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그대를 위한 기사도1
* * *
“후우우…….”
레이시의 유혹을 간신히 이겨내고 벽천화 기사단의 숙소로 간 아샤.
아샤는 곧바로 마리아를 불렀고, 마리아는 아샤의 부름에 자기도 바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아샤에게 갔다.
“너, 바쁘다는 거 레이시랑 관련된 일이지?”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벽천화 기사단에서 몇 년 굴렀는데 그런 것도 모르겠냐? 엘라와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나 하겠지. 아니면 레이시거나.”
“그……, 네. 맞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왔는데.”
“엘라의 명령이야. 루룬 마케르크의 이름으로 오는 거 말고는 싹 다 거절해.”
“네? 정말요?”
“응, 엘라의 명령이야. 뒷감당은 자기가 하겠다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
엘라가 명령을 내리진 않았지만, 자기가 아는 엘라라면 레이시가 궁중 예절에 대한 걸 어느 정도 익히기 전까지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레이시가 귀족이 되는 걸 막았던 이유 중 하나가 레이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러니 엘라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마리아에게 엘라가 할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고, 마리아는 아샤의 말에 왠지 엘라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 거 같다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아, 고마워요. 솔직히 좀 고민이었거든요. 이런 일로 공주님에게 가면 뭔가 한 소리 들을 거 같고.”
“엘라는 일 가지고 오는 거로는 뭐라고 안 해.”
“그건 아는데 그……, 전에 공주님하고 섹스하던 아가씨가 되게 길길이 날뛰어서요.”
“지금은 아마 그렇게도 화 안 낼거야. 이제 그런 건 레이시하고만 하니까.”
“어…….”
아샤의 말에 저번에 엘라가 기사단 숙소에 쳐들어온 일을 떠올려보는 마리아.
생각해보면 아무리 엘라가 직접 스카우트한 메이드라고 해도 뭔가 이상한 점이 있긴 했다.
저택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대체 어떻게 국왕의 명령서를 들고 왔고, 왜 도망친 메이드를 잡기 위해 엘라가 직접 기사단에 찾아왔을까?
평범한 메이드라면 그렇게 할까?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하자 마리아는 뭔가 생각하기 싫은 가능성이 떠올라 어색하게 웃으면서 아샤를 바라봤고, 아샤는 마리아의 추측이 맞다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그러자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마리아.
아샤는 마리아의 표정 변화에 어깨를 으쓱이며 좋은 대로 생각하라고 말했고, 마리아는 아샤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이내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이런 일은, 함부로 생각하면 자기만 힘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한 마리아는 아샤의 말대로 루룬을 제외한 귀족들의 편지는 모두 거절하겠다고 말했고, 아샤는 마리아의 대답에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샀던 고급 과자와 술을 마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부하들하고 나눠먹어.”
“오, 오오오……!”
“배그 영지에서 나오는 맥주야. 품질은 그럭저럭 좋다는 거 같으니까 일 끝나고 마셔.”
“감사합니다! 대장!”
“전 대장이겠지. 언제까지 대장이라고 말할래?”
“영원히! 제 대장은 아샤 대장 밖에 없다구요?”
“병신, 헛소리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 ……그럼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 돌릴 테니까, 일 조심해서 해.”
“넵!”
아샤의 욕에도 기분 좋다는 듯 술을 들고 부하들을 불러 모으는 마리아.
아샤는 그런 마리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다가 멜리아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받은 물건들을 건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건을 건네주고 감사인사를 받은 아샤는 빨리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과 다르게 한 시간이나 걸리고 나서야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흐아아암~, 으응. 늦었잖아요.”
“그, 미안…….”
자기가 늦었다는 걸 아는지 쭈뼛거리면서 저택으로 들어가는 아샤.
솔직히 말해서 레이시가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아샤는 레이시가 잠옷을 입고서 뾰로통하게 자기를 쳐다보자 당황하면서 사과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사과에 키득 웃으면서 아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샤는 쭈뼛거리면서 손을 내밀었고, 레이시는 얼른 가서 자자며 아샤를 엘라의 침실까지 끌고갔다.
