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화 〉 도망치는 사람과 쫓는 사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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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의 협박에 고요함이 흐르는 회의장.
레이시는 엘라의 협박에 당황하면서 엘라를 바라봤지만, 평소와 다르게 엘라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는 걸 느낀 레이시는 침을 삼키면서 미스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엘라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엘라가 얼마만큼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엘라에게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도시를 없애는게 가당키나 한 거냐면서 엘라를 쏘아붙였고, 엘라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문관이니까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는 건 이해해줄 수 있어.”
“네……?”
“서로 칼을 들고 싸우는 녀석들은 대부분 내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데, 문관들은 뺨을 얻어맞는 일이 없으니까 자기가 맞는다는 생각을 못 하잖아. 그러니까 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그러면 제대로 머리라도 조아려야지.”
히죽 웃으면서 천천히 레이시에게 가장 먼저 대든 사람에게 가는 엘라.
루룬은 엘라의 행동에 당황하며 엘라를 막으려고 했지만, 엘라는 루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앞에 서서 남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남성은 전신의 뼈가 삐걱거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몸이 짓눌리는 느낌.
자칫 잘못하면 전신의 뼈가 제각각으로 움직이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남성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를 다다닥 떨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남성의 반응에 불쌍하다며 비웃다가이내 남성의 목에 손을 올렸다.
“문명인이라는 것들이 야만인들보다 예의가 없다니, 참 웃기지? 인어들도 개지랄병을 떨어서 짜증나는데……, 인어에게 보여줄 본보기로 쳐죽여줄까?”
“이, 이건폭거입니다!”
“아니야. 여긴 레이시를 위해서 내가 만든 도시. 내가 망가트려도 내 개인적인 실패로 끝나지 폭거니 뭐니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준은 아니야. 알아?”
히죽 웃으면서 여기에서 확 죽여줄지 물어보는 엘라.
남성은 그제야 엘라가 진심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걸 느끼고는 덜덜덜 떨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남성의 반응에 히죽 웃으면서 지리지는 말라고 말한 다음 목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참 이상하지, 자기가 죽기 직전까지는 자기가 죽을 거라고는 인식하지 못하다가 막상 죽을 때가 다 된다면 공포에 질려서 살려달라고 빌지. 이미 상대방은 화가 있는대로 났는데 말이지.”
“자, 자, 자, 잘못……!”
“자, 그럼 다시 말해봐. 레이시가 건물을 짓는 것에 대해서 뭐 어떻다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찬성하겠습니다!”
“그래, 잘 기억해. 너희들이 받는 지원은 모두 레이시가 루룬에게 지원을 해주자고 해서 얻은 거야. 너희들이 잘 나서 얻은 게 아니라고.”
남성의 대답에 천천히 손을 떼는 엘라.
엘라는 루룬을 보더니 실력주의도 좋지만, 자기 주인을 파악할 수 있는 정도의 멍청함을 지닌 사람이 좋다고 말한 다음 다시 자리에 앉았고,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행동에 덜덜 떨면서 엘라를 바라봤다.
“너, 너무했던 거 아니에요?”
“응? 뭐가?”
“사람 목숨가지고 협박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응? 무슨 소리야? 나는 없는 말은 안 했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더니 마저 말을 이어가는 엘라.
엘라는 이 도시가 생기게 된 계기 자체가 레이시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이며 만약 레이시가 부담감을 느끼고 안 하겠다고 말하면 엘레오놀의 지원도 없었으며, 왕가의 지원이나 다른 귀족의 지원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꽉 찼겠지. 아마 아이야트 오라버니가 고른 사람들로 꽉 찬 회의장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됐다면 레이시가 건물을 짓고 싶다고 말했을 때 두 손, 두 발을 다 들면서 건물을 제발 지어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레이시가 자기 세력권에 들어온다면 자기가 세트 선물로 들어오니까.
아마 레이시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서 레이시에게 건물을 지어달라고 애원했겠지.
