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신입 교사 레이시3
* * *
“으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편하게 다녀오세요.”
저택에 도착하자 레베카에게 양해를 구하는 레이시.
레베카는 마차 안은 꽤 따뜻하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갔다 오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레베카의 말에 빠르게 다녀오겠다면서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레이시는 엘라와 미스트의 이름을 부르며 안에 있는지 물어봤고, 다행히 오늘은 둘 다 저택에 있는 날이었는지 두 사람은 레이시의 목소리에 동시에 대답했다.
“왜?”
“부르셨어요?”
“아, 안에 계셨구나. 저기 엘라, 그……, 죄송한데……. 손님을 데리고 와서요.”
“헤에? 네가? 벽천화 기사단의 사람이야? 아니면 왕궁 식당의 사람?”
“아뇨, 레베카 오라토리엄 님이요…….”
“흐응?”
레이시의 말에 읽고 있던 책을 덮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가 책을 덮자 움찔 떨면서 엘라의 눈치를 바라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키득 웃으면서 화난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레이시의 코트를 벗겨주었다.
“새언니가 찾아왔다는 게 궁금해서 그래. 왜 찾아오셨어?”
“그게, 으음, 이야기하자면 조금 긴데 레베카 님을 안으로 들이고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응, 그래. 미스트, 홍차 부탁할게.”
“네, 공주님.”
레이시는 엘라의 대답에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두 사람에게 사과한 다음 마차에 가서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고,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레이시는 다급하게 마차의 입구로 돌아가서 레베카에게 손을 내밀었고, 레베카는 레이시의 에스코트에 싱긋 웃으면서 레이시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오다가 레이시와 만나셨다고.”
“네, 제 마차를 끌어주는 말들에게 문제가 생겼는데 레이시 양이 저를 도와주었죠.”
“파티 문제군요.”
“네. 정말이지……,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야트 씨에게 민폐를 끼칠 뻔했는데 레이시 양 덕분에 큰 민폐를 끼치지 않고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답니다.”
우선 호의적으로 레베카를 대해주는 엘라.
레베카는 엘라의 태도에 웃으면서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말했고, 엘라는 레베카의 인사에 레이시에게 감사인사를 하라고 말한 다음 차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레베카는 레이시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레이시와 관련된 일로 도와주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고, 엘라는 레베카의 말에 잠시 눈을 찌푸렸다.
보통 왕족이 어떤 일을 도와주겠다고 말하면 자기 아래의 사람들을 시키지 본인이 직접 도와주지는 않는다.
자기처럼 백성을 위해서 움직이는 거라면 또 모를까, 자기와 관련이 없는 귀족들을 도와주는 일이라면 왕족의 이름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적당히 말해주는 게 끝이다.
그런데 왜 레베카가 레이시를 도와준다는 걸까?
혹시 레이시를 정치판에 끌어들이려는 속셈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엘라는 소파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다가 무슨 일로 레이시를 도와주려고 하냐고 물어봤고 레베카는 엘라의 질문에 웃으면서 레이시와 나누었던 대화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그리고 엘라는 레베카의 설명을 전부 듣고는 헛웃음을 날리다가 레이시의 얼굴을 보고는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레이시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자기가 뭔가 큰 잘못을 했나 싶어서 엘라의 옆으로 가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가 자기 옆에 앉자 꼭 끌어안고 볼을 만지작거렸고, 레이시는 엘라의 애정표현에 레베카의 눈치를 보다가 부끄럽다며 엘라를 밀어냈다.
“레, 레베카 님이 보시잖아요.”
“뭐 어때서 그래? 어차피 사적인 자리잖아?”
“으으……, 그래도요!”
“아하핫! 알았어.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뭔가 하실 생각이면 멈추세요. 아카데미 쪽에서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맞죠?”
“응, 그렇지. 아카데미가 잘못한 건 아냐. 그냥 그 아메스 학생 주임이라는 사람이 자랑을 좀 이상하게 했을 뿐이고 네가 경험이 없어서 이상하게 받아들인 것뿐이야.”
아메스라면 엘라도 기억하고 있었다.
