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공주들의 농간질2
* * *
“좋아요. 남자 정도라면 얼마든지 빌려드릴게요.”
싱긋 웃으면서 흔쾌히 레이시의 요구를 들어주는 엘레오놀.
아샤는 엘레오놀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눈을 깜빡이다가 정말로 괜찮은 거냐며 엘레오놀을 바라봤고, 엘레오놀은 아샤의 질문에 싱긋 웃으면서 레이시와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 정도 투자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고 대꾸했다.
“애초에 저들은 지금은 제가 좋아서 제 곁에 있는 거지, 언제든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연애하고 결혼하라고 명령을 내려둔 상황이랍니다.”
“괜찮은겁니까? 그거…….”
“애초에 재능 있는 사람이 시답잖은 이유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 보지 못해서 만든 하렘인걸요. 다른 여자와 눈이 맞든 말든 상관없답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여자와 결혼해서 이나라에 정착하게 된다면 오라토리엄 왕국에 연이 생기는 거라 오히려 좋겠네요.”
“…….”
이 여자, 대놓고 오라토리엄 왕국에 수하를 심어두겠다고 말하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당당한 표정과 말투.
마치 자기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듯한 그런 모습에 아샤는 자기 상식이 잘못된 건가 싶어 눈을 찌푸리며 엘레오놀을 바라봤고, 엘레오놀은 그런 아샤의 모습에 싱긋 웃다가 아샤가 생각하는 건 아니라며 입을 열었다.
“그저 연락책을 심어두고 싶다고 말하는 거랍니다. 오라토리엄 왕국은 관계만 좋아진다면 근처의 다른 국가보다 좋은 거래상대가 될 테니까요.”
“그렇습니까?”
“네, 오라토리엄 왕국은 저희가 가지지 않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싱긋 웃으면서 반대의 경우도 성립되니 좋은 관계를 만들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엘레오놀.
아샤는 엘레오놀의 말에 그건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대답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고, 엘레오놀은 아샤의 말에 아쉽다는 듯 눈웃음을 짓다가 이내 레이시에게 한 수첩을 건넸다.
“제 하렘원들의 신상정보가 적힌 수첩이랍니다. 사진도 있고 이렇게 마력을 부여하면 누드가 나오니 부디 감시하기 쉽고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골라 협력하도록 하세요.”
“아……, 그, 네.”
엘레오놀의 말에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레이시는 잠시 수첩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잘 됐다면서 아샤를 보고 웃었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엘레오놀을 잠시 쳐다보다가 일이 잘 풀린 것에 집중하기로 하고 수첩을 들고 벽천화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수첩을 받은 벽천화 기사단에서는 내부 회의가 소집되었다.
“우효오오! 쩔어! 미소년이다!”
“미중년도 있어요! 마리아 대장!”
“자, 잠깐 진정해!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8명이 한계! 그 이상은 무리야! 그리고 다른 임무에 빠져야 하는 사람도 있잖아!”
“으아악! 회, 회관에 꼭 참여하고 싶습니다!”
“대장과 부대장은 반드시 참석해야 되는 거 맞죠!? 그렇죠!? 마리아 대장!”
“……미안. 이런 꼴을 보여줘서.”
“아, 아하하하하…….”
마치 남자 고등학교에 여자가 왔을 때의 반응.
한 가지 성별로 고립된 곳은 언제나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던 레이시는 아샤의 사과에 어색하게 웃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마리아에게 임무를 부탁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처음 제안을 했을 때와는 정반대로 부디 자기들이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마리아.
전에도 일을 맡을 거 같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변하자 레이시는 적응이 안 된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면서 마리아를 바라봤고, 마리아는 레이시의 반응에 자기들 말고 누가 공주들의 다과회를 호위할 수 있겠냐면서 실력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리아의 머리를 가볍게 때리면서 마리아를 말리는 아샤.
아샤는 마리아가 이상한 어필을 하지 않더라도 마리아에게 맡길 생각이라고 말한 다음 내일까지 다과회에 참석할 남자를 골라서 연락하라고 말했고, 마리아는 아샤의 정리에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다급하게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할게요! 아샤 대장!”
“전 대장. 언제까지 대장이라고 할 건데?”
“남자를 데려오면 대장이에요.”
“……하아, 저런 것들도 부하라고…….”
마리아의 말에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는 아샤.
아샤는 이런 바보들과 있으면 바보가 옮을 거라면서 레이시에게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음에 도움을 요청할 곳이 있다고 말했다.
“응? 어딘데?”
“레베카 왕자비님에게 가려고요.”
“왜?”
“미스트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왕족의 유행에 대해서는 레베카 왕자비님이 좀 더 잘 알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하……. 만나기로 약속했어?”
“……아뇨?”
“해뒀어야지. ……뭐, 오늘은 급한 일이니까 국왕님의 도움을 좀 받으면 되겠지.”
아샤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아샤의 손을 잡는 레이시.
레이시는 잘 부탁한다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피식 웃더니 레이시를 데리고 국왕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레베카와의 자리를 요구했다.
그러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국왕.
국왕은 레이시를 힐끗 보더니 무거운 짐을 맡겨서 미안하다면서 레이시에게 사과했고, 레이시는 국왕의 사과에 당황하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최선을 다해보겠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레베카가 있다는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에 전언이 전달됐는지 레베카는 레이시를 반갑게 맞이했고, 레이시는 레베카의 인사에 잘 부탁한다면서 엘레오놀이 좋아할만한 물건이 뭐가 있는지 물어봤다.
“연맹국에서는 유통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물건이라면 몇 가지 준비해뒀어. 이 상자에 있는 것들이라면 전부 들고 가도 돼.”
