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 회임1
* * *
레이시가 스윽하고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처음에는 자기 배를 가리키는 레이시.
엘레오놀은 그런 레이시의 손길에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레이시가 자기를 다시 한번 더 가리키자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이시는 마치 독극물을 마신 듯 몸을 베베 꼬면서 괴로워하기 시작했고, 엘레오놀은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박수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레이시를 놀리는 것으로만 보이는 행동.
하지만 그 전후사정을 모두 밝힌 엘레오놀은 그저 레이시의 회임을 축하할 뿐이었고, 루룬도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축하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느 쪽이 다셨나요? 역시 엘라 공주님 쪽이신가요?”
“네?”
“양성 구유 스킬로 임신한 거 아니셨나요?”
“……스텔라의 아이라는 여성끼리의 임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스킬을 익혔어요.”
“어머, 그럼 남성기로 인한 임신은 불가능하겠네요. 누구의 아이인가요?”
“……아마도 엘라.”
엘레오놀의 말에 멍하니 넋을 놓은 채 대답하는 레이시.
엘레오놀은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키득키득 웃으면서 계속해서 말을 걸었고, 레이시는 엘레오놀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이시가 생각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레이시가 생각하는 건 어쩌다 임신에 성공했는지에 대한 것.
레이시는 자기가 어머니가 될 준비가 끝났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본 다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발을 동동 구르면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입술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무는 레이시.
엘레오놀의 말에 크게 당황한 마리아는 자기 직책을 잊고 레이시에게 다가가 레이시를 진정시키려고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 전원이 그런 마리아의 잘못을 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엘레오놀이 말한 말은 맨정신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으니까.
엘레오놀의 수하들은 실수로라도 레이시에게 무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다들 자기 입을 틀어막고 있었고, 지금 이곳을 경호하고 있는 마리아와 벽천화 기사단 전부 아샤에게 신세를 졌었던 사람이기에 아샤를 생각해 이야기가 새어나가는 걸 막으려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루룬은 경축할만한 일에 레이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레이시에게 심호흡하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그런 루룬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라마즈 호흡을 하면서 자기가 임신한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폭탄을 직접 터트려버린 엘레오놀은 뺨에 손을 올리고 속도 위반에 대한 삿된 말을 찾기 시작했다.
“으어어어…….”
전체적으로 혼란하다 못해 이상한 광기가 멤돌고 있는 다과회.
그런 혼란이 끝나게 된 계기는 레이시가 정신을 찾으면서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레이시가 자기가 임신한 이유를 대충 알 것만 같아서였다.
“그, 그 말 때문이야!?”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는 레이시.
루룬은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왜 그러냐고 물어봤고, 그제야 마리아와 루룬, 그리고 벽천화 기사단의 사람들이 자기를 걱정하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레이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부모로서 준비가 다 됐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임신한 이유.
그건 아마도 엘라와의 잠자리 도중에 했었던 엘라가 함께라면 뭐든 괜찮을 것 같다는 말 때문이겠지.
그야 진심으로 뭐든 괜찮다고 생각한 거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서로 기대면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이렇게 된다고!?
레이시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이마에 손을 부여잡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고, 레이시와 엘레오놀을 호위할 책임이 있는 마리아는 다급하게 레이시의 몸을 받쳐주면서 진정하라고 말했다.
“이, 이제 홀몸이 아니니까 진정해요!”
“…….”
그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내가 애인한테 해주고 싶었던 말인데……!
마리아의 말에 속으로 울부짖으며 몸을 베베 꼬는 레이시.
레이시는 한참을 속으로 절규하다가 이내 엘라는 임신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과 자기가 이 스킬을 선택했다는 걸 떠올리고는 마리아의 말대로 천천히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엘레오놀과 루룬에게 먼저 돌아가봐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레이시.
엘레오놀과 루룬은 레이시의 질문에 그래도 괜찮다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시는 두 사람의 대답에 오늘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말한 다음 마법으로 미네르바를 불러냈다.
마력이 빠지더니 레이시의 눈앞에 나타나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자기를 부르자 무슨 일이냐면서 레이시를 껴안았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질문에 싱긋 웃으면서 일이 끝났으니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레이시를 안아들고 날개짓하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다과회장에서 꽤 멀어지자 미네르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미네르바에게 자기가 살찐 것 같냐고 물어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질문에 움찔 떨다가 이게 애인들이 흔히 받는 질문이구나 싶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전혀 살 안 쪄보인다!”
“아, 아하하……, 그래요? 고마워요.”
“에헤헤…….”
레이시의 말에 자기도 사회에 대해서 잘 배웠다고 생각하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얼굴에 어색하게 웃다가 자기 배를 감싼 다음 바로 자기 방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 모습에 움찔 떨다가 혹시나 싶어서 달력을 보는 미네르바.
하지만 아직 달거리가 올려면 조금 남았었기에 미네르바는 레이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고는 레이시가 침대에 앉아있는 걸 확인한 다음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엘라가 레이시가 다과회에 나가기 전에 자기가 어디로 갈지 말해줬었기에 미네르바는 헤매지 않고 곧바로 엘라에게 달려갔고, 엘라는 숨을 헐떡이면서 달려온 미네르바의 모습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왜?”
“레이시가 다과회에 다녀오고 나서 상태가 이상하다……!”
“지친 거려나?”