미스트가 신분세탁을 마치고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미스트의 외모를 질투해서 이것저것 말도 안 되던 과제를 내주던 교수였으니까.
그리고 그 정도는 자기가 직접 나설 정도가 안 된다.
레이시가 견딜 수 있기도 하고 아카데미 내부의 알력 다툼에 왕가의 이름으로 개입하자니 일이 너무 하찮았으니까.
그냥 거기에서 레이시를 빼낸 다음 다른 귀족들을 겁박해서 레이시를 인정하게 만들면 만들었지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지금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렇게 개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텔레메인 가의 티타임이라, 미스트, 누가 여는 거지?”
“텔레메인 공작 가문 당주의 세 번째 동생, 로메인 텔레메인 님의 넷째 따님께서 올해 8살이 되셨기에 티타임에서 사교계 데뷔 준비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뭐가 그렇게 길어? 그러니까 하여튼 방계의 딸이라는 거지?”
“네. 계승권에서는 한참 먼 분이네요.”
“그런 곳에 갈 바에는 백작의 티타임에 가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건데 공작의 이름만 보고 활동하는 모양이네.”
“아메스 주임님께서는 언제나 그러셨으니까요.”
“뭐, 됐어. 그래서 레이시.”
“네?”
“너는 어디로 가고 싶어.”
“처음에는 마리아 씨가 있는 벽천화 기사단에 가려고 했어요. 타리나라는 학생이 기사 지망생이고 잭은 다과나 고급 요리보다는 다량의 요리를 조리해서 내놓고 싶다고 했고, 제인은 대장장이가 되고 싶다고 말했으니까요.”
“그래? 레베카 언니께서는 어떻게 도와주실 생각이셨나요?”
“레이시 양에게 귀족의 이름이 필요한 거 같아서 제가 벽천화 기사단에 방문하는 형식으로 해서 저를 도와주게 하려고 했어요. 그러면 충분할 거 같아서요.”
“음, 확실히 그렇죠.”
너무 과한 도움이긴 했지만, 일단 그 정도면 충분하긴 했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있는 상황에 실소를 터트렸다.
아메스가 한 행동은 다른 귀족들을 상대로 했다면 꽤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방계에다가 당주가 될 확률이 무척 적은 사람의 티타임이라고 해도 일단 공작 가문은 공작 가문인데다가 그런 사람과 아는 것만 하더라도 무척이나 큰 힘이었으니까.
하지만 레이시는 그런 귀족적인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아메스의 응원을 그저 노처녀 히스테리나 그런 거로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진짜로 공작 가문쯤 되는 사람을 찾으려고 했고, 우연히 만난 레베카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말았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실습을 위해서.
“큭, 푸큭! 아, 진짜…….”
누가 아카데미 학생의 실습을 위해서 왕가의 사람들을 끌어들인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운 일에 엘라는 레이시를 끌어안은 채 발을 버둥거리다가 레베카가 입가를 가리고 실소하자 발을 구르며 크게 웃고 말았다.
“푸하하하하핫! 아핫! 아하하핫! 아하하하핫!”
“으, 으으?”
그리고 엘라의 품에 있던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반응에 얼굴을 붉히면서 자기가 뭔가 실수하거나 잘못했냐며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질문에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간신히 웃음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푸흐으……, 아하, 하하핫! 아무것도 아냐. 레이시가 귀여워서.”
“우으으으으…….”
“그럼 레베카 언니, 그렇게 도와주는데 뭔가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레이시에게 애정을 표현하다가 레베카를 바라보는 엘라.
귀족과 귀족간의 거래이니 깔끔한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베카에게 마법을 부여한 장신구라도 줄지 물어봤지만, 레베카는 엘라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마차를 끌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걸요. 그리고 레이시 양을 도와주면 저도 조금은 쉴 수 있고.”
레이시를 도와주면 얻을 수 있는 게 많았다.
우선 합법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레이시의 일을 도와주면 그날은 다른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고, 다과로 배를 때우지도 않고, 화장을 지운 채로 편안한 복장으로 침대에 누워 잘 수도 있었다.
