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화 〉 불구대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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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의 야영은 꽤 불편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블루드는 레이시와 미네르바를 건들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일정 거리 내로는 접근하지 않았고, 덕분에 레이시는 잠자리가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엘라가 오는 날.
레이시는 엘라가 온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발을 앞뒤로 흔들다가 이내 기사들이 보이자 침을 삼키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볼케릭과 보여주기 식으로 싸우는 것도 그렇게 험하게 싸운 엘라다.
블루드와 만나면 다짜고짜 칼질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긴장하는 걸 보고는 레이시를 품에 안고 레이시는 자기가 지켜주겠다고 속삭였다.
그러자 한숨을 내쉬는 레이시.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뺨을 쓰다듬다가 엘라가 이성을 잃으면 어떻게 될 거 같냐고 물어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질문에 눈을 깜빡이다가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
“10초 내로 저들은 전부 죽는다.”
“……그렇죠?”
“당연하다. 사실 주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저 사람들 전부 이길 거다.”
“그러니까 문제에요.”
“뭐가?”
“저는 미네르바나 엘라나 다른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요.”
“내가 이겨도?”
“싸우는 거잖아요.”
“음, 주인이 싫다면 참아보겠다.”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레이시의 손에 깍지를 껴보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가 깍지를 끼자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살짝 간질이다가 엘라를 마중하러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로에 나가보는 미네르바.
엘라는 미네르바와 레이시가 나오자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했지만, 레이시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엘라를 바라봤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라.
레이시라면 분명 자기를 보자마자 좋다고 안길 줄 알았는데…….
엘라는 벌렸던 팔을 뻘줌하게 원래대로 돌리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엘라의 눈치를 살피다가 엘라에게 저 숲의 안쪽에 누가 있는지 말해주었다.
그러자 삽시간에 바뀌는 분위기.
생기가 싹 사라진 엘라의 눈동자는 공허를 가득 담은 채로 숲의 안쪽을 바라봤고, 레이시는 피부를 찌르는 듯한 살기에 엘라의 살기가 자기를 노리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주저 앉았다.
“힉…….”
“아, 미안, 놀랐어? 괜찮아?”
“괘, 괜찮아요. 자, 잠을 좀 불편하게 자서 힘이 풀렸나봐요.”
레이시의 말에 쓰게 웃는 엘라.
분명 자기 때문에 놀란 게 분명한데도 이렇게 자기를 배려해주는 걸 보자 엘라는 레이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블루드만큼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블루드만큼은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당장 치고박고 싸울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볼케릭처럼 하하호호 웃으면서 싸울 시늉만 낼 생각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에게 블루드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봤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일단 습격자부터 보자고 말했다.
나비에게 지키라고 명령은 내려두긴 했지만, 왠지 블루드라면 멀리서 화살로 쏴죽일 거 같다.
그렇게 말하자 엘라는 그럴지도 모른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레이시의 안내를 따라 발걺음을 옮겼고 다행히 아직 살아있는 습격자들을 발견하고는 기사들에게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야영지로 가는 엘라.
“오! 오랜만이구나, 엘라. 잘 지냈니?”
그러자 환하게 웃으면서 엘라를 맞이해주는 블루드.
레이시는 엘라와 블루드가 만나자 침을 꿀꺽 삼키면서 긴장하기 시작했고, 그런 레이시의 긴장감이 번진 건지 다른 사람들도 천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초 후, 엘라는 화를 억눌렀는지 평소와 다른 기계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블루드에게 인사했다.
“반갑네요. 블루드 오라버니.”
평범한 인사.
레이시는 의외로 평범한 엘라의 인사에 눈을 깜빡이다가 안도하면서 엘라와 블루드의 대화를 듣기 시작했다.
“잘 지냈니?”
“물론이죠. 도적이니 암살자니 뭔가 많이 만나기는 하지만, 어차피 어중이떠중이 전부 죽여버렸답니다. 참 다행이죠?”
“하하! 언제나 당당하구나.”
“전 최강이니까요.”
블루드의 칭찬에 히죽 웃더니 눈을 가늘게 뜨면서 점점 마력을 끌어올리는 엘라.
엘라가 마력을 끌어올리자 왜인지 모르게 숲의 안쪽……, 아니, 하늘 위에서부터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그런 주변의 분위기에 이를 다다닥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을 느끼는 건 레이시뿐만이 아닌지 주변 기사들도 칼에 손을 올리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블루드만큼은 어떻게 되든 좋다는 듯 그저 웃고 있었고, 엘라도 하하호호 웃으면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은 평범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 대화.
레이시는 엘라의 웃음이 이렇게 무섭게 보였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하면서 움찔거리다가 미네르바가 자기를 끌어안자 당황하면서 미네르바를 올려다봤고, 그 순간 흙먼지가 강하게 일어났다.
“에……?”
미네르바가 날개로 감싸주지 않았다면 흙먼지를 뒤집어 썼을 레이시.
레이시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엘라가 소녀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손을 내리자 엘라가 뭔가 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죄송해요, 날파리가 날아다녀서. 후후…….”
“아, 그러니? 나는 못 봤는데.”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하셨죠? 연맹국의 쓰레기 맹주가 바뀐다는 이야기? 아니면 연맹의 여우가 판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에 이리저리 연을 대고 있다는 이야기? 그게 아니면 미련곰탱이 같은 장군이 저를 비대칭 전력이라 칭하면서 아둔하게 성벽을 쌓고 있다는 이야기? 네? 어느 쪽이죠?”
“동생아 힘을 좀 빼주렴.”
“싫거든요? 설마 동생의 아집을 못 받아주시겠다는 건가요?”