파벌 싸움을 하는 멍청이들은 대게 도움이 안 되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능력 지상주의의 녀석들보다 몇 배는 낫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한숨을 내쉬면서 소파에 몸을 파묻었고, 레이시는 엘라의 반응에 그래도 사람들을 그렇게 협박하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까와는 다르게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
레이시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어색하게 웃다가 조심스럽게 루룬을 바라보면서 학교를 지어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고, 루룬은 레이시의 질문에 당연하다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지도, 자원도 충분하답니다. 그런데 학교라고 하면 어떤 학교를 지으실 겁니까? 대학일까요? 아니면 아카데미 형식의 실무 중심 학교입니까?”
“네?”
“어떤 학교를 짓느냐에 따라 성격이 많이 갈리기 때문에……,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저, 저는 일반학교를 생각했는데요?”
“네?”
레이시의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는 루룬.
레이시는 루룬이 갑자기 대답을 멈추자 똑같이 눈을 깜빡이면서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거냐고 물어봤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레오놀은 루룬이 설명하기는 어렵겠다 싶어서 자기가 대신 대답해도 괜찮겠냐면서 손을 들었다.
“레이시 씨?”
“네?”
“왕족이 짓는 건물의 의미를 아시나요?”
“으, 으으응……?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아뇨, 이 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왕가를 곁에서 보좌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잘 모를 수도 있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해요.”
숨을 잠시 한번 고르는 엘레오놀.
“왕족이 보통 도시에다가 건물을 짓는 건 그 도시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채용하거나 거기에 체류시키겠다는 거예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건물을 짓는 곳은 대도시나 자신이 계획해서 만든 도시에 한정되고 짓는 건물의 형식도 대부분은 고급의 인재를 모을 수 있거나 아무나 다가올 수 없는 고급 건물이 되죠. 그런데 일반 학교를 짓겠다는 건 그런 의미와 반대되는 일이죠.”
일반 학교는 전생의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합쳐진 학교.
왕족에게 필요한 인재는 구할 수 없고, 그러니 기껏 왕족이 지은 건물의 의미가 퇴색된다.
물론 왕족에게 충성을 바치는 상징물의 성격은 충분히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다른 파벌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다.
아니면 아예 레이시의 인재 스카우트 능력이 부족하다고 공격당할 수도 있고.
지금은 차기 국왕이 결정되지 않아서 공격받지 않겠지만, 차기 국왕이 정해지고 엘라가 일선에서 물러난다면 귀족들 중 누군가가 레이시를 걸고 넘어질지도 모른다.
“물론 엘라 공주님이 계시는 한 큰 문제는 안 생기겠지만, 미연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은 방지할 수 있을 때 방지하는 게 좋으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주실 수 없을까요?”
“으, 으응?”
엘레오놀의 말에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레이시.
자기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와서인지 레이시는 한참을 당황해다가 이내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심호흡했고, 숨이 고르게 변하자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질문하기 시작했다.
“꼭 인재를 선발해야 하나요? 저는 엘라와 살 거라서 다른 사람들은 딱히 필요가 없는데…….”
“레이시 씨가 부리는 게 아니더라도 인재를 스카우트해서 레이시 씨의 이름 아래에서 활동하게 만드는 게 좋아요. 안 그러면 낭비라고 지적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영주인 루룬 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꼭 필요한 건물이지만, 중견급쯤 되는 사람들에게는 반발을 살 수도 있거든요. 레이시 씨도 봤잖아요?”
레이시의 반응에 히죽 웃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는 엘레오놀.
회의장 안의 사람들은 엘레오놀의 시선에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다가 레이시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우물쭈물거리다가 그럼 학생들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판별해서 장학생으로 쓰면 되지 않냐고 물어봤다.
“그래도 되는데 절차가 복잡해질 거랍니다. 거기에다가 다른 왕족이나 귀족의 영향에 있는 대학이나 아카데미에 간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냥 넘겨주는 일이 될 수도 있고요.”
