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화 〉 협박1
* * *
“수고했어.”
“후아.”
레이시의 일은 다행히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몇 시간이고 허리를 쭉 펴고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줘야 하는 게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몸이 아픈 건 아니었고 하소연도 그렇게 심하지 않은 데다가 에일렌이 밥을 달라고 울 때마다 쉴 수 있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배시시 웃으면서 엘라에게 기댈 수 있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웃음에 같이 웃으며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몬스터는 어땠어요?”
“응? 몬스터?”
“네, 어제 사냥하신다면서요?”
“괜, 괜찮았지.”
“으응?”
“아샤한테 물어봐, 나는 자세한 건 모르니까.”
“아샤, 어땠어요?”
“어…….”
레이시의 질문에 엘라를 한심하다는 듯 가만히 바라보는 아샤.
엘라는 아샤의 시선에 자기도 조금은 찔리는 게 있는지 움찔 떨다가 어떻게든 해보라면서 눈짓하기 시작했고, 결국 엘라의 말을 들어주기로 한 아샤는 한숨을 푹 내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에나 있는 고블린이라서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 오히려 연습이 안 돼서 괜히 군인을 불렀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더라고.”
“그렇구나.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아샤의 말에 싱긋 웃으면서 아샤를 바라보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시선에 다시 한번 엘라를 바라봤고, 엘라는 아샤의 시선에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피하다가 레이시 몰래 한숨을 푹 내쉬면서 눈을 피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에일렌의 애인을 생각했다고 죽이자고 말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은 부끄러우니까…….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어색하게 웃다가 레이시의 뺨을 콕콕 찌르면서 장난을 치자며 매달렸고, 레이시는 엘라의 손장난에 배시시 웃으면서 엘라와 손장난을 치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 미스트가 일을 정리하고 다가오기 시작했고, 미스트는 엘라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정찰을 보낸 결과를 알려주었다.
“점점 국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하더군요. 그 수는 약 천 명. 전원이 군인은 아니고 잡일을 하는 사람이 300명은 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공성용 병기는 발리스타와 마도 대포가 있고 불굴의 장군과 그 아들이 있다더군요.”
“흐응, 진짜 전쟁하자는 건가?”
“글쎄요? 그 쪽에서는 그걸 원하지 않을까요? 병사들과 아들을 방패로 내세우면 어찌됐든 도망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거니까요.”
“무시하는 게 낫겠지?”
“무시하는 게 낫다고 해야 할지……, 우선 저희에겐 무시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요. 물론 저쪽에서 쳐들어와서 저희에게 칼질하거나 하면 그 때부터는 저희의 업무가 방관에서 몰살로 바뀌겠지만, 그럴 리는 거의 없다는 게 함정이죠. 저쪽도 바보는 아니고.”
나라를 말아먹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엘라와 싸우고 싶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전쟁을 걸어버리면 연맹국에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불멸의 장군을 자기 손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불멸의 장군을 처리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엘레오놀의 권력이 강해질 테니, 블루드도 아마 그런 상황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 정도면 연맹국을 망가트리는 것으로 생기는 이득이 있다거나, 이미 다른 장난감을 준비한 거겠지.
“그럼 무시할 수밖에 없겠네.”
거기까지 생각한 엘라는 미스트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레이시를 껴안았다.
애초에 지금 여기에서 그 뒤에 있는 일까지 파악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가볍게 무시하는 것밖에 없으니까 무시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를 껴안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자세히는 몰라도 뭔가 무거운 이야기가 오고 갔다는 건 알아챈 레이시는 조심스럽게 엘라의 손을 잡고서 엘라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엘라.
엘라는 일부러 피해 다닐 생각이니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면서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고 천천히 입술을 훔쳤고, 레이시는 부드러운 입맞춤에 얼굴을 붉히다가 엘라를 꽉 끌어안고 천천히 혀를 집어넣었다.
레이시는 천천히 엘라의 입술을 핥다가 손장난을 치듯이 혀끝을 살짝 비비다가 이내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을 붉히면서 떨어졌고, 엘라는 붉어진 레이시의 얼굴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었다.
“예전엔 키스 같은 거로는 안 부끄러워 했으면서.”
“으으응……. 몰라요.”
엘라의 놀림에 얼굴을 붉히다가 엘라의 몸에 얼굴을 파묻고 모르는 척 하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미네르바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볼을 부풀리면서 레이시에게 안겨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을 깜빡이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는 레이시와 엘라.
레이시는 미네르바를 안아주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안아주자 배시시 웃으면서 적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고 말했다.
“어차피 나보다 약하다. 내가 다 죽일 수 있다.”
“으응, 안 죽이고 도망치는 건요?”
“……굳이?”
“네, 저희 보금자리랑 상관도 없고, 죽여서 먹을 거도 아니잖아요?”
레이시의 말에 눈을 깜빡이면서 생각에 잠기는 미네르바.
그러다가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대로 딱히 죽이고 먹을 것도 아니고 에일렌이나 레이시를 노리고 오는 것도 아닐 테니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대답에 싱긋 웃으면서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어쨌던 레이시의 관심을 끄는 것에는 성공해 기쁜지 배시시 웃으면서 레이시를 껴안고 뒹굴거렸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장난에 같이 웃다가 에일렌이 자는 걸 보고는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자다가 일어나서 에일렌을 돌본 건 괜찮았지만, 거기에서 낮잠도 안 자고 점심도 대충 먹으면서 3시까지 주민들의 인사를 받아준 게 피곤했다.
거기에다가 특히 불편했던 부분은 자기는 앉아서 미스트의 양산을 쓴 채 그늘에서 편하게 있는데 60~70대쯤 되어보이는 노인 부부가 자기에게 와서 존댓말로 인사하며 허리를 90도로 숙인 것.
