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화 〉 도망치는 사람과 쫓는 사람3
* * *
“맛있었다아아아~.”
볼록 튀어나온 에일렌의 배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며 배시시 웃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돌아가자고 말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배를 좀 꺼트린 다음 온천에서 몸을 가볍게 씻고 자는 레이시와 엘라.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레이시는 기지개를 쭉 켜다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슬쩍 돌려 창문을 바라봤고, 자신의 시선이 닿자 움찔거리는 감시인을 보고 콧방귀를 뀌면서 커튼을 쳤다.
대나무를 이용해서 만든 발 같은 커튼.
레이시는 오라토리엄 왕국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한, 그리고 묘하게 향수병을 자극하는 커튼의 모습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에일렌에게 갔고, 에일렌은 레이시가 자신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안아주자 레이시에게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
“오늘은 뭐하고 놀까요?”
그 모습에 꺄르륵 웃는 레이시.
레이시는 에일렌이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배시시 웃으면서 질문을 이어갔고, 에일렌은 레이시의 말에 손을 버둥거리면서 레이시에게 모래장난을 치러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으으응~ 모래장난치러 갈까요?”
옹알이라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엄마라 그런지 에일렌이 뭘 원하는지 족집게처럼 맞춰낸 레이시는 오늘은 한가하다는 엘라와 함께 에일렌과 모래장에 갔다.
저번에 빌렸었던 모래삽과 그릇을 받은 다음 에일렌과 함께 장난치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에일렌이 자기를 볼 때마다 가끔씩 손을 흔들어주면서 에일렌에게 인사해주었다.
“후후, 귀엽네. 에일렌. 너를 좀 더 닮은 거 같지 않아?”
“으응? 그래요? 저는 엘라를 더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 걸요?”
“응? 왜?”
“이렇게 놀아서……?”
레이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껏 쌓은 모래성을 손으로 부숴버리는 에일렌.
에일렌은 부서지는 모래성을 보고는 꺄르르륵 웃으면서 다시금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에일렌의 모습에 눈을 깜빡이다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에일렌에게 오렌지 쥬스를 주었다.
“에일렌이 주스 마셔도 되나?”
“되긴 하는데 뭐라고 말 안 해주시는 거예요?”
“몰라?”
레이시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엘라의 모습에 엘라의 볼을 약하게 꼬집다가 이내 배시시 웃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애교에 작게 웃다가 에일렌이 컵을 돌려주자 에일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에일렌을 칭찬해주었다.
“꺄우우!”
한 명만 칭찬해주는 게 아니라 둘이서 칭찬하자 더욱 기뻐하며 웃는 에일렌.
칭찬해주는 두 사람이 자신의 부모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에일렌은 한참을 웃다가 엉금엉금 기어가서 엘라에게 안겼고, 엘라는 에일렌의 포옹에 배시시 웃으면서 에일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많이 못 안아줘서 미안하네. 그래도 좀 있으면 은퇴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먀우?”
엘라가 어려운 말을 하자 멍하게 눈을 깜빡이는 에일렌.
엘라가 자기는 따라 할 수 없는 말을 하자 에일렌은 계속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모르겠다면서 엘라의 허벅지를 때려댔고, 엘라는 에일렌의 투정에 키득 웃으면서 에일렌을 안아주었다.
“엄마가 안아줄까?”
“어마?”
“엄마.”
“어음마!”
“킥킥, 아직 멀었나보네. 3살이면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망!”
“……그냥 반복 훈련을 덜한 거구나.”
엘라는 에일렌의 완벽한 발음에 멋쩍게 머리를 긁다가 레이시를 괜히 노려보았고, 레이시는 엘라의 눈빛에 어색하게 웃다가 엄마 발음도 제대로 하게 공부를 시켜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엘라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발음 같은 건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말한 다음 장난을 치듯이 에일렌에게 레이시를 발음하게 해보았다.
처음에는 에일렌에게 뭘 시키는 거냐며 엘라를 말리는 레이시.