“네……? 그래도 괜찮아요?”
“응? 응. 다 합쳐도 마차 한 대 값도 안 나와.”
“헤에에……, 비싸 보이는데.”
“다 합쳐도 3억도 안 하는데?”
“……네?”
“마차 가격 3억을 넘으니까.”
뭐야, 그게? 스포츠카……?
레이시는 레베카의 말을 듣고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왕족이니 금전 감각이 이상한 거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어색하게 웃으면서 안에 든 것을 바라봤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대부분은 예술품 같은 물건들이었다.
“전부 동양의 기술자들과 협력해서 만들 거고 이 대륙에는 오라토리엄 왕국밖에 없는 물건들이니까 이런 게 좋을 거야. 다른 물건들을 원한다면 그걸 구해줄게. 말해줘.”
“고마워요.”
“아니야. 엘라 아가씨에게 도와주기 위한 일이니까 이 정도 수고는 해야지. 그럼 잘 하길 바랄게.”
“네, 노력해볼게요.”
레베카의 응원에 싱긋 웃으면서 아샤에게 돌아가자고 말하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이제 더 돌아다닐 곳은 없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제 미스트랑 준비하는 것만 남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엘라에게도 말해서 엘레오놀 씨가 무슨 속셈인지 알고 싶기도 하고요.”
“왜? 뭔가 걸리는 게 있어?”
“그, 다른 분들에게 말씀하지 않는다면 말해볼게요.”
“좋아. 말해봐.”
“엘레오놀 씨……, 뭔가 엘라에게 집착하는 거 같아서요. 엘라의 앞에서는 딱히 그런 기색을 안 드러냈는데, 저하고 있을 땐 엘라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그래?”
“네. 항구 이용권을 얻는 게 주 목적이겠지만, 주 목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는 귀찮은 일을 일으킬 거 같아요.”
레이시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레이시를 바라보는 아샤.
레이시는 그런 아샤의 시선에 움찔 떨다가 이내 진짜라면서 아샤의 눈치를 살폈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레이시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레오놀이 엘라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거지?”
“네? 네.”
“흐으으응…….”
레이시의 말에 눈을 깜빡이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기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냐며 물어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더니 이내 레이시에 먼저 미스트에게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요구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샤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입을 맞추자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레이시가 멀어지자 아샤는 한숨을 내쉬면서 정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라? 아샤님? 여기에는 무슨 일이세요?”
“조사할 게 있는데 알아봐줄 수 있나?”
“네? 네. 뭔가요?”
“엘레오놀 공주와 연맹국의 불굴의 장군과의 관계. 1년 내에 정보라면 전부 들고와.”
“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샤의 말에 갑자기 왜 그런 걸 요구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직원.
하지만 아샤의 직급이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딱히 요구하지 못할 것도 아니라 직원은 아샤가 원하는 정보를 그대로 전달해주었고, 아샤는 직원이 정보를 건네주자마자 그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샤의 예측대로 엘레오놀과 연맹국의 다른 주요 인사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아샤는 그런 사실에 눈을 찌푸리면서 엘레오놀이 원하는 것을 추측하기 시작했다.
레이시가 알아차릴 정도의 집착.
그런 거라면 엘레오놀이 일부러 레이시에게 집착을 드러낸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집착을 훤히 드러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으로는 뭐가 있을까?
상대방을 긴장시켜서 자기가 무슨 수작을 부릴까 걱정하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이쪽이 실수해서 트집을 잡으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엘레오놀의 행동이 너무나 호의적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트집을 잡고 싶었다면 엘라처럼 상징성만 있고 권력은 부족한 공주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야트나 슈레이, 볼케릭 같은 실질적인 권력이 있는 왕족에게 갔겠지.
그러니 트집을 잡거나 그러려는 건 아니다.
아마……, 이쪽이 의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그건 뭘까?
엘레오놀 같은 사람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가자 아샤는 문득 자기가 한 생각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엘레오놀 같은 사람이라면 그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쓸데없는 짓 하나나 둘쯤은 하게 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걸 개인적인 공간에서만 해서 인간적인 매력으로 만들고, 아둔한 사람이면 그걸 공식적인 자리에서 해서 적을 만들겠지.
그런 걸 하지 않으면 지성체는 스트레스를 다루지 못하고 천천히 수행능력이 떨어지게 되어있다.
그런데 왜 나는 아까까지 엘레오놀이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아샤는 그렇게 생각하자 엘레오놀이 이런 헛짓거리를 해서 얻는 게 무엇인지 빠르게 알 수 있었다.
엘레오놀은 레이시가 자기를 경계하게 해서 천천히 친해지려고 하는 중이다.
엘레오놀이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는 단번에 친해져도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 거겠지.
“하아……, 레이시에게 너무 물들었나?”
서로 원하는 것을 먼저 말한 다음 지켜야 할 선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친분을 쌓을지 말지 고민하는 방식.
귀족과 왕족이라면 으레 사용하는 방식의 친구 사귐인데 왜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샤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레이시에게 너무 물들었다는 결론을 내놓았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왔다는 건 비밀로 해줘.”
“알겠습니다, 아샤님.”
“그래, 수고해.”
정보국 직원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다음 저택으로 돌아가는 아샤.
미스트는 아샤가 들어오자 아샤가 뭘 하고 돌아왔는지 다 안다는 듯 싱긋싱긋 웃었고, 아샤는 그런 미스트의 얼굴에 가볍게 욕설을 내뱉었다.
“너 가끔씩 진짜 싫어.”
“어머? 그럼 저와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좋다는 거네요? 기뻐라.”
“아니, 존나 싫다고, 씨발.”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시를 사랑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엘라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레이시의 옆에 앉아서 쿠키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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