. 그러라고 돈을 받는 것도 있으니까.”
수도에서 일하면서 다른 국가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일을 배우는 백작 이상의 사람들은 전원 품위유지비를 받는다.
사치를 부리는 것으로 국력을 자랑하는 것도 일이니까.
그리고 그러한 오라토리엄 귀족들의 정점에 있는 왕족은 장신구마저도 같은 장신구를 써선 안 된다.
사용인의 경우에는 그렇게 자주 바꾸면 보안에 문제가 생기니 어쩔 수 없지만, 몸에 걸치는 건 화장품부터 향수까지 전부 다 다른 걸 써야 한다.
오로지 왕가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스트는 레이시의 표정을 보고는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참아달라며 가볍게 입을 맞췄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자기는 아무 생각이 없다며 멍하니 팔찌를 착용했다.
“이거 비싸겠죠?”
“네에, 왕가의 귀금속 창고에서 꺼내온 팔찌니까요. 아무런 마법적 처리가 안 된 팔찌라고는 해도 거기에 든 보석과 금속의 양이 많으니까 귀족 거주구의 건물 한 채 정도는 너끈히 살 수 있답니다.”
“……으으, 손목이 부서질 거 같아요.”
“후후, 얌전히 있으면 부서질 일은 없을 거랍니다. 그리고 뭔가 거칠게 움직일 일이 생기면 주변의 사람들이 먼저 눈치를 채실 거고요.”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앓는 소리를 내다가 미스트에게 손을 내밀며 에스코트를 부탁했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손을 가볍게 잡으면서 자기 애칭은 언제 만들어 줄 거냐고 물어봤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꺼내시는 거예요?”
“후후, 딱 좋은 타이밍이잖아요? 긴장도 덜어낼 겸 잡담이나 하자고요?”
“부끄러운데.”
“저는 아샤처럼 그런 호칭은 안 바라요. 간단한 거로도 괜찮아요. 그러네요. 언니는 어떤가요? 둘만 있을 땐 언니라고 불러주세요.”
“으으으응…….”
누나도 아니고…….
하긴 이제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지.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미스트를 언니라 부르면서 에스코트를 부탁했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요청에 싱긋 웃다가 에일렌과 함께 레이시를 마차에 태워주었다.
“미르와 레아는 제가 잘 돌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으응, 아이들에게 미안하네요. 마망이면서 이렇게 밖으로만 다니고…….”
“괜찮아요. 레이시가 돌보기 싫어해서 못 돌보는 게 아니잖아요. 이 일이 끝나고 시간이 있을 때 잔뜩 돌봐주시면 되는 거예요. 알겠죠?”
“네, 언니…….”
“후후, 착하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레이시.”
레이시에게 입을 맞춰주면서 문을 닫는 미스트.
레이시는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애교를 부리며 안기는 에일렌의 모습에 미소를 짓다가 오늘은 다른 애들과 잘 지낼 수 있겠냐고 물어봤고, 에일렌은 레이시의 말에 잠깐 고민하더니 다른 엄마들을 욕하지 않으면 착하게 있겠다고 말했다.
“으응, 착해라~.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착할까요?”
“마망!”
“에헤헤, 쪽.”
“으응~! 마망, 조아!”
“저두 에일렌을 사랑해요.”
에일렌의 등을 토닥이며 꼭 안아주는 레이시.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있자 엘라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고, 마부석에는 아샤와 미네르바가 앉아서 출발하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나저나 가까운 거리인데 그냥 걸으면 안 되는 걸까요?”
“체면이야.”
“뭔가 귀찮은 걸 전부 체면으로 떼우는 느낌이에요.”
“푸핫! 레이시도 귀족에 대해서 좀 더 알아냈네. 기쁘네.”
“……정말이에요?”
“그런 게 없잖아 있어. 사치라는 건 귀찮은 걸 누가 대신해주는 거니까. 10여 년 전의 일인데 연맹국의 국왕이 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할 땐 밥을 대신 먹여주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건 좀…….”
“그렇지? 뭐, 그런 사소한 것들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을 자랑해서 자신의 재력 같은 것을 과시하는 거야. 그러니까 귀찮은 걸 품위유지나 체면 같은 걸로 대충 넘기는 경우가 많지.”
