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 선택의 시간1
* * *
레이시를 마차에 눕힌 엘라는 레이시가 다시 잠에서 깰 때까지 계속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이시가 하루가 꼬박 넘어가도록 잠을 잤는데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손길에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고, 엘라는 레이시가 눈을 뜨자 크게 안심한 얼굴로 레이시에게 잘 잤냐면서 레이시의 뺨을 약하게 꼬집었다.
“으, 으응…….”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말에 처음에는 웃는 듯하더니 이내 마차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순간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자기 등을 가렸다.
딱 봐도 트라우마가 남은 모습.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작게 눈을 찌푸리다가 이내 레이시를 끌어안으면서 남은 범죄자들을 찾고 있을 뿐이니 안심하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안 다쳤냐고 물어봤다.
손끝을 덜덜 떨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 물어보는 모습에 엘라는 잠시 갑갑함을 느꼈지만, 그것이 레이시가 안심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갑갑함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괜찮다고 말했다.
“나비가 조금 다치긴 했는데 괜찮아.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그렇구나…….”
“레이시만 좀 크게 다쳤어. 등은 좀 어때? 괜찮아?”
“그……, 조금 피곤해요. 눈이 아리기도 하고…….”
“마비 독 때문에 동공이 열린 채라 그런 거야. 자, 다시 눕자. 남은 독은 시간이 해결해줄 수밖에 없거든.”
싱긋 웃으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엘라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뜬 걸 보고는 엘라의 눈가를 쓰다듬다가 엘라도 같이 자자고 말했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미안하다는 듯 쓰게 웃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는 일이 있어서. 미안해.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면 수도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 때 같이 자자.”
“네……, 그럼 저 죄송한데…….”
“응, 자. 조금 갑갑할지도 모르겠지만, 따뜻하게 자는 쪽이 회복 속도에 도움을 주니까 따뜻하게 해놓고 갈게.”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머리를 베개로 받쳐주더니 마차 안의 난방을 조절한 다음, 레이시의 가슴까지 두꺼운 이불을 올려주었고, 레이시는 엘라의 행동에 배시시 웃다가 이내 피곤함을 못 이기겠는지 금방 다시 잠들었다.
그 모습을 안타깝다는 듯 쳐다보는 엘라.
엘라는 레이시가 잠든 걸 확인하고는 마차에서 내려 마차의 문을 잠그고 마법을 인챈트 해주었고 이내 마차 위에서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는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레이시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는지 미네르바는 날개를 잔뜩 세운 채 울음소리도 내지 않고 마치 가고일처럼 레이시를 지켰고, 엘라는 그런 미네르바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다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다.
“범죄자들 면상, 볼 거야?”
“…….”
엘라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젓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곁에 떨어졌었던 게 문제라며 울먹였고, 엘라는 그런 미네르바의 모습에 잠시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영주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원래라면 영주와 영주의 가족이 사용할 잘 꾸며진 방이었지만, 지금은 레이시가 자는 사이에 달려온 특수 수사대로 꽉 차 있었고, 엘라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입을 열었다.
“결과.”
“네, 여기에 있습니다.”
엘라의 말에 서류를 건네는 수사관.
수사관은 혹여나 엘라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손끝을 바들바들 떨면서 서류를 건넸고, 엘라는 수사관이 건넨 서류를 통해서 길드의 직원까지 자기를 담그려고 했다는 걸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튀어나오는 웃음.
그 웃음에 방 안의 수사관들은 움찔 떨면서 엘라를 쳐다봤고, 엘라는 튀어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억누르다가 이내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이내 탁자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그대로 두 조각나는 책상.
“흐, 흐흐흐…….”
“에, 엘라님?”
“아하하하하! 블루드 이 쥐새끼가! 다른 나라에 숨어있으면 멀쩡할 줄 알았나보지!? 도시 채로 지워주겠어!”
“엘라님! 전쟁이 됩니다! 그것만은 제발 참아주세요!”
“닥쳐! 좆도 아닌 게 까불지 말고 저리 꺼져!”
“커헉!?”
