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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하게 된 건 좋지만 내가 여자가 되어버렸다-157화 (157/542)

〈 157화 〉 번외)엘라의 과거

* * *

엘라 파우스트 오라토리엄.

16세.

다른 왕족들이라면 본격적인 후계자 경합을 벌이겠지만, 엘라는 아직 한참 꿈을 꿀 16살이라는 나이에 꿈을 포기하고 왕가에 충성을 바친 다음 왕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후욱……, 후우욱…….”

그날 밤은 엘라의 스트레스가 극으로 치달은 날이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폭제가 된 건 정략 결혼을 생각해달라는 대신들의 발언이었다.

대신들이 꺼낸 이야기가 아예 전례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왕위 계승을 포기한 왕족들은 다른 왕족에게 보내 국가의 친교를 다지거나 그러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하지만 대상과 장소, 그리고 시간이 나빴다.

엘라가 국왕에게 원한 충성의 대가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한 가지로 요약하자면 자기 행동에 제약을 걸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엘라와 국왕의 거래가 있는 날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일하는 것도 어려울 테니 공주의 삶을 살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다니…….

차라리 나체에 피를 뿌리고 굶은 호랑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게 몇 배는 안전할 정도의 미친 짓.

엘라는 당연히 화를 내면서 대신들을 사람이었던 무언가로 만들려고 했고, 그 자리에 있었던 미스트와 아샤는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엘라를 말렸다.

그리고 그 덕에 살아남은 한 대신은 거기에서 엘라에게 기름을 부었다.

뭐라고 했더라?

창녀의 딸이라 그런지 제대로 된 예절도 모른다고 했었던가?

엘라가 첩조차도 안 되는 존재의 딸인 건 맞지만, 왕족의 앞에서 대놓고 그런 미친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오죽 황당했으면 불 같이 화를 내던 엘라가 순간 마력을 방출하는 걸 멈추고 그 대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을 정도.

당장에 불경죄로 곤장을 때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미스트는 엘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늘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제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술 내놔.”

“네, 공주님.”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서 흉흉한 푸른 안광을 쏘아내는 엘라.

미스트는 평소에 건네주는 도수가 낮은 와인이 아닌 빈자의 구원이라는 싸구려 럼을 잔 없이 엘라에게 건네줬고, 엘라는 그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맛이 느껴지기는커녕 알코올의 향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둔해진 감각.

엘라는 손끝을 바들바들 떨다가 미스트에게 손을 뻗었고, 미스트는 엘라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늘을 꺼내 손가락을 찔러주었다.

그러자 피가 피부 위에서 방울지더니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 피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핫! 아픈 건 느껴지네! 아하하핫! 그렇게도 죽기 싫었나?”

“공주님.”

“왜!?”

“술병을 이리 주세요. 부서졌어요.”

“……하? 아? 아하하하……, 씨발.”

맛도, 향도, 취한다는 느낌도 느낄 수 없는데 고통만은 지독하게도 느끼는 몸.

엘라는 그런 자신의 몸이 싫어 미친 듯이 웃다가 미스트의 말에 자기 손을 쳐다봤고, 이내 자기가 방출한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먼지로 변하고 있는 술병을 보고는 술병을 던져버렸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서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술병.

미스트는 그 소리에 새 술병을 건네주었고 엘라는 다시 술을 마시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싸구려 럼 특유의 쌉쌀한 맛이 입안에 감돌면서 위 안을 뜨겁게 달구자 엘라는 천천히 눈을 뜨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스트, 나는…….”

“네. 말씀하세요.”

“나는 왕가가 싫어. 수도의 대신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꼴도 보기 싫어. 별 쓸데도 없는 부서의 장이면서 한 부서의 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면 당장에 턱 아래쪽을 없애버리고 싶어.”

“알고 있어요.”

“그 좆 같은 새끼들……, 수도채로 지워버리고 싶어.”

“준비해둘까요? 아샤 씨와 저, 그리고 공주님이라면 어떻게든 수도를 날려버릴 수 있는데.”

최강의 마법사와 최강의 전사가 있다.

암살자야 자기가 엘라와 함께 전부 죽였으니까 남아있는 왕국의 암살자들은 어중이떠중이들 밖에 없고 궁수들은 자기가 미리 처리하면 된다.

그리고 들킨다고 해도 그들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엘라가 죽겠다고 각오하면 최소한 이 수도는 날려버릴 수 있다.

자기가 미리 사보타주 해둔다면 왕과 대신들은 도망칠 수도 없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엘라는 죽음을 각오할 수 없는 사람이고, 자기의 죽음을 각오할 수 없는 만큼 타인의 죽음도 각오할 수 없으니까.

만약 그렇게 하게 된다면, 그건 엘라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겠지.