파티가 늘어나는 겨울에는 그런 편안한 휴식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리고 그런 휴식을 제외하더라도 엘라와 친분을 쌓을 수 있다는 중요한 이점이 있었다.
엘라는 오라토리엄 왕국의 무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 중 하나다.
군대로 처리하기에는 피해가 너무 크고, 소수의 모험가에게 명령을 내리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을 도맡아 하는 왕가의 상징.
그런 대체하기 힘든 상징은 차기 국왕을 노리고 있는 아이야트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새롭게 국왕이 되고 한 5년 정도는 전 세대의 왕과 비교를 당할 건데 그때 엘라가 없으면 귀족들은 그동안의 태도를 싹 뒤집어서 엘라가 없으니 백성들이 엘라가 없어서 불안해 한다는 이유로 각지에서 개인 부대를 육성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각 영지의 개인 부대가 커진다면 그만큼 왕권이 약해질 것이고, 왕권이 약해진다면 아이야트가 원하는 정책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아카데미 학생을 도와주는 수준이 아니라 정보를 조작해서 레이시의 계급을 남작이 아니라 자작이나 백작 직위로 올리는 것도 해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레베카는 엘라에게 다른 건 필요 없다고 말했고, 엘라는 레베카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다가 피식 웃으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까 아이야트 오라버니께서는 아직도 재무부에서 일하시는지?”
“네? 아, 아뇨. 지금은 재무부에서는 은퇴하시고 국왕님의 아래에서 직접 일하시고 계시죠.”
“음, 하긴 아이야트 오라버니도 내년이면 마흔이셨죠. 저는 그것보다 일찍 은퇴하고 싶네요. 한 5년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더 하겠지만……, 그 뒤로는 저도 가정을 이루고 싶으니까요.”
레베카가 원하는 건 알았으니까 적당히 협상하자고 말하는 엘라.
엘라는 2년 뒤에 있을 셰런 미인 대회에서 레이시를 우승시키고 레이시와 결혼할 생각이었기에 5년 이상은 일하기 싫다고 말했고, 레베카는 그런 엘라의 말에 기간이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하며 눈을 살짝 찡그렸다.
아이야트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병하여 훈련해도 5년만으로는 엘라를 대신해서 백성들을 도와줄 기사단을 양육하는 것도 무리다.
그렇기에 레베카는 웃는 얼굴로 엘라에게 엘라는 아직 젊으니 10년은 일할 수 있지 않겠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베카의 말에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앞으로 2년 정도 지나면 셰런 미인 대회에 레이시를 출전시켜 우승시킬 생각인데, 레이시가 워낙 귀여워야죠. 이런 애인을 집에 두고 10년이나 밖으로 나돌아다닌다면 불안해서 제대로 일하지 못할 거예요. 5년도 아버지와 계약한 것 때문에 하는 거고요.”
“레이시 양이 엘라를 두고 바람을 피울 거 같지는 않은 걸요?”
“뭐, 그렇죠. 언제나 저를 생각해주는 사랑스러운 아이니까요. 다른 애인도 제가 허락해준 사람하고만 만들고. 그래도 마음이 멀어질 수가 있잖아요? 그리고 레이시와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생각만으로 가슴이 아파서요.”
레이시를 끌어안으면서 배시시 웃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말에 부끄럽다면서 얼굴을 붉히면서 엘라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엘라는 레이시를 꽉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쳐다보던 레베카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엘라가 좋아할만한 조건을 떠올리고는 씩 웃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네?”
“레이시 양, 교사 생활은 얼마나 더 하실 생각이신가요?”
“어……, 그게 계약상으로는 앞으로 3주 정도요.”
“그럼 3주 뒤에 제가 레이시 양을 사교계에 데뷔시켜드릴게요. 거기에서 엘라와의 관계를 공표하도록 해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레이시 양에게 그런 목적으로 접근하기 힘들어지겠죠? 아,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건 제가 막아드릴게요. 어떤가요?”
“……헤?”
“음, 그렇게 된다면 조금은 안심이 되네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엘라와 레베카.
하지만 정작 레이시는 그런 두 사람의 말에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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