“하하, 아니, 네 뒤에 있는 범죄자들이 죽으려는구나.”
“……쯧.”
블루드의 말에 혀를 차면서 힘을 빼는 엘라.
그러자 공터가 갑자기 환해지면서 무겁게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졌고, 그 힘을 집중적으로 받던 블루드의 기사들은 순간 힘을 빼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엘라는 블루드의 기사가 주저앉는 동시에 마탄을 꽂았다.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우그러지는 풀 플레이트 아머.
그 충격량을 증명하듯 건장한 남성인 기사는 인형처럼 땅바닥을 몇 바퀴 뒹굴며 넘어졌고, 그런 엘라의 행동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엘라를 쳐다봤다.
하지만 엘라는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들의 명치에 친절히 마탄을 박아주었고, 블루드 또한 엘라의 행동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사를 데리고 다니실 거면 조금 제대로 된 기사를 데리고 다니세요. 걱정되잖아요. 이야기하는 도중에 갑자기 무릎을 꿇고 칼 손잡이에 손을 올리다니……, 발도라도 할 기세였다고요?”
“으음, 그렇구나. 너에게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겠지만, 이래서는 네게서 시간을 버는 것도 불가능해보이는구나.”
자기 수하의 절반이 인형처럼 날아갔는데도 엘라의 말이 옳다고 말하는 블루드.
레이시는 그런 블루드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라와 자기 같은 사이는 아니더라도 부하 아닌가?
아샤도 전 기사단원을 험하게 굴리긴 하지만 그건 일하다가 다치지 마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화를 낼 건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블루드는 부하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엉거주춤하게나마 서서 있던 부하들에게 쓰러진 녀석들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엘라에게 얼른 수도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블루드.
사람이 쓰러지고 피를 흘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블루드는 엘라에게 손을 내밀었고, 엘라는 블루드의 손을 보고 피식 웃더니 자기가 어떻게 하늘 같은 큰 오라버니와 걸을 수 있겠냐면서 먼저 가라고 말했다.
“저는 제 메이드와 천천히 오라버니의 뒤를 따라갈게요.”
자기 발치에 쓰러진 기사에게 마탄을 한 대 더 먹인 다음 싱긋 웃는 엘라.
블루드는 엘라의 말에 그러라면서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들과 함께 숲을 떠났고, 엘라는 그런 블루드의 모습에 눈을 확 찌푸리더니 호수에서부터 따라왔던 기사들에게 쓰러진 사람을 챙겨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제야 끝났다는 걸 실감하면서 움직이는 사람들.
레이시도 기사가 움직이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그 자리에서 스르르 주저앉았다.
볼케릭과 싸웠을 때는 말릴 수 있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다.
엘라가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싸우더라도 가볍게 말다툼하고 신체적인 접촉은 고작해야 밀치는 게 끝일 거라고.
하지만 블루드와 싸우는 건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사이좋게 하하호호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해도 자칫 잘못하는 순간 엘라가 블루드의 머리를 날려버릴 거란 직감이 들었다.
아니, 지금 쓰러져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직감에서 끝나지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레이시는 점점 공포를 실감하기 시작했는지 이를 다다닥 떨면서 손가락을 굽혔다 펴기 시작했고, 미스트는 완전히 겁에 질린 레이시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레이시를 일으켜세웠다.
“설 수 있겠어요? 무리라면 마차 안에 들어가요.”
“죄, 그, 아…….”
“괜찮아요, 말 안 나오면 안 해도 괜찮아요.”
레이시의 반응을 이해한다면서 싱긋 웃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웃음을 보고는 엘라를 바라봤고, 엘라가 미안하다는 듯 웃자 그제야 완전히 끝났다는 걸 실감하며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히이이이…….”
하긴 5살 때부터 지독하게 암살을 사주했었던 사람이다.
사이좋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떨리는 손끝을 마사지하면서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했고, 마차에 들어온 엘라는 레이시의 모습에 미안하다는 듯 레이시의 눈치를 보다가 레이시의 손을 대신 마사지해주기 시작했다.
“미안해.”
“아, 아니에요……. 엘라라면 솔직히 사람 하나 둘 쯤은 죽을 거 같았는데 아무도 안 죽어서 다행이에요.”
“……사람이 다쳤는데?”
“엘라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의 부하잖아요.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신경 쓰겠지만, 엘라를 다치게 했던 사람의 부하라면 솔직히……, 불쌍하긴 하지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아요.”
전생에 만약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 여자친구를 죽일 뻔하다가 미수에 그친 범죄자가 차 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으스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신경이나 썼을까?
아마 그런 소식이 왜 자기 귀에 들린 건지, 그리고 그런 걸 알게 된 여자친구에게나 신경 썼겠지.
레이시에게 있어서 지금 바닥에 쓰러져서 치료받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다친 건 조금 불쌍하지만, 동정의 기분은 전혀 안 든다.
그렇게 말하자 엘라는 레이시의 손등에 입을 맞추면서 배시시 웃었고, 레이시는 그 웃음을 보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조심스럽게 엘라의 손을 잡았다.
“그럼 수고했으니까 오늘 하루는 여기에 가만히 있어. 명령이야.”
“네. 그럴게요.”
엘라의 말에 키득키득 웃다가 엘라의 볼에 입을 맞추는 레이시.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요 며칠 동안 제대로 마음 놓고 잔 적이 없어서인지 레이시는 마차를 타고 20분 정도 있자 점점 꾸벅거리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천천히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세상 모르게 자기 시작하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얼굴에 아까까지 쌓였던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걸 느끼며 한숨을 깊게 내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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