마력을 있는 대로 방출하던 엘라는 발을 구르면서 블루드가 있는 도시를 지도 위에서 사라지게 해주겠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엘라가 실제로 그럴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수사관들은 엘라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욱 강하게 마력을 방출하는 엘라.
실핏줄이 잔뜩 올라와 충혈된 눈으로 씩씩 거리던 엘라는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부서트린 책상을 저택의 벽에 집어 던졌고, 마력을 잔뜩 집어먹은 책상은 벽과 함께 산산조각나며 저택의 앞마당에 떨어졌다.
“흐욱……, 흐욱……! 그 개새끼들, 전원 내 감옥에 가둬. 나중에 처리할 거야.”
“아, 알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은 진정했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화를 가라앉히고 나중을 위해서 체포한 사람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라고 말하는 엘라.
수사관들은 엘라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면서 밖으로 나갔고, 미스트는 그들이 나가자 들어오면서 엘라에게 인사했다.
“공주님. 돌아갈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레이시를 위한 치료실도 준비가 끝났고요.”
“응, 그래. 수고했어.”
미스트의 말에 화가 천천히 가라앉는지 원래대로 돌아오는 충혈된 눈.
미스트는 엘라에게 오늘이라도 당장에 수도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고, 엘라는 미스트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여기에 더 머물러봤자 좋은 일도 없겠다면서 당장 떠나자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아샤 불러.”
“알겠습니다.”
미스트가 나가자 길거리에서 샀었던 맥주를 마시면서 속을 달래는 엘라.
잠시 후 아샤가 들어오자 엘라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한 종이를 건네주었다.
“나만 당하고 있을 순 없지. 아샤. 이 녀석 죽이고 와.”
“어떻게?”
“처참하게. 죄명은 거기에 적혀 있으니까 거리에 효수해버려.”
엘라가 건넨 종이에는 한 귀족의 이름과 그 귀족이 저질렀던 범법행위가 모두 적혀 있었고, 아샤는 엘라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다가 블루드와 연관이 있는 귀족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당장에 처리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레이시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아샤.
엘라는 아샤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샤를 배웅했고, 아샤는 엘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그렇게 자기의 탐지 범위에서 아샤가 사라지자 엘라는 마차로 돌아갔고, 이내 마부석에 앉아있는 미스트에게 출발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아무 말 없이 밤길을 달리는 마차.
미네르바는 이번에야말로 레이시를 제대로 지키겠다는 듯 근처에 오는 토끼 한 마리도 내버려두지 않고 죽이면서 수도로 돌아갔고, 수도로 돌아갈 때쯤 레이시는 평소처럼 일어날 정도로 회복했다.
“으응……. 아직 눈이 부시네요…….”
“무리하지 마. 괜찮으니까 천천히 마음먹자.”
다른 곳은 모두 회복됐지만 홍채의 근육은 아직 마비된 상태인 레이시.
전보다는 조절되었지만 여전히 동공이 반쯤 열려있어 레이시는 햇빛에 눈이 따갑다며 웃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웃음에 슬프게 웃으면서 레이시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레이시는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며 엘라를 달래주었다.
“왜 저보다 엘라가 슬퍼해요. 그리고 영구적인 장애는 아니라고 했잖아요?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럼 저희 또 놀러가요.”
“……응.”
분명 트라우마로 괴로울 텐데…….
자기를 위해서 해맑게 웃는 레이시의 모습에 엘라는 잠시 입술을 꽉 깨물다가 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레이시의 손을 잡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저택으로 도착해 커튼을 치고 레이시에게 안약을 넣어주는 엘라.
레이시는 꽤 따끔거리는 안약에 눈물을 찔끔 흘리다가 미스트가 따뜻한 수건으로 눈을 가려주자 한숨을 내쉬면서 축 늘어졌다.
“한 10분 정도만 마사지 할게요.”
“네에.”
“따끔거리는 것 외에 따로 통증이 있으면 꼭 말해주셔야 해요.”
“그럴게요. 미스트.”