무서워서, 죽는 게 너무나도 무서워서 길동무를 어떻게든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자기의 역할이다.

그렇게 생각한 미스트는 엘라에게 창부를 불러줄지 물어봤고, 엘라는 미스트의 말에 푸른 눈동자를 천천히 돌렸다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젓는 엘라.

섹스로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스트레스가 너무 강했다.

하긴 대신들이 엘라에게 개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엘라가 결혼도, 약혼도 하지 않은 것 때문이었는데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섹스를 하고 싶을 리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미스트는 새로운 술을 꺼내와서 엘라에게 건네주었고, 엘라는 멍하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병이 비면 다시 한 병, 또 비면 또다시 한 병.

점점 얼굴이 붉어지자 미스트는 이 이상은 급성 알코올 흡수로 인한 쇼크가 일어날 거라면서 엘라를 말렸고, 엘라는 한껏 붉어진 얼굴로 미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술은 됐으니 과일을 달라고 말하는 엘라.

미스트는 엘라의 말에 싱긋 웃으면서 여러 종류의 과일을 들고 오기 시작했고, 엘라는 미스트의 미소에 눈을 깜빡이다가 미스트에게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며 명령했다.

그러자 미스트는 군말 없이 엘라의 옆자리에 앉아 과일을 깎아주었고 엘라는 미스트에게 기대어 눈을 깜빡이다가 책을 펼쳤다.

“미스트.”

“네, 공주님.”

“책은 책이겠지.”

“당연하죠.”

“이 책이 뭔지 알아?”

“음, 왕가의 사람과 평민의 로맨스를 그린 소설이네요. 공주님이 발주해놓으신 책이라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책은, 책이지?”

“네. 혹시 연애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응. 이런 책처럼……. 아니, 이런 책이 아니더라도 연애소설에 나올 법한 사랑을 해보고 싶어.”

“그렇군요. 여자를 물색해드릴까요?”

“아니, 그런 건 됐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여는 엘라.

“내가 왕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왕궁에 있는 년들은 좋게 말해서 귀족가의 영애지 창녀들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어. ‘왕가에 접촉하고 싶다.’, ‘다른 귀족들과 연을 만들고 싶다.’. 그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나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겠죠? 공주님은 육욕으로 스트레스를 억누르고, 영애들은 진짜 애인이 생기기 전에는 자기가 공주님의 애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멋대로 싸우겠죠.”

“푸흐흐흐……. 나는 언제 뒤질지도 모르는데.”

“암살자 말씀이신가요?”

“아니, 이제 암살자는 됐어. 너를 제외하면 이제 나를 암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샤 밖에 없는데 너희 둘은 나를 죽이진 않을 거야. 하지만……, 언제 자살할지 모르겠어.”

“으음, 요즘에도 잘 못 주무시겠나요?”

“응. 요즘 들어서 더 심해지고 있어. 배가 아파. 마력에 집중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내장이 흘러나와서 죽을 거 같아.”

PTSD가 도졌는지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채 옷을 벗는 엘라.

엘라의 몸에는 꽤 많이 지워졌지만, 길다란 칼자국이 나있었고 엘라는 그 흔적을 손으로 훑다가 이내 손톱을 세워 자기 몸을 긁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살을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손가락.

하지만 흉터에 걸리기 시작하자 거기에서부터 살이 찢어지며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엘라는 자기 몸에서 올라오는 고통과 흐르는 피를 보며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엘라를 억지로 눕히고 상처를 치료하는 미스트.

미스트는 이왕 옷을 벗은 겸 흉터를 지우자면서 약을 꺼냈고 엘라는 미스트의 말에 눈물을 글썽이다가 손에 잡히는 것들을 있는대로 던지기 시작했다.

“집어치워! 씨발!”

“공주님.”

“닥쳐! 닥쳐! 닥쳐어어어! 끄윽, 끄으윽……. 웁……!”

“여기 통 있어요.”

“웨에에에엑!”

술을 과하게 먹은 데다가 울면서 발악했기 때문일까?

엘라는 보기 드물게 헛구역질하다가 미스트가 건네준 통을 받아들자마자 속에 있는 걸 게워내기 시작했고, 이내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불을 꽉 끌어안았다.

“윽, 흐끅…….”

한참을 이불에 고개를 파묻고 우는 엘라.

미스트는 엘라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다가, 엘라가 한껏 부은 눈을 한 채 몸을 일으켜 세우자 눈가를 진정시키기 위한 로션을 발라주고 몸의 흉터에는 흉터를 지우기 위한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생긴 흉터라 몸이 크면서 자연스럽게 몸을 적게 차지하기 시작한 흉터.

