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자애의 뒷면에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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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애와 여유는 모두 힘에서 나온다.
가장 보편적이며 따로 이견을 제시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연한 사실.
그리고 그 엘라의 옆에서 자애롭게 있을 수 있을 정도라면, 엘라의 주변에 있는 적들보다 월등히 강할 게 틀림 없다.
왜 자기들은 그런 걸 생각하지 못한 걸까?
기사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미네르바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저 하피는 자기들을 언제 어느 때든 원하는 방식으로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강자다.
바질리스크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감각이 날카로웠던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네르바를 바라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를 지켜주겠다느니 걱정한다느니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한 기사들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기사들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저들은 자기가 레이시를 지킬 수 없다는 듯한 무시하는 말을 했다.
마음에 안 든다.
그렇게 생각한 미네르바는 천천히 고개를 뚝뚝 꺾으면서 기사들을 쳐다봤고, 기사들은 그런 미네르바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 미네르바를 바라보며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화를 내려는 미네르바를 말린 사람은 레이시였다.
나비의 등에서 가볍게 내리더니 미네르바에게 쪼갠 석류를 건네주면서 같이 먹자고 말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손을 잡고는 나비의 배 쪽으로 가서 멧돼지를 뜯어먹는 나비와 함께 석류를 먹기 시작했고, 기사들을 바라보며 잠시만 기다려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나비는 저랑 같이 밥 먹는 걸 좋아하거든요.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레이디 루피너스…….”
레이시의 말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들.
레이시는 그런 기사들의 반응에 싱긋 웃으면서 미네르바와 석류를 먹으면서 미네르바를 진정시켰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에게 작게 투정부리다가 이내 레이시에게 안겨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물러나는 기사들.
레이시는 기사들이 물러나자 미네르바의 뺨을 잡아당기며 다음부터는 그렇게 위협하지 말라고 말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볼을 부풀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네르바가 절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잖아요.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마요.”
“……헤헤. 알겠다. 주인. 그런데 멧돼지를 전부 먹은 다음에는 뭐하나?”
“글쎄요? 오늘은 이걸로 일이 끝날 걸요?”
나비의 잇몸에 묻은 살점을 손으로 떼서 나비의 혀에 올려주면서 대답하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 숲에는 이제 멧돼지가 없다고 말해주었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말에 수고했다면서 고기를 만지지 않은 손으로 미네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레이시는 엘라에게 가기 전에 호수에 가서 나비의 이와 턱을 닦아준 다음 숲을 빠져나왔고, 엘라는 나비와 레이시가 나오자 손을 가볍게 흔들어준 다음 기사들을 바라보면서 오늘 남은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레이시의 예상대로 오늘은 더 이상 일이 없다고 말했고, 엘라는 일이 없다는 말에 돌아가자면서 촌장에게 자기 인장이 찍힌 종이를 내밀며 영주에게 지원 신청을 하라고 말했다.
공주의 인장.
이것을 보고도 지원을 주지 않을 영주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촌장은 울먹거리더니 대로에서 엘라에게 절하며 감사를 표했고, 엘라는 그런 촌장의 절을 턱짓으로 받아준 다음에 나비의 등 뒤에 올라타서 레이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뭘 걱정하는지 안다면서 작게 웃다가 엘라의 손에 깍지를 끼는 레이시.
“저렇게 해야 촌장님이 편하신 거죠?”
“응. 불편하진 않아?”
“저는 불편하긴 한데……, 이래야 엘라와 촌장님, 그리고 주변의 기사분들이 편한 거잖아요? 그럼 참을래요.”
“……에헤헤. 고마워.”
레이시의 말에 배시시 웃으면서 레이시의 배 위에 손을 올리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주다가, 도시가 보이자 엘라의 손을 떼어낸 다음 마을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주가 말해뒀는지 마을의 주민들이 나와서 엘라에게 환호성을 내질렀고, 엘라는 그런 환호성에 응답하듯 손을 흔들어주다가 이내 귀찮다는 듯 레이시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이런 환호는 정말 싫단 말이야.”
“에헤헤, 조금만 참아요.”
“뭐, 하긴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거니까 조금만 참아볼까?”
표정을 유지하며 퍼레이드를 끝내는 엘라.
엘라는 레이시의 얼굴을 보더니 며칠만 힘내보자며 열심히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이내 주민들의 민원을 전부 처리하고 기사의 양성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도와주는 주체는 아샤였지만, 아샤는 엘라의 기사.
그렇기에 아샤가 도와주는 것은 엘라가 도와주는 일이 되었고, 아샤는 엘라와 미스트가 주변의 천공섬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숲을 관리하는 귀족들과 이야기할 때 기사들을 훈련시켜주게 되었다.
그리고 레이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다.
지금 레이시가 귀족들과 만나게 된다면 쓸데없이 대화가 길어져서 엘라를 힘들게 할 뿐이라는 미스트의 말을 따라 아샤가 기사를 양성하는 것을 지켜봤고, 아샤는 자기를 바라보는 레이시의 모습에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원래라면 욕설과 살기가 난무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기사는 자기가 귀족 출신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오만하게 굴다가 죽는 게 태반이었으니까 욕설과 살기로 그 오만함을 꺾어줘야만 한다.
