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6화 〉 이 도시는 누구의 것?1
* * *
다음 날 아침, 레이시는 미네르바와 아샤의 사이에 앉아서 아침 밥을 먹었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행동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엘라와 미스트를 쳐다봤다.
“아, 아하하…….”
“찔릴만한 짓을 했나봐?”
“조금.”
“등신.”
아침부터 꽤 거친 말을 하는 아샤.
하지만 아샤가 거친 말을 해도 뭐라고 말하지 못할 만한 짓을 했기에 엘라와 미스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저 각자의 반응을 보였고, 아샤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한동안 레이시에게 접근하는 걸 금지하겠다면서 레이시를 껴안았다.
“너무하네.”
“시끄러. 등신아.”
엘라의 말에 다시 한번 욕을 박은 아샤는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시에게 괜찮은지 물어봤고, 레이시는 아샤의 질문에 얼굴을 붉히면서 몸은 괜찮은데 정신은 전혀 괜찮지 않다고 대답했다.
솔직히 좀 부끄럽다.
평소보다 더 거칠게 한 것도 아니고 평소보다 더 부끄럽게 한 것도 아닌데 울음이 터진 건……, 아마 한 번 하고 쉰 다음에 다시 해서 인내심이나 이런 것들이 떨어졌던 거겠지.
그렇게 자기가 운 이유를 생각하자 레이시는 오히려 더 강한 수치심을 느끼며 고개를 들지 못했고, 엘라와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레이시와 데이트하는 건 최소 이틀은 걸리겠다면서 쓰게 웃으며 밥을 마저 먹었다.
“그나저나 레이시.”
“네?”
“온천도 즐겼겠다, 한동안은 여기에 머물건데 계획 있어?”
“저요……? 저는 여기에 뭐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루룬이 있는 건 알잖아? 루룬하고 놀 수도 있고 엘레오놀과 놀 수도 있지.”
“루룬 씨라면 몰라 엘레오놀 씨는 조금…….”
연맹국의 공주라고는 하지만 공주는 공주.
자기가 뭔가 실수한다면 외교적인 문제가 될 거 같았기에 레이시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어색하게 웃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웃음에 레이시도 반쯤은 왕족이지 않냐면서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엘레오놀 공주는 공주라는 직위보다는 다른 게 무서운 거니까 편하게 지내.”
“다른 게 뭔데요?”
“속에 뱀을 기르는 능력?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엘레오놀은 평민이나 노예로 태어났어도 주인을 잡아먹고 이 위치까지 올라왔을 거야.”
“후후, 그렇겠죠? 본인의 무력도 어느 정도는 있는 것 같고요.”
“엘라의 말 때문에더 친해지기 어려워졌어요.”
노예로 태어났어도 지금과 같은 세력을 구축했을 거라니…….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떨떠름한 얼굴로 엘라를 바라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표정에 피식 웃으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엘레오놀이 우리를 적대한 건 아니니까 편하게 만나.”
“더 못 만나겠잖아요. 엘레오놀 공주님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길래 두 분이 그렇게 평가하는 거예요?”
“그러네, 나나 미스트의 능력치를 거의 다 정치와 상업에 때려 박았다고 보면 되겠네.”
“…….”
엘라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엘라를 바라보는 레이시.
엘라의 무력을 몇 번이고 두 눈에 담았던 레이시는 엘라의 마법적 능력이 모두 정치적인 능력으로 뒤바뀐 모습을 상상해보기 시작했고, 이내 어떻게 상상해도 상상되지 않는 엘레오놀의 모습에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마법이나 검술은 몇 번인가 봐서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인 건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다.
마법과 검술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엘레오놀과 친해지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면서 밥을 먹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레이시의 생각을 읽고는 쓰게 웃었다.
“그래서, 뭐 할 생각 없어? 레이시의 도시니까 루룬에게서 땅을 받아서 원하는 걸 마음대로 지어도 괜찮을 건데. 이상한 걸 지어도 루룬이 어떻게든 써줄 걸?”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민폐를 주지 않을까요?”
“상관없어. 네가 건물을 지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네?”
“공주의 아내가 일개 도시에 자신의 건물을 지었다. 그건 그 도시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되잖아? 그렇다면 도시의 명성이 올라가. 지은 건물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도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거니까 명성이 올라가겠지.”