신분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전생에 늘 어른을 공경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배워서 그렇게 한 레이시에게는 아무래도 불편한 일이었기에 할 일이 없어지자 단숨에 긴장이 풀려 늘어지게 하품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미스트는 레이시에게 에일렌은 자기가 돌볼 테니 졸리면 자도 된다고 말했지만, 레이시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딱히 졸리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뭔가 하고 싶지는 않다.
다소 귀찮은 발언이지만, 정신은 또렷한데 아무것도 하기 싫다.
레이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미스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반응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러면 산책이라도 다녀오겠냐고 물어봤다.
“으응, 그럴까요?”
미스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같이 가주겠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아샤도 일하고 왔을 텐데 그럴 수는 없으니 혼자서 나비와 다녀오겠다고 말하며 나비의 등 뒤에 올라탔다.
그러자 눈을 깜빡이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몰래 따라갔다 오겠다고 말하는 아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세요.”
“응.”
비상연락용 신호탄을 던져준 다음 에일렌을 돌보는 미스트.
아샤는 그런 미스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레이시 몰래 레이시의 산책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나비를 타고 천천히 움직이는 레이시.
스킬은 없지만, 승마가 꽤 익숙해진 건지 레이시는 나무에 열린 과일을 따서 먹으면서 하품을 하면서 허벅지만으로 나비의 등에 올라탔고, 나비는 그런 레이시에게 맞춰서 가볍게 걸으면서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빠르게 움직이더니 산 정상에 올라온 나비.
레이시는 산 아래의 풍경을 보며 기지개를 켜다가 이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한 곳을 빤히 쳐다봤고, 이내 자기만 느끼는 건가 싶어서 나비의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 쪽에 사람이 있는 거 같지 않아요?”
레이시의 질문에 레이시의 시선을 따라 똑같이 고개를 움직이는 나비.
그리고 그 순간 수풀 안에서 가죽 갑옷을 입은 사람이 튀어나왔고, 레이시는 그 사람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 누구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오히려 레이시에게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 밝히라고 말하는 남자.
레이시는 그 남자의 질문에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자기 신분을 말해주었다.
“저는 엘라 파우스트 오라토리엄 공주님의 전속 메이드인 레이시 루피너스 남작이에요.”
“호오? 엘라 공주님의?”
“네.”
결혼이 예정된 사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을 하지 않았으니 메이드.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하자 남자는 레이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입술을 핥았고, 갑자기 사칭 따위는 하지 마라면서 칼을 뽑아 레이시에게 달려들었다.
꽤 빠른 속도.
레이시는 남자가 갑자기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뒤로 주춤 물러나면서도 반사적으로 나비에게 마력을 불어넣으면서 나비에게 방어를 지시했고, 나비는 레이시의 명령에 몸을틀어 검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 순간 스파크가 강하게 튀면서 도끼가 칼날을 튕겨냈고, 레이시를 뒤따라서 온 아샤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도끼를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아, 아샤!?”
“레이시, 뒤로.”
“네, 넷!”
“그리고 검성께서는 의외로 장난기가 심하시군요?”
“흐음, 그대는 아샤 아닌가? 그럼 저 야차가 진짜로 엘라 공주님의 메이드란 말인가?”
“네, 뱃지의 문양을 보고도 그런 식으로 나오시다니……, 다소 급하신 게 아니신지?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겁니까?”
“킥…….”
대놓고 살기를 풀풀 풍기면서 한 번만 더 지랄하면 국가고 뭐고 다 무시하고 이 자리에서 죽여주겠다고 말하는 아샤.
검성이라고 불린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자기는 야차 같은 종족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게 안 믿긴다면서 아샤와 레이시를 싸잡아 매도했고, 아샤는 지금 여기는 오라토리엄 왕국 안이라는 걸 잊지 마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이 일만으로도 국가적인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일을 더 키우고 싶으십니까?”
“큭큭! 타국의 인간은 사람 취급도 안 해주더니 야차는 인간 취급을 해주는 건가? 엘라 공주의 취향은 정말 이해할 수 없군. 대화만 통하면 몬스터도 받아주면서 인간은 거절하다니!”
“그 인간들이 제대로 된 인간이면 인도적으로 처리했겠죠. 하지만 그 인간들은 탈영병 겸 오라토리엄 왕국의 인간을 20명이나 죽인 도적집단. 좋게 대하는 것이 무리일 텐데요?”
“그들은 국경 수비의 임무를 맡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였다는 사람들은 제대로 표시가 안 된 곳에서 살던 화전민. 도적과 같은 존재지. 오히려 우리에게 감사인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닌지?”
“그들은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원래 살던 마을이 재해를 이기지 못해 다른 곳으로 가서 농사라도 시작한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죽이는 사람이 멀쩡한 사람이라는 건지? 연맹국의 수준도 알만하군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원한다면 여기 이 자리에서 검사로서 죽여주겠다고 말하는 아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도끼가 날아온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감각에 검성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피식 웃으면서 양손을 들어올렸다.
“흠, 이번 일은 내 미스다. 미안하군. 이만 나는 오라토리엄으로 가봐야 할 것 같군.”
“……무슨 소리인지?”
“아아, 아버지께서 초대를 받으셨으니 가야 하지 않겠나? 오라토리엄 왕국 안에는 못 믿을 사람만 바글바글하니 말이야.”
검성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다가 신호탄을 쏴올리는 아샤.
검성은 아샤가 쏘아 올린 신호탄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이제 자기에게 올 사람들을 생각하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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