침실 안은 쾌적한 온도로 엘라의 방에서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었다.
엘라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고 미스트는 가죽 공예를 하고 있었으며,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오기 전까지 멍하니 있다가 레이시가 돌아오자 레이시를 껴안고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신입 메이드가 엘라는 쉴 때도 우아하게 쉬냐고 물어봤었지.
아샤는 평민 출신으로 엘라를 존경하던 신입 메이드의 기대에 찬 얼굴을 떠올리고는 현실은 절대로 말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올 때까지 기다렸으니까 재워줘.”
“지랄.”
엘라의 말에 욕설을 내뱉으면서 머리를 긁는 아샤.
아샤는 흔들의자를 찾더니 허리춤에 작은 쿠션을 던지고는 흔들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레이시는 편하게 자는 게 어떻겠냐고 아샤를 바라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침대에서 자면 나중에 저녁에 못 자니까 꺼려진다고 대답하며 레이시에게 편하게 자라고 말했다.
“으으응……,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잘 자.”
아샤를 기다리는 게 꽤 피곤했는지 아샤가 잘 자라며 대답해주자마자 미네르바의 품에서 곯아떨어지는 레이시.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들자 아샤는 눈을 힐끔 뜬 다음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엘라와 눈을 마주쳤다.
“……귀족들 편지는 루룬의 것 말고는 전부 거절해뒀어.”
“그래?”
“그럴 생각이었잖아?”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가 미스트에게 럼이 있는지 물어보는 아샤.
엘라는 아샤의 주문에 눈을 가볍게 흘기다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계속해서 아샤에게 말하라고 눈치를 줬고, 아샤는 엘라의 눈치에 왕궁의 직원들이 레이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레이시를 모르니까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는 거 같더라.”
“그거 웃기네. 사실 정반대인데.”
“그리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레이시를 걱정하고 있더라.”
“그래?”
“벽천화 기사단부터 시작해서, 내가 레이시의 훈련을 위해서 도움을 받았던 곳의 사람들은 전부 귀족들이 해코지할 거라고 걱정하더라고. 로라라는 전적도 있고 말이야.”
“그 부분은, 같이 해결하기로 했어. 힘을 합쳐서 말이야.”
“……그래?”
엘라의 대답에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좌우로 젓는 아샤.
레이시가 다른 사람하고 힘을 합쳐서 고난을 극복하는 건 자기가 바랐던 모습이니까, 질투심을 느껴서는 안 되겠지.
애초에 자기가 엘라에게 질투를 느낄만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럼을 벌컥 들이키더니 눈을 감으면서 보고는 끝났다고 말했고, 엘라는 평소와 다른 아샤의 모습에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으면서 아샤에게 보라는 듯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뿔을 약하게 깨물었다.
그러자 몸을 비척거리면서 엘라를 끌어안는 레이시.
덕분에 아샤뿐만이 아니라 미네르바까지 엘라를 노려봤지만, 엘라는 레이시가 좋아하는 건 자기라는 듯 자신감에 가득한 얼굴로 레이시를 끌어안았다.
“……쯧.”
이상한 자신감으로 가득 찬 엘라의 얼굴에 혀를 강하게 차면서 시선을 돌리는 아샤.
아샤는 더 귀찮게 하면 도끼를 던지겠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자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아샤의 반응에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으면서 레이시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다 같이 모여서 낮잠을 자는 일행.
레이시는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도 모두 모여있자 배시시 웃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왔고, 아샤는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척에 눈을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안 자?”
“아, 깨웠어요?”
“아니, 낮잠이니까 원래 깊게 안 자는 편이야. 고통만 가실 정도로 자는 거지.”
“그렇구나……, 아, 조금 배고프시면 뭐 좀 만들어드릴까요?”
“응?”
“샌드위치는 어떠세요?”
“어……. 응, 부탁할게.”
레이시의 말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대답에 금방 만들어주겠다면서 부엌으로 내려갔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뿔을 긁다가 레이시를 따라갔다.
바게트빵을 자르더니 버터에다 굽는 레이시.