하지만 아무리 작아졌다고는 해도 40cm가 넘는 자상의 흉터는 보기 흉했고, 엘라는 자기 몸에 약을 바라는 미스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언제쯤 책에 있는 사람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야?”

“글쎄요? 모르겠어요. 제가 아무리 이런저런 일을 했다고 해도, 왕가에서 사람을 빼내는 일은 안 해봤으니까요.”

“……미스트.”

“네, 공주님.”

“넌 내가 죽자고 하자면 같이 죽어줄 거야?”

“당연하죠. 이제 이 세상에 저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공주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같이 죽어드릴게요.”

엘라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답하는 미스트.

엘라는 미스트의 대답에 눈물을 글썽이다가 몸을 얌전히 눕힌 채 치료를 받아들였고, 미스트는 엘라의 반응에 엘라의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미스트.”

“네.”

“난 말이야, 왕족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내 능력 하나만으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어.”

“그렇죠. 공주님이라면 모험가로 태어나셨더라도 세계를 뒤흔들 모험가가 되셨겠죠.”

“하지만 난 왕족이야. 왕족이니까 왕족의 의무를 받아들였고, 나라를 나보다 더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위해서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어.”

“그렇죠.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요? 공주님만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을 힘든 내색하지 않고 꾸준히 하시는걸요. 영애를 모아서 하룻밤의 관계를 가져도, 술독에 빠져서 사셔도 신하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남성을 사귀라고밖에 말하지 못하잖아요? 전부 공주님의 위업을 두려워해서겠죠.”

“그래, 그 일을 내가 하지 않으면 그들이 대신해야 하니까 그들은 내 여성편력이나 술 취향 같은 걸 아무 말도 못 해. 그렇다면 말이야…….”

“네.”

“나, 그냥 그런 거 안 하고 있잖아……, 많은 걸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내 신분 대신 나를 봐주는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되는 걸까?”

“재력이나 그런 건 괜찮아요?”

“그건 내가 노력해서 얻은 거니까 내 능력을 좋아 해주는 거잖아. 적어도 그 창녀들이랑은 다르게……. 사실 그것도 싫어! 하지만, 하지만…… 양보할 건 양보해야겠지.”

“그렇군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게 불가능하다고 느껴져……. 나는 결국 그 또라이 새끼들의 말처럼 어쩔 수 없는 결혼을 하고,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미스트를 바라보는 엘라.

미스트는 오랜만에 보는 엘라의 약한 모습에 조용히 엘라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고, 엘라는 미스트의 포옹에 눈물을 억지로 삼키다가 미스트를 끌어안았다.

“공주님.”

“……응.”

“저는 공주님이 어디로 가시든 공주님을 따라갈 거예요.”

“죽어도?”

“같이 죽어드릴게요.”

“……응. ……그럼 잘래. 옆에 계속 있어.”

“알겠습니다.”

엘라의 말에 싱긋 웃더니 자기 허벅지를 내어주는 미스트.

엘라는 그런 미스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가, 잠시 후 뭔가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냄새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녹색의 머리카락.

엘라는 그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지다가 이내 자기가 꿈을 꿨다는 걸 깨달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으응? 일어났어요?”

“응. 일어났어.”

배시시 웃는 얼굴로 자기를 맞이해주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얼굴을 보자 피식 웃으면서 레이시를 끌어안았고, 레이시는 엘라의 포옹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엘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엘라가 피식 웃자 똑같이 웃으면서 엘라를 끌어안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다가 레이시를 꽉 끌어안고 귀를 약하게 깨물었다.

“사랑해.”

“……에?”

“사랑한다고.”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사랑해.”

“……우, 으우우우…….”

“사랑해.”

“저, 저도 사랑해요. 엘라.”

“정말?”

“으으응……,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요?”

“난 어린애 아닌데? 무서운 꿈 꿨다고 울지는 않아.”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부끄럽게.”

“그냥, 사랑하니까. 사랑해. 응, 그 무엇보다도 사랑해.”

얼굴을 붉히면서 엘라를 껴안는 레이시.

레이시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아무래도 부끄러운 건지 얼굴을 붉힌 채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작게 웃다가 레이시를 끌어안은 채 가볍게 입술을 겹쳤다.

“사랑해.”

“……아으으으. 며, 몇 번이나 말할 거예요?”

“내가 만족할 때까지. 사랑해. 사랑해, 레이시. 너무 사랑해…….”

능글맞게 웃으면서 레이시를 눕히는 엘라.

레이시는 일어나자마자 그런 걸 할 생각이냐며 얼굴을 붉혔고, 엘라는 레이시의 옷을 천천히 벗기면서 싫으면 말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시선을 피하면서 조용히 엘라의 등을 끌어안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포옹에 배시시 웃다가 여느때처럼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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