눈을 감은 채로 대답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표정이 저절로 연상될 정도로 음울한 미스트의 목소리에 어색하게 웃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소파에 몸을 맡겼고, 미네르바는 그런 레이시의 몸을 받쳐주면서 아프지는 않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노크 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어주고 올 수 있겠냐고 물어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를 똑바로 앉힌 다음 금방 돌아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바람이 강하게 불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미네르바.
미네르바가 뛰는 것과 걷는 것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면서 움직이자, 레이시는 어색하게 웃다가 손님이 누구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자기는 치료중.
그렇기에 레이시는 미스트를 기다리면서 소파에 몸을 기댔고, 미네르바가 다시 자기 몸을 받쳐주자 손님이 누구였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미네르바 대신에 자기 정체를 밝혀주는 손님.
“볼케릭 라마 오라토리엄이다.”
“아……!”
“자리에 앉아라. 네가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으니까.”
손님의 정체는 볼케릭.
엘라와 말싸움을 했었던 오라토리엄 왕국의 왕자 중 한 명이었고, 레이시는 손님의 정체를 알게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볼케릭은 레이시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다음 미네르바에게 다시 물수건을 덮어주라고 말했고, 미네르바는 볼케릭의 말에 볼케릭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라면서 으르렁거리다가 레이시의 눈에 수건을 올려주었다.
그러자 미네르바에게 진정하라고 말하면서 무슨 목적으로 방문했는지 물어보는 레이시.
볼케릭은 레이시의 질문에 말을 고르듯 잠시 숨을 멈추다가, 테이블에 한 물건을 내려놓았다.
유리병에 담긴 물건인지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리 특유의 높은 소리가 나는 테이블.
레이시는 그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볼케릭은 레이시의 반응에 입을 열었다.
“약이다. 어떤 약을 들고 오면 좋을지 몰라 고민하다가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체력 회복에 도움을 주는 약을 골랐다. 왕궁 약사가 만든 것이니 품질은 확신한다만……, 엘라의 메이드인 네가 믿긴 힘들겠군. 미스트에게 품질 확인을 부탁해도 좋고, 사용하지 않고 버려도 좋다.”
“네? 아, 아니에요.”
“……엘라는 어떻지? 화를 내고 있진 않나? 엘라는 예전부터 화를 심하게 내면 코피가 터지니 그 부분은 메이드인 네가 신경 써주었으면 좋겠군. 술은……, 좋은 술을 먹여라. 빈자의 눈물 같은 럼주는 속에 안 좋다.”
저번에 엘라와 말다툼을 할 때와는 정반대로 투박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엘라의 상태를 물어보는 볼케릭.
레이시는 갑자기 사람이 변한 것 같은 볼케릭의 목소리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볼케릭의 말에 대답했고, 볼케릭은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쓰게 웃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당혹스러운 모양이군.”
“그, 그게…….”
“아니, 이해한다. 너는 왕궁 생활에 익숙하지 않을 거니. ……다만 나도 왕가의 일원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을 때만큼은 평범하게 지내고 싶으니 이렇게 있게 해다오.”
“그, 그으……. 네.”
“……흠. 할 말이 있었는데 말하기 어렵게 됐군.”
“네? 무슨 말씀이셨는데요……?”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엘라에 대한 이야기지. ……엘라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네가 이래서는 행복하지 않겠지. 빨리 나으면 좋겠군.”
“가, 감사합니다……?”
“……내일, 몸 상태가 괜찮으면 아버지의 집무실에 방문해라. 명령은 아니니 꼭 들을 필요는 없다. ……그냥, 엘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니까 안 와도 좋다.”
“……네에.”
“그럼 가마. 쾌유를 빌지.”
갈 때까지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다가 가는 볼케릭.
레이시는 볼케릭의 발걸음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미스트가 내려와 수건을 치워주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누구셨나요?”
“볼케릭 왕자님이요. 약을 주시고 가셨어요.”
“그래요? 으음, 한 번 보고 올게요. 레이시. 오늘도 수고했어요.”
“에헤헤…….”
레이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자리를 뜨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입맞춤에 작게 웃다가 미네르바에게 나비와 하양이를 보러가자고 말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시를 부축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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