레이시는 잠시만 기다리라더니 꽤 익숙한 손놀림으로 베이컨을 구우면서 베이컨 기름으로 달걀프라이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얼음물에 양상추를 뜯은 레이시는 잘라둔 바게트빵에 차곡차곡 쌓은 다음 아샤에게 건네주었고, 아샤는 레이시의 샌드위치를 빤히 보더니 입에 넣었다.
“……맛있네.”
재료 자체가 신선해서 맛있는 것도 있지만, 레이시가 자기를 위해서 만들었기에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맛.
아샤는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레이시가 배시시 웃으면서 자기를 바라보자 손을 손수건으로 닦은 다음 레이시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으냣!”
“풉.”
“으우, 맛 없어요?”
“아니, 맛있네. 미스트가 해주는 것보다도.”
“에이, 그건 오버다.”
“나는 야차니까 말이야.”
“……아.”
아샤의 말에 저번에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배시시 웃으면서 자기가 해주는 게 맛있는 거냐며 아샤를 바라봤고, 그런 레이시의 얼굴이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웠던 아샤는 다시 한번 레이시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그리고는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넣는 아샤.
아샤는 손가락에 묻은 계란 노른자를 대충 핥아먹더니 손을 씻고 나와 잘 먹었다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레이시는 아샤의 손길에 환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아직 졸려?”
“에헤헤, 아니요오~. 그냥 나른한 거예요.”
“그럼 산책이라도 다녀올래? 밤이라서 갈 수 있는 곳은 얼마 없지만.”
“가볼래요.”
“미네르바는?”
“아직 자요.”
“흐응, 그래?”
레이시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등불을 들고 오더니 레이시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고 밖으로 나가는 아샤.
아샤는 나름 풍경이 괜찮은 곳을 소개해주겠다면서 한 손으로는 레이시의 어깨를 감싸안고, 한 손으로는 등불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자기가 산책할 때마다 가던 곳.
계절에 맞지 않는 꽃을 키우기 위해서 만든 유리 온실이었다.
천장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있어 저녁이 될 때쯤에는 달빛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고요한 곳이었고, 아샤는 생각하기 좋지 않냐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등불을 끄고 달빛을 바라보는 아샤.
아샤는 적당히 따뜻한 온실 안의 온도에 여기는 역시 밤에 오는 게 좋다며 키득키득 웃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낮엔 햇빛까지 겹쳐져서 엄청 덥거든. 이렇게 못 붙어있어. 그리고 낮에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너무 쨍해서 보기 싫어.”
“그렇구나.”
하긴 더우면 이렇게 붙어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아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아샤는 레이시가 자기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쭈뼛거리다가 레이시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여기까지 걸어올 때는 아무렇지 않게 껴안고 왔는데 난 뭘 이제와서 부끄러워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시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매만졌고, 레이시는 아샤가 자기 어깨를 쓰다듬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샤를 쳐다봤다.
그러자 다급하게 눈을 피하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볼이 약간 붉어진 걸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샤가 왜 그러는지 깨달았다는 듯 웃으면서 아샤의 볼을 콕콕 찔렀다.
“쪽…….”
그리고 아샤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입술을 가볍게 맞추는 레이시.
레이시는 배시시 웃으면서 아샤를 쳐다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입맞춤에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되더니 입술을 가리고 고개를 홱 돌렸다.
“……뭐하는 거야?”
“아샤가 뽀뽀하고 싶은 거 같아서요.”
“……그냥 머리를 기대서 어깨를 끌어안으려고 했을 뿐이야.”
“엣.”
“우으…….”
아샤가 한숨을 내쉬며 부끄러워하자 덩달아 부끄러워져서 눈을 돌리는 레이시.
두 사람은 정원에서 한참 쭈뼛거리다가 이내 달빛이 조금 옅어지자 조심스럽게 서로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추우니까 돌아가자.”
“네. 아샤.”
“스승님.”
“에헤헤, 부끄러우세요?”
“……시끄러.”
자기 마음을 읽는 레이시의 말에 가볍게 이마를 때리고 한숨을 내쉬는 아샤.
아샤는 등불의 불을 다시 켠 다음에 레이시를 껴안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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