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선택의 시간2
* * *
다음 날 아침, 레이시는 잠시 고민하다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볼케릭의 말대로 국왕과 볼케릭을 보기 위해서 저택에서 나와 왕궁으로 걸어갔다.
볼케릭이 미리 말해뒀는지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
레이시는 그 사람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한 다음 국왕이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고, 국왕은 레이시가 들어오자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로 레이시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눈은 괜찮은가?”
“괜찮아요. 좀 더 시간은 걸린다는 거 같은데, 후유증 같은 건 남지 않는데요.”
“그렇군.”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대화를 멈추는 국왕.
국왕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손가락을 매만지다가 이내 레이시를 보면서 다시 한번 괜찮은 거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그런 국왕의 질문에 자기는 괜찮다면서 다시 웃어보였다.
환하게 웃는 미소.
하지만 그 입가의 끝이나 손끝을 바라보면 아직 공포심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기에 국왕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마를 붙잡았고, 레이시는 그런 국왕의 모습에 자기 손끝을 바라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남을 속이는 건 아무래도 못하겠네.
최대한 태연하게 있는 건데도, 미네르바에게 기대서 안도감을 얻고 있는데도 이렇게 이렇게 떨리다니.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등에 단검이 꽂힐 때의 감각이 떠올라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국왕은 레이시의 반응에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허브 티란다. 마음을 진정시켜 줄 거야.”
“아, 감사합니다.”
“궁금하지는 않나?”
“네?”
“네가 이런 일을 당한 이유, 엘라가 공격 받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레이시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말해주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면서 레이시를 바라보는 국왕.
이 이야기는 국왕도 말하기 꺼려지는지 스스로의 손가락을 매만지면서 긴장한 분위기를 엿보였고, 레이시는 그런 국왕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키다가 미네르바의 손을 잡으며 침을 삼켰다.
“네가 엘라의 연인이 되려고 한다면 너도 아는 게 좋겠지. 원한다면 말해주겠네.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딱히 네가 이런 걸 알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가 이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네가 내 며느리 후보라는 건 변하지 않고 엘라의 소중한 애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뒤늦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레이시를 바라보는 국왕.
국왕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그저 엘라의 아버지라는 듯 얼굴에 잡힌 주름처럼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레이시는 그 미소에 불안을 조금 덜더니 잠시 시간을 달라고 말한 다음 차를 마시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엘라에게 좀 더 가까워지겠지.
엘라가 공격당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고 엘라가 암살 시도를 받았던 이유도 알게 될 것이다.
……국왕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엘라에게 좀 더 가까워지는 대가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될까?
그런 생각을 이어가던 레이시는 국왕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고, 국왕은 레이시가 어떤 선택지를 고른다고 해도 뭐라고 하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레이시는 국왕의 미소에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엘라의 입으로 들어야 할 이야기지, 국왕에게서 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니?”
“네. 그런 거 같아요. 듣는다면 엘라의 입으로 듣고 싶어요. 이번 일만큼은요. 안 그러면 또 언젠가 싸울 거 같아요. 저는 엘라의 곁에 있고 싶다고 조르고, 엘라는 그런 저를 떼어놓으려고 하고……. 그럴 거 같아요. 아하하하…….”
“따라갈 생각이었니?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저는 엘라의 메이드인걸요? ……그리고 엘라가 저를 지켜줄 테니까,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엘라의 옆에서 떨어지고 싶진 않아요. 엘라가 이번에는 못 지켜줄 거 같으니까 저택에 있으라고 말할 땐 그렇게 하겠지만요.”
“오늘 돌아가서 네가 회복되었을 때 앞으로 너를 저택에만 가둬두겠다고 한다면?”
“이야기를 나눠보겠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낼 거예요.”
어색하게 웃으면서 힘들지도 모르고 또 이 이유로 싸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는 레이시.
국왕은 부드러우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레이시의 모습에 엘라가 정말 좋은 사람을 잡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부드럽게 웃으면서 레이시의 눈 상태에 대해서 물어봤다.
“아직 낮에는 나가기 조금 어려워요. 지금도 살짝 눈이 아려요.”
“아, 배려가 부족했군.”
“에헤헤……, 감사합니다.”
평소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사과했을 텐데…….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커튼을 친 국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레이시의 부상이 생각보다 강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쳐다봤고, 이내 레이시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보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엘릭서를 내밀었다.
외상의 경우에는 완전히 회복시켜주고, 내상의 경우 회복 속도를 수 배로 올리는 비약.
국왕은 레이시에게 군마 2마리보다 비싼 약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미스트에게 이 약을 건네주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어제 볼케릭이 줬었던 것과 똑같은 약병의 모습에 그러겠다고 말했다.
생산량이 제한되어 있어 주문하는데 오래 걸리는 약이라고 했으니까, 미스트가 좋아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약을 챙긴 다음 국왕고 엘라에 대한 것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부분은 엘라의 기분에 대한 이야기.
레이시는 국왕에게 엘라와 함께 처음 왕궁을 떠났을 때부터 자기가 습격당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하면서 꺄르륵 웃었고, 국왕은 레이시의 이야기를 즐겁게 듣다가 레이시의 이야기가 끝나자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레이시의 고생에 공감해주었다.
그러자 쾌활하게 웃던 가면에 살짝 금이 가는 레이시.
하지만 울거나 힘든 걸 그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레이시는 고개를 가볍게 젓고서는 다시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시가 일어나자 모자를 챙겨와서 레이시에게 건네주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잠시만 밖에 나가서 기다려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부탁에 잠시 망설이다가 레이시가 다시 한번 간곡하게 부탁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5분만 주겠다면서 방에서 나갔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말에 고맙다고 말하다가 국왕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는 밖으로 나왔다.