“모르겠다. 하지만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앉아서 뭔가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흐으응…….”
미네르바의 말에 레이시가 피곤해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엘라.
마침 레베카와의 일도 끝나는 중이었기에 엘라는 레베카에게 양해를 구했고, 레베카는 엘라의 말에 레이시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며 엘라를 배웅했다.
그렇게 레베카의 배웅을 받은 엘라는 미네르바에게 레이시가 그렇게 심해 보였냐고 물어봤고, 미네르바는 엘라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기보고 살쪘냐는 질문을 했다고 대답했다.
“살……? 미스트, 혹시 체중을 늘릴만한 식단을 짰어?”
“아니요. 레이시가 먹은 간식까지 포함해도 살은 안 찔 거예요.”
“으으응? 거래가 많이 힘들었나?”
하긴 연맹국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거물과 거래를 하고 온 거니까 힘들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긴 하지.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저택으로 돌아갔고,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레이시를 부르며 방에 들어갔다.
“괜찮아? 실수했어?”
“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많이 피곤해?”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싱긋 웃는 엘라.
엘라는 레이시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게 오늘 이후의 일정을 말해주면서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엘라…….”
“응? 왜?”
“저 살 찐 거 같아요?”
하지만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자기가 살이 찐 것 같냐는 질문을 했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왜 그렇게 생각하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안 쪘는데? 왜? 살쪄도 귀엽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쿡쿡, 레이시답지 않네.”
레이시의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반응에 어색하게 웃다가 이걸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내 늦든 빠르든 엘라가 알게 될 거라는 생각에 숨을 고르고 미스트를 불러와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 그리고 아샤랑 다른 사람들도요!”
“응? 그래, 알았어.”
레이시의 말에 미스트와 아샤, 미네르바를 레이시의 방으로 부르는 엘라.
세 사람은 엘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레이시의 방에 들어왔고, 레이시는 미스트가 들어오자 손을 내민 다음 회복 마법으로 자기를 진단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눈을 깜빡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미스트.
미스트는 레이시의 손을 잡더니 엘레오놀이 한 것처럼 레이시의 몸을 진단했고, 이내 레이시의 아랫배에 레이시 말고 다른 생명이 있는 걸 확인하고는 멍하니 레이시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기……, 엘라, 다시 한번만 더 물어볼게요……. 저, 살이 찐 거 같아요?”
“……안 찐 거 같은데? 아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씁……, 뭔가 레이시가 한 말 들어보고 보니까 조금 찐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안 쪄보인다!”
“미스트는 어떻게 생각해?”
“저, 그, 저는…….”
“……?”
미스트의 반응에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엘라.
모른다면 모른다고 시원스럽게 답할 미스트가 말을 얼버무리려고 하자 엘라는 혹시 레이시에게 큰 문제가 생긴 거냐며 미스트를 바라봤고, 이번 일만큼은 미스트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건지 미스트는 엘라의 말에 말을 더듬다가 레이시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러자 엘라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레이시를 바라보며 혹시 아픈 곳이 있으면 말해주라며 레이시의 손을 잡았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침을 꼴깍 삼킨 다음 각오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그게요…….”
“응.”
“임신……, 했어요…….”
“…….”
“……아마도, 엘라 아이…….”
“……? ……?”
레이시의 말에 한참을 멍하니 레이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레이시의 아랫배를 보고, 그 다음엔 다시 미스트를 바라보는 엘라.
엘라는 미스트에게 이번에는 똑바로 대답하라는 듯 미스트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미스트는 처음 보는 엘라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축하드려요……?”
“어, 으, 으응? 고, 고마워?”
미스트답지 않은 의문문.
그리고 엘라답지도 않은 의문문.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딴지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레이시를 쳐다봤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로 엘라의 눈치를 살피는 레이시.
불안함과 행복감, 망설임, 각오, 두려움, 애정…….
레이시는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인 듯한 오묘한 얼굴로 엘라를 바라보고 있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표정에 드디어 레이시의 말을 실감하기 시작했는지 천천히 일어나 멍하니 레이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레이시가 아플 정도로 와락 끌어안는 엘라.
엘라는 아무런 말도 없이 레이시를 끌어안은 채 레이시와 함께 침대를 뒹굴었고, 엘라의 반응에 처음에는 당황하던 레이시는 이내 웃음을 터트리면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기 시작했다.
“파티, 준비할까요?”
“응! 크게! 고기도, 술도, 모두 가져와줘!”
“난……, 육아 책 빌려올게. 기사단 보건소에 기사를 위한 육아 책이 있을 거야.”
“주, 주인 울지 마라,”
“아, 아하하! 안 울어요. 그, 그냥 눈물이 나왔을 뿐이에요.”
그리고 레이시가 행복에 겨운 눈물을 흘리자 모두 정신을 차렸는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람들.
미스트는 오늘 저녁은 우리끼리 파티를 하자면서 빨리 장을 보고 오겠다고 말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육아와 관련된 책을 준비해오겠다고 말했다.
거기에다가 오늘은 질투보다는 축하를 해주면서 손수건을 잔뜩 들고 오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자기를 껴안고 자기처럼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는 엘라를 보고 배시시 웃다가 이내 엘라를 꽉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부모님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려요.”
“응, 같이 힘내자, 레이시.”
“……에헤헤.”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정말……, 정말정말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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