“우우우……, 그럼 차라리 학교 안 지을래요.”
연달아 나오는 엘레오놀의 대답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엘라의 손을 잡는 레이시.
엘라도, 루룬도 꼭 지어줬으면 한다고 말해서 꾸역꾸역 떠올린 건물이 부정만 당하자 레이시는 방금 전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낸 사람의 말처럼 아예 안 짓는 게 낫겠다면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고, 루룬은 그런 레이시의 말에 난처하다는 얼굴을 했다.
레이시의 반응은 어른스러운 행동은 아니었다.
아마 보통의 귀족이라면 여기에서 억지로 밀어붙이던가 어떻게든 협상을 진행했겠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레이시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고,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나이만 따지면 레이시는 고작 2살이고 그동안에 이런 일은 단 한번도 해보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이번에는 사람들의 항의를 억지로 무시하고 건물을 지을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에 맞춰서 대학과 아카데미에 맞춰서 자료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레이시가 요구한 건 일반학교.
귀족과 지내면서 그런 학교를 요구할거라 생각한 루룬의 예상을 뒤집어 엎었고, 때문에 사람들의 의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루룬은 오랜만에 겪는 실패에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다가 엘라에게 사과했고, 엘라는 루룬의 사과에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루룬이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건 확실히 뭐라고 할만한 내용이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혼을 낼만한 실수는 아니었다.
애초에 레이시와 늘 붙어있는 자기 자신도 가끔씩 레이시를 예측하지 못하는데 루룬은 오죽할까?
그렇기에 엘라는 레이시의 등을 토닥이면서 레이시를 다독여주었고, 레이시는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주는 엘라의 손길에 훌쩍거리면서 시무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 있으면 사람들끼리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하면서 학교가 필요할 거 같아서 학교를 짓자고 했는데 지금은 필요 없다고 하고……. 돈도 많이 들고 노동력도 많이 들어가는 일이니까 저 사람들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네……. 엘라도 이런 거 때문에 싸우고 이러니까 차라리 안 싸우게 건물을 안 짓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저 사람들이 잘못한 거라도?”
“우으. 몰라요…….”
더 이상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서 미스트의 손을 잡는 레이시.
미스트는 레이시가 자리에 일어나자 괜찮다고 말하면서 레이시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엘라는 레이시가 나가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면서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두었다.
“쯧…….”
불쾌한 기색을 감출 생각이 없는지 대놓고 눈을 찌푸린 채 혀를 차는 엘라.
사람들은 엘라의 그 행동에 당황하면서 엘라의 눈치를 살펴봤고, 엘라는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자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며 다시금 혀를 찼다.
“생각이 있고 입이 달려 있다면 좀 말해보지?”
“그, 그게…….”
“설마 레이시가 이 정도로 포기할 줄은 몰랐다. 그런 개소리를 할 거면 각오하고.”
엘라의 말에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입을 다무는 사람들.
엘라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레이시와 기 싸움을 해서 자신에게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채리고 점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고, 사람들은 그런 엘라의 표정에 속이 타들어가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너희들이 평민으로 태어나서 실력만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건 알겠는데……, 적당히 나대라. 너희들이 아무리 잘나도 이 나라의 왕가를 상대로 적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응?”
목소리에서 서리가 묻어서 떨어질 정도로 차갑게 변한 분위기.
사람들은 그런 엘라의 분위기에 아까 전 엘라가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겁에 질리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싱긋 웃으면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레이시가 아멜리아에 일반 학교를 세우겠다고 다시 설득하지 못하면 루룬에게 말해서 너희 기반을 날려달라고 부탁할게. 어차피 이따위 도시,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아버지가 직접 고른 사람들이 잘 굴릴 거니까 말이야. 그럼 일주일 주지. 열심히 해봐.”
손을 한 번 휘휘 내저으면서 레이시에게로 가는 엘라.
그렇게 엘라가 사라진 회의실 안에서는 한동안 정적이 머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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