하지만 에일렌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오물거리자 같이 기대감에 부풀어 에일렌을 가만히 바라봤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웃음을 참으며 천천히 끊어주며 레이시의 이름을 에일렌에게 말해주었다.
“레.”
“레에.”
“이.”
“이.”
“시.”
“히!”
“레이시.”
“레에히!”
“레이시, 마망이야.”
“레에히 마망!”
아직 ㅅ 같은 어려운 발음은 전혀 하지 못해 잔뜩 일그러지는 에일렌의 발음.
하지만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그것도 자신의 아이가 생각하면 100점 만점에 120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발음이었기에 엘라는 에일렌을 칭찬하면서 에일렌을 번쩍 들어주었고, 에일렌은 하늘 높이 날자 꺄르륵 웃으면서 손을 휘저었다.
“훌쩍.”
“엑!? 우, 울어!?”
“그치만 기쁜 걸요…….”
자기 아이가 이렇게 컸다.
지금까지 미련이라고 해야 할지, 자기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레이시였지만, 에일렌이 자기 이름을 부르며 꺄르륵 웃자 레이시는 그런 미련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엘라의 손에 안긴 에일렌을 바라봤다.
이제는 제법 커서 키가 90cm에 가까워진 에일렌.
엉거주춤하지만 걷기도 잘 걸을 수 있고, 이제는 말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까 뭔가……,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에일렌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에일렌을 꽉 안아주었고, 에일렌은 레이시의 포옹이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자 얌전히 레이시를 바라봤다.
“마마앙?”
“네에~ 마망이에요. 더 놀까요?”
“으뮹.”
에일렌은 레이시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이제 노는 건 질렸다는 듯 레이시에게 안겼고, 레이시는 에일렌의 대답에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오늘은 에일렌이 먹고 싶은 걸 먹자면서 배시시 웃었다.
“저희파티해요!”
“응? 무슨 파티?”
“으으응~ 에일렌이 말을 했으니까 파티 열고 싶어요.”
“그럴까?”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자식의 성장을 기념해서 파티를 열어도 상관 없겠지.
엘라는 그런 생각에 레이시에게 어떤 파티를 즐기고 싶냐고 물어봤다.
여기는 귀족을 상대로 하는 시설이니까 작은 규모의 파티를 열고 싶다고 하면 알아서 모든 걸 준비해줄 거다.
조금 규모가 크면 아멜리아의 사람들을 부르면 되고…….
레이시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규모가 커질 리가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를 바라보며 다시금 어떤 파티를 하고 싶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엘라의 질문에 에일렌이 먹고 싶은 걸 먹고 즐길 수 있는 파티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한 가지 짓궂은 말을 덧붙였다.
“참~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 정도 접근도 못하는 개인적인 파티면 좋겠어요! 에일렌의 파티니까요!”
“……풉.”
“……에헤헤.”
회의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반대한 사람에게 아예 협상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에게 그게 화를 내는 거냐며 레이시의 뺨을 간지럽혔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 혀를 빼꼼 내밀고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그냥 에일렌하고 일주일 동안 놀고 싶어서 파티를 열어달라고 말한 걸요.”
“킥킥! 그런 거로 할까?”
화를 내는 방법치고는 다소 온건하고 무해한 방식.
그저 사람을 안 만날 뿐이니까 상대방도 레이시의 화가 풀릴 때까지 레이시에게서 떨어져 있다가 레이시가 감정을 추스르면 다시 돌아가면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차갑게 머리를 식히자고 제안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의 행동.
하지만 자기가 일주일의 여유를 주고 레이시를 설득하라고 했으니 상인들은 속이 타들어가겠지.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레이시의 볼에 입을 맞췄고, 레이시는 엘라의 입맞춤에 얼굴을 붉히다가 자기는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다음 에일렌을 바라봤다.
“에일렌은 뭘 좋아할까요?”
“응? 몰라?”