엘라의 말에 레이시는 귀족은 정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안 된다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말에 그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말해주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무시하니까 적당히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라준다는……, 딱 그 정도의 이해가 적당하다고.
“귀족이라는 게 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으응.”
“오늘 연회장은 평소보다 더 전쟁 같을 거니까 각오해.”
“네.”
이 부분에 대한 건 미스트에게 충분히 설명을 들었었다.
첫째 날에는 제대로 된 대화 자체를 못 했고, 둘째날에는 에일렌의 감정을 다스린다고 하루동안 출석을 안 했다.
그 덕분에 연맹국이나 신성 왕국의 사신들은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의 30% 정도가 사라졌고, 덕분에 남은 시간 안으로 국가에서 요구한 것들을 전부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졌다.
거기에다가 자기는 사신들의 데이터에는 없는 사람.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뭘 싫어하는지 몰라 접근이 힘든 사람이다.
그러니까 줄어든 시간에 대한 압박은 다른 때보다 더욱 커질 것이고 그렇기에 사신들은 체면을 뒤로한 채 자기에게 접근할 수도 있다.
아마 첫날보다 더욱 직설적이고 추잡하게 다가오겠지.
레이시는 고기까지 생각하자 정말 싫다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다시 자기가 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엘라와 아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수도 없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 솔직히 말해서 거기에서 우리가 할 일은 별 거 없을 거야. 굳이 있다면 전쟁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대화를 피하는 거겠지. 우리는 명분. 직접 일을 처리하는 건 슈레이 언니나 아이야트 오라버니, 그리고 아빠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을 제치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의 말을 끊기만 하면 돼.”
“그렇군요.”
“힘들 거야. 꽤 노골적으로 다가올거거든.”
무슨 이야기를 말하더라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추측이나 그런 게 아니라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다.
엘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시에게 각오를 다지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더니 미스트에게 배운 것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럼 해볼게요.”
“응. 힘내줘.”
“후우우우…….”
“우웅…….”
“왜 그래요? 에일렌.”
“마망, 힘내애애~.”
“……푸흣. 네, 마망도 힘낼게요.”
이야기가 끝나자 눈치를 보면서 꼬옥 레이시를 안아주는 에일렌.
레이시는 에일렌의 포옹에 긴장이 확 풀리는 걸 느끼면서 에일렌을 안아주었고, 엘라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마차가 멈추자 마차에서 먼저 내려 에일렌과 레이시를 에스코트했다.
“그럼 에일렌, 다른 애들과 잘 지내고, 누가 널 얕보면 저번처럼 울지 말고 한 방 먹여줘.”
“응! 엄마!”
“엘라아아, 에일렌에게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우리 애가 우는 것보다야 낫지. 그리고 에일렌이 나쁜 애도 아니고.”
“그래도 차암……. 싸우지 말고 잘 지내야 해요. 아시겠죠?”
“웅! 친구들하고 안 싸울게, 마망!”
“아하하하……. 그럼 미네르바, 아샤. 잘 부탁해요. 다른 아이들과 싸울 거 같으면 개입해도 괜찮으니까, 싸우지 않게 해주세요.”
“알았어, 너도 조심하고.”
“네.”
“그럼 주인, 갔다 오겠다. 에일렌도 인사해라.”
“빠이빠이~! 갔다 올게에에~!”
“조심해요오오~.”
레이시의 말에 손을 힘차게 저으면서 아샤와 미네르바의 손을 잡고 아이들이 있는 작은 연회장으로 떠나는 에일렌.
레이시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면서 에일렌이 다른 연회장에 들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고, 이내 에일렌이 사라지자 한숨을 푹 내쉬면서 엘라와 팔짱을 꼈다.
“으응……. 여보야…….”
“괜찮아. 안 괜찮아도 괜찮게 만들어줄 테니까 긴장 풀고 편하게 가자. 알겠지?”
“……네. 힘내볼게요.”
“응, 그럼 가자.”
엘라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다가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어깨를 활짝 펼치는 레이시.
긴장한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레이시는 첫날에 왔을 때보다 꽤 화났다는 걸 어필할 수 있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 천천히 연회장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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