“……그, 제가 건물을 지어도 뭔가 아멜리아에 도움이 되는 건물은 못 지을 거 같은데요?”
아멜리아에 대한 건 전혀 모르고 아멜리아에 대한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자주 오지도 않을 도시에 한 사람만을 위한 건물을 짓는 건 아무래도 신경 쓰인다.
거기에다가 건물을 지으라고 명령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기가 힘든 게 무슨 건물을 지으면 좋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레이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음, 아무 집이나 한 채 지어버리는 건?”
“그건 좀 그렇잖아요. 1년에 며칠 지내지도 않을 건데.”
“나도 그런 집 몇 채는 가지고 있는데.”
“정말요?”
“응. 지금은 미스트의 정보원들에게 주고 적당히 정보를 받고 있어. 레이시도 그렇게 하는 게 어때?”
“……조오오오금.”
정보원이라니…….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하여튼 지어야 하는 거라면 좀 더 고민하겠다고 말헀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루룬에게 적당히 리스트를 뽑아올지 물어봤다.
“아, 아뇨. 굳이 안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안 짓고 넘어갈 수 있으면 넘어가죠.”
“흐응? 왜? 여기 별로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여긴 루룬 씨의 도시잖아요. 루룬 씨와 엘레오놀 공주님이 열심히 일구어낸 도시에 제가 뭔가 하는 건 좀 그래요.”
“네 이름이 없으면 시작도 안 될 도시였으니까 마음대로 하면 괜찮은데.”
엘라의 말에 고개를 빠르게 젓는 레이시.
레이시는 그런 짓은 못 한다면서 한숨을 내쉬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인어들하고 협상하러 갈 테니까 레이시는 아샤랑 미네르바랑 같이 놀아.”
“네에.”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레이시는 여기에 뭐가 있는지 떠올려보기 시작했고, 중간에 오면서 체육 시설이 있는 걸 떠올리고는 아샤에게 거기에 가보자고 말했다.
어쩌면 에일렌처럼 아이가 놀 수 있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다른 곳에서 뭔가 하려고 해도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이를 닦은 다음 에일렌을 포대기로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고,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일어나자 먼저 방에서 나가 체육시설에 가겠다고 말했다.
“조심해요~.”
“응! 주인은 천천히 와라~.”
배시시 웃으면서 반쯤 날아가는 미네르바.
아샤는 그런 미네르바의 모습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레이시의 옆을 걸으면서 레이시를 호위하며 팜플렛을 읽기 시작했다.
“여기 지도있네.”
“으응~ 뭐 재미있는 거 있어요?”
“글쎄? 완공된 시설 중에서는 유희시설은 없네. 지금은 온천을 완성하고 있나 봐. 식당과 온천, 그리고 마사지 시설이나 사우나 같은 거 말이야.”
“아하, 하긴 그건 그렇겠네요.”
우선 온천으로서의 기능이 완성되어야 다른 유희 시설을 짓던가 말던가 하겠지.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우선 완성된 스포츠 시설에 가자면서 아샤의 팔에 팔짱을 꼈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네르바가 먼저 가 있을 스포츠 시설에 들어갔다.
부드러운 모래를 깔아놓고 가운데에 네트를 설치한 스포츠 시설……, 배구 코트였다.
“이게 뭐지?”
“어……, 음……. 배구?”
“응? 이게 뭔지 알아?”
“네, 여기 적혀 있네요.”
레이시는 무심결에 배구를 입에 담았다가 축구와는 다르게 아직 여기에서는 본 적이 없다는 걸 떠올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팜플렛을 가리켰다.
체육 시설의 소개문 옆에서 할 수 있는 운동들을 적어뒀었기에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못 봤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가 의심을 거두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모래를 밟고 있는 미네르바에게 다가갔다.
“미네르바, 어때요?”
“바닥이 푹푹 빠진다. 이런 곳에서는 쉽게 날기 힘들다.”
바닥을 차면서 날아야 하는데 이러면 반발력을 쉽게 얻기 힘들다고 말한 미네르바는 난처하다는 얼굴로 땅을 밟아댔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대답에 에일렌이 넘어져도 괜찮을 거 같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아이가 모래놀이를 할 수 있게 만든 작은 모래밭을 가리켰고, 레이시는 미네르바가 가리킨 곳을 보고는 배시시 웃으면서 모래밭에 앉아 포대기를 풀었다.