살짝 붉어진 눈가.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눈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레이시가 왜 나가달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아차리면서 쭈뼛거리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반응에 눈가를 가리며 어색하게 웃다가 얼른 돌아가서 약을 바르자고 말했다.
“미네르바가 도와주셔야 해요.”
“응, 알고 있다. 조심해서 걸어라.”
레이시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걷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맹수를 눈앞에 뒀을 때보다 몇 배는 긴장한 얼굴로 레이시의 손을 잡고 걸었고, 레이시는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그 긴장감에 키득 웃으면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평소와 똑같이 치료를 받았다.
안약을 넣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온찜질 겸 마사지.
레이시는 눈을 감고서 눈가에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엘라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옆에 앉으면서 눈은 좀 어떠냐고 물어봤다.
“요즘에 매번 그 말밖에 없네요. 점심으로 뭘 먹을 건지 물어봐줬으면 했는데…….”
“읏, 그, 미안. 그, 그러니까……. 나, 오늘 재판하고 왔어.”
“에헤헤, 오늘도 수고했어요. 엘라.”
레이시의 말에 당황하는 엘라와 그런 엘라를 껴안아주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가 자기를 놀렸단 사실에 꽤 치료가 빠르구나 싶어 안도하면서 레이시를 껴안고 레이시를 느꼈고, 레이시는 찰싹 달라붙는 엘라의 행동에 작게 웃다가 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는 모래시계를 한 번만 확인해달라고 부탁하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모래가 다 넘어갔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눈을 데워주던 수건을 치운 다음 미네르바의 손길에 얼굴을 맡겼다.
“으응, 주인. 그럼 난 나비랑 하양이에게 다녀오겠다.”
“미안해요. 제가 할 일인데.”
“아니다, 괜찮다.”
“나비는 괜찮아요?”
“나비의 부상은 살만 살짝 찢어진거다. 주인만큼 큰 부상을 입은 녀석은 없으니까 안심해라.”
“그럴게요. 빨리 나으면 넷이서 또 산책 가요.”
“응. 약속하는 거다.”
“네, 약속이에요.”
레이시의 말에 그럼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살짝 시무룩한 미네르바의 뒷모습에 빨리 나아야겠다며 작게 웃다가 엘라에게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재판 때문에 일정이 전부 백지가 됐다는 걸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라와 둘이서 엘라의 방으로 올라가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가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천천히 방으로 올라간 다음 레이시를 침대에 앉혀주었고, 레이시는 엘라의 윤곽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어두운 방 안에 멋쩍게 웃다가 자기는 오늘 국왕하고 이야기를 하고 왔다고 말했다.
“볼케릭 오라버니한테 들었었어. ……영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야.”
“아하하…….”
엘라의 말에 어색하게 웃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웃음에 그렇지 않냐며 레이시의 옆자리에 앉아서 뭐에 그렇게 얽메여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런 사람도 있는 게 좋지 않냐며 엘라에게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자 엘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레이시의 어깨를 감싸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용해지는 두 사람.
엘라는 레이시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조용히 했고, 레이시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건 레이시였다.
“국왕님하고 이야기하면서 블루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겠냐고 들었어요.”
“…….”
그리고 레이시가 입을 떼자 드디어 올게 왔다고 생각하면서 긴장하는 엘라.
엘라는 레이시가 공포에 질리거나 이런 왕궁 생활에 지쳤다고 말해도 어떻게 말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른 침을 삼켰고, 레이시는 엘라가 긴장하자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저는……, 엘라에게서 듣고 싶어서, 국왕님에게 듣지 않겠다고 대답했고요.”
“…….”
“저번에 처음 저를 떼어놓으려고 했을 때, 저는 정말로 위험한 거라면 말해달라고 부탁했었죠? 지금 말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나중에 엘라가 말해줄 수 있을 때 제게 말해주세요.”
“레이시…….”
“그리고! 이거도 받아주세요.”
“으응?”
레이시가 건넨 건 스킬 보석.
그것도 사용해서 보석의 가치를 잃어버린 스킬 보석이었고, 엘라는 그 스킬 보석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레이시를 바라봤다.
천천히 어둠에 적응해서 희무끄레하게 보이는 레이시의 얼굴.
그 얼굴은 약간 붉어진 채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얼굴에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 스킬 보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엘라는 자기 손바닥에 놓인 보석이 뭔가 눈에 익은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시선이 보석으로 가자 숨을 크게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 썼어요. 하지만 국왕님 말씀으로는 발동하는 조건은 또 미지수라서 제가 임신할 수 있게 됐다고 해서 실제로 제가 임신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데요.”
“어……?”
“저……, 국왕님의 말씀대로 이런 걸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깊게 관여할수록 위험해질 수도 있겠죠……? 그래도, 저는 엘라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엘라가 힘들어하면 엘라의 기댈 곳이 되고 싶고, 반대로 제가 힘들면 제가 엘라에게 기대고 싶어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잔뜩 떨리는 손끝.
엘라는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그 떨림으로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엘라가 자기 손을 꽉 잡아주자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엘라. 있잖아요…….”
“으, 으응!?”
“엘라만 괜찮다면 저를 받아주실래요……?”
고개를 돌려서 엘라의 입에 입술을 겹치는 레이시.
엘라는 천천히 전해져 오는 레이시의 온기에 손끝을 파르르 떨다가 눈을 감으면서 레이시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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