하지만 그랬다가 레이시의 트라우마를 괜히 자극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아샤는 레이시를 바라봤고, 레이시는 아샤가 자기를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피식 웃다가 귀를 막으라는 시늉을 하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시늉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귀를 막았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본격적으로 기사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벽천화 기사단이라는 초 엘리트 집단을 반쯤 죽일 듯이 굴렸었던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는지 처음에는 어떻게든 체면을 지키려고 땅을 구르지 않고 일어서서 훈련을 받으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침을 줄줄 흘리며 땅을 구르다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기본이 씨발, 지랄에다가 좆 같이 힘들다거나 차라리 죽이라는 외침까지.
레이시는 어느 세상이든 군대는 욕설로 돌아가는구나 싶어 어색하게 웃다가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기사들의 훈련을 지켜봤고, 이내 기사들의 반응이 점점 변하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그 짧은 시간만에 강해지는 게 느껴진 건지 아샤를 바라보는 기사들.
레이시는 그 기사들에게 점심을 챙겨주다가 한 기사에게 불려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샤에게 선물을 주려고 그러나 싶어 얌전히 기사에게 가는 레이시.
하지만 기사는 그런 레이시의 예상 외의 것을 레이시에게 물어봤고, 레이시는 기사의 질문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요?”
“아샤님에게 이 편지를 전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습니까?”
딱 봐도 연정이 잔뜩 담긴 레이시.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야차로서의 본능이 경종이 울렸기에 레이시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기사를 바라봤고, 이내 이게 무슨 편지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피하는 기사.
기사는 레이시가 가만히 자기를 쳐다보자 자기 실력을 키워준 아샤에게 감사함을 담아 적었다며 사냥회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을 뿐이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그런 기사의 말에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100% 연애편지잖아.
연애편지라는 것을 실물로는 처음 본 레이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기사가 워낙 애처로운 얼굴을 하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편지를 받아들고 아샤에게 돌아갔다.
미네르바와 가볍게 투닥거리고 있던 아샤.
아샤는 레이시가 시무룩하게 다가오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아샤의 질문에 손에 들린 편지를 보여주었다.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편지를 받아서 읽어보았고, 이내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레이시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리던 이유를 알게 된 아샤는 레이시에게 걱정한 거냐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레이시는 아샤의 손길에 작게 투정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샤는 멋지잖아요. 다른 사람이 반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거는 너 말고는 없거든? 보통 이런 편지를 보내는 건 귀족들 간의 친목 다지기야.”
“이번에는 아닐 걸요.”
“그걸 어떻게 알아?”
“저는 알아요!”
“……어, 그래?”
볼을 부풀린 채로 투덜거리는 레이시.
아샤는 평소와 다른 레이시의 행동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뺨을 긁으면서 레이시를 달래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태평하게 생각하는 아샤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끼면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진짜로 연애편지인데 왜 안 믿어주는 걸까?
레이시는 아샤의 태평한 반응에 다시금 한숨을 깊게 내쉬다가 아샤의 볼을 쪼물거리기 시작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손길에 눈을 깜빡이다가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레이시가 걱정이 많다고 생각했다.
아마 연정의 야차이니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레이시에게 설령 고백을 받는다고 해도 자기는 레이시가 있으니 거절하겠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걱정을 조금은 덜면서도 계속해서 아샤를 쳐다봤다.
건강미가 넘치는 구릿빛 피부에 회색의 머리카락.
자신의 뿔과 다르게 날카롭게 서있는 뿔은 로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거기에다가 선명한 핏줄과 근육까지…….
건강미라고 해야할까 날카롭게 서있는 칼과도 같은 매력이라고 할까, 그런 매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즉, 자기가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니라 아샤가 둔감하게 구는 것.
레이시는 자기가 둔감한 하렘물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히로인의 시점으로 사람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며 투덜거리다가 이내 아샤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러는 거야?”
“으, 으음, 그렇다. 엘라.”
아샤의 옆에 달라 붙어서 훈련을 받는 기사들을 노려보는 레이시.
기사들은 그런 레이시의 시선에 흠칫 떨면서 레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멧돼지를 죽일 때 보여줬던 그 자애로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바짝 긴장한 채로 기사들을 바라보며 동시에 기사들을 견제하는 모습.
기사들은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레이시도 야차라는 걸, 그리고 레이시의 주변에는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실례일 정도로 강한 하피가 있다는 걸 떠올리면서 레이시의 기분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 없어 기사들은 아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샤는 기사들의 도움 요청에 멋쩍게 뺨을 긁다가 저 멀리서 구경하고 있는 엘라를 힐끗 본 다음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전에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우우…….”
“하아, 괜한 걱정이야.”
“아샤는 엘라랑 다르게 자기가 얼마나 매력있는지 몰라서 걱정이에요.”
투덜거리면서 아샤를 끌어안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말에 자기 뿔을 긁적이다가 엘라를 불러 저번에 레이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해주면서 레이시를 데리고 가라고 말했고, 엘라는 그런 아샤의 말에 레이시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기는커녕 레이시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애인은 쟁취하는 거지. 대신 다음에 나랑도 놀아주는 거다?”
“우, 우우……, 죄송해요. 엘라.”
“아냐, 아냐. 나도 다음에 유혹 받으면 이렇게 해준다고 생각하면 못 견딜 것도 아니지.”
싱긋 웃으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떠나는 엘라.
아샤는 그런 엘라의 뒷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봤다.
언제나 보였던 약간의 여유도, 부드러움도 없이 긴장한 레이시의 얼굴.
그것들은 언제나 타인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다는 힘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레이시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다가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기사들을 다시금 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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