“……뭐든 잘 먹어서요. 뭔가 특히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은데 뭔가 특히 좋아하는 게 없단 말이죠.”
편식을 안 하는 착한 아이지만, 뭔가 특히 더 좋아하는 음식도 없어서 곤란하다.
레이시가 그렇게 말하자 엘라는 편식을 안 하는 착한 아이인데 뭐가 곤란하냐면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레이시는 엘라의 질문에 에일렌은 착한 아이인데 자기가 착한 엄마가 못 될 거 같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이러다가 나중에 에일렌에게 ‘마망은 약하니까 내게 맡겨!’ 같은 소리를 듣는 거 아니겠죠?”
“가능성이 없잖아 있는데.”
“엘라!”
“아하하핫! 농담이야. 그래도 에일렌은 나보다 강하면 좋겠는데? 부모라는 건 자식이 자기보다 잘 됐으면~하고 바라잖아.”
“그으으건, 그렇지만요…….”
엘라의 말에 떨떠름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엘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기도 자기보단 에일렌이 잘 되면 좋겠고 에일렌이 힘든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고 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무서워한다고 말했는데 가능성이 없잖아 있다니…….
레이시는 입술을 샐쭉하게 내밀고 엘라에게 머리를 기대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피식 웃더니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괜찮지 않냐고 물어봤다.
“레이시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 나는 에일렌을 위험에서 지켜내는 역할. 각자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부우우우…….”
“후후, 삐졌어?”
“별로요…….”
레이시의 대답에 엘라는 레이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며 레이시를 달래주었고, 레이시는 엘라의 애교에 축 늘어지더니 에일렌을 바라봤다.
“먀우?”
“좀 더 놀까요? 아니면 낮잠 잘까요?”
“나자암~.”
“에헤헤, 그렇대요. 씻고 낮잠이나 잘까요? 그리고 저희 에일렌이 좋아할만한 것들을 생각해봐요.”
“그러자.”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 건지 눈을 빛내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두 사람과 함께 온천에 들어갔고 작은 목욕통에서 열심히 헤엄치는 에일렌의 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이걸로 자기는 해본 적 없지만, 에일렌에게 꼭 시켜주고 싶은 것을 하나 끝냈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와 서로의 몸을 씻겨준 다음 방으로 돌아가 두 사람이 낮잠을 자는 걸 지켜봤고, 레이시와 에일렌이 깊게 잠들어 새근거리자 엘라는 두 사람에게 이불을 덮여준 다음 미스트를 불렀다.
“네, 공주님.”
“아멜리아로 가서 레이시가 일주일 동안 에일렌과 함께 지낼 거라고 말해줘. 아, 내가 뒤에 협박한 건 모르는데 그냥 안 만나겠다는 식으로.”
“소문만 퍼트리면 될까요?”
엘라의 일처리치고는 온건한 방식.
그렇다면 아마 레이시가 생각해낸 화를 내는 방법이겠지.
미스트는 레이시답다면 레이시다운 방법에 소리를 죽여 작게 웃다가 소문만 퍼트리면 되면 한 가지 덧붙여도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뭘 덧붙이게?”
“그러네요. 에일렌과 그냥 논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가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무척 큰일이 생겼다고 하죠. 그러네요. 에일렌의 재능이 공주님과 버금갈 정도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그래서 가족끼리 축하 파티를 연다고 한다면 누구도 뭐라고 못할 거예요.”
“거기 상인들은 레이시를 보모 메이드로 생각하지 않아?”
“지금쯤이면 루룬 씨가 다 설명했을 걸요?”
“아, 하긴…….”
팔불출처럼 들릴 수 있지만, 오늘 에일렌에게서 재능의 편린을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한다.
미스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떠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미스트의 질문에 진짜로 말하면 자기가 팔불출처럼 보이겠냐고 물어봤다.
“맞잖아요?”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지만.
엘라는 미스트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럼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미스트는 엘라의 지시에 그럼 다녀오겠다면서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방에서 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