“으에?”
포대기가 풀리면서 모래밭에 앉게 되는 에일렌.
에일렌은 레이시가 자기를 내려놓자 레이시가 다른 곳으로 가나 싶어 눈을 깜빡이면서 레이시를 바라봤고, 레이시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자 자기를 계속 바라보자 발을 꼼지락거려봤다.
마차의 카페트와도, 욕조 안과도 다른 촉감.
부드럽고 자기 발을 받아들이는 감각에 에일렌은 레이시처럼 털썩 주저앉은 다음에 모래를 만져봤고, 모래가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나가자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레이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헤헤…….”
“무아아?”
“재미없어요?”
“마으.”
레이시의 질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색한 걸음걸이로 레이시에게 다가가 안기는 에일렌.
레이시는 에일렌을 안아준 다음 아샤에게 바구니와 끝이 뭉뚝한 삽이 있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나무면 되는 거냐고 물어보더니 주변 사용인에게 나무 바구니와 나무 삽이 있는지 물어봤다.
“금방 들고 오겠습니다.”
“나무 삽은 어디에 쓰나요?”
“응? 채집꾼이 자주 쓰지. 뿌리를 상처 주지 않고 하려면 겉의 단단한 흙은 철 삽으로 팔고 나무 삽으로 파는 거야. 약탕이 있었으니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직접 캐는 약초도 있나보네.”
“그렇구나.”
아샤의 말에 배시시 웃으면서 에일렌이 가지고 놀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물은 필요 없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벼울 거야. 흙을 털어내는 용도로 쓰니까.”
“에헤헤~.”
“므아으응!”
자기만 내버려두고 이야기해서인지 뿔이 난 건지 에일렌.
레이시는 자기 가슴을 때려대는 에일렌의 손길에 에일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물건이 오길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용인이 나무 삽과 그릇을 들고 오자 그것을 받아 에일렌에게 모래 놀이를 보여줬다.
그릇안에 모래를 꽉 채운 다음에 나무 삽으로 두들겨 단단하게 만드는 레이시.
에일렌은 레이시가 하는 걸 빤히 쳐다보다가 레이시가 그릇을 엎은 다음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나타나는 모래 더미에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릇 모양으로 그대로 굳은 모래.
에일렌은 그걸 보더니 손으로 꾹 눌러보았고, 레이시는 에일렌이 모래 언덕을 무너트리자 배시시 웃으면서 에일렌에게 나무 그릇을 건네주었다.
“마망! 마우!”
“같이 놀래요?”
“노래!”
“푸훗. 알았어요. 여기에 모래 채워볼래요?”
레이시는 에일렌에게 그릇을 준 다음 손으로 모래를 퍼서 그릇에 담아주었고, 에일렌은 레이시를 따라하듯 모래를 손으로 쥐어 그릇 안에 담았다.
하지만 손가락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데다가 손 자체가 작은 에일렌은 아무리 손을 바쁘게 움직여도 그릇을 채울 수 없었고, 에일렌은 채워지지 않는 그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입술을 샐쭉하게 내밀고 그릇을 바라봤다.
“이거로 채워볼까요?”
그 모습에 에일렌에게 삽을 주고 에일렌과 함께 삽을 움직여보는 레이시.
에일렌은 레이시가 삽을 주자 그 삽을 빤히 쳐다보다가 삽에 모래가 떠져 나오는 걸 보고는 눈을 빛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때문에 모래가 훅훅 떨어졌지만, 그래도 에일렌의 앙증맞은 손으로 퍼담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모래가 그릇에 떨어지기 시작했고, 에일렌은 그 모습에 꺄아꺄아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에일렌, 재밌어요?”
“애이어!”
“에헤헤. 저두 재미있어요.”
에일렌의 볼에 입을 맞춘 다음 다시 모래 언덕을 만드는 레이시.
에일렌은 레이시와 만든 모래 언덕을 보고 손을 휘적거리며 기뻐하다가 이내 자기 손으로 모래 언덕을 무너트렸고, 레이시는 그런 에일렌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나무 그릇